118화
“그럼 공작과 나도 위험한 것이 아닌가.”
“미리 준비해 둔 장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으로 피하면 됩니다. 신전이 모두 무너져 내려도 끄떡없는 곳이지요. 안전하게 만드느라 돈을 꽤나 많이 들였습니다.”
당혹감에 젖어 다급히 질문을 던졌던 더스틴은 라세트 공작의 대답에 안도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그런 곳이 있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렇게 되면 피해가 많이 크지 않겠나? 폭발에 휘말리는 귀족들도 많을 것 같은데.”
“물론 많은 수의 귀족들이 죽게 될 겁니다. 그로 인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들도 발생하겠지요. 민심 역시 최악으로 갈 수도 있고.”
말을 멈춘 라세트 공작은 그 특유의 느긋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실패해서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더스틴이 수긍하자 라세트 공작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폭탄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된다면 폭탄을 터트릴 일도 없겠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겠어. 그건 공작에게 맡기지. 그런데 엘리는 어떻게 하지?”
또다시 튀어나온 엘리시아의 이야기에 평온하던 라세트 공작의 미간이 꿈틀했다.
“무엇을 말씀입니까?”
“그런 최악의 경우가 생기면 엘리가 날 따라올 리가 없지 않나. 급박한 상황이니 빨리 움직여야 할 텐데 끌고 가는 것도 한계가 있을 거고. 기절이라도 시켜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더스틴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깊게 내쉰 공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성인 남자의 손바닥만 한 목각 상자였다.
“그러실 줄 알고 특별히 마련해두었습니다.”
“뭐지, 이건?”
상자를 집어 들고 안의 물건을 확인한 더스틴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상자 속에는 팔찌와 반지가 각각 한 개씩 들어 있었는데 둘 다 붉은색이었다.
“이건 흔한 반지와 팔찌가 아닌가.”
실망한 그가 상자를 내려놓으려고 하자 라세트 공작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것들이 단순히 반지와 팔찌로만 보이십니까?”
“아니란 말인가?”
“전부 마도구입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마도구이지요.”
“이게 마도구라고?”
“그렇습니다. 반지와 팔찌가 한 쌍이고, 반지를 낀 사람이 팔찌를 찬 사람의 몸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더스틴과 시선을 마주하며 라세트 공작은 빙그레 웃었다.
“아쉽게도 정신까지는 조종할 수 없지만 몸 만큼은 완벽히 통제한다고 하더군요. 귀족가에서 정신병이 있는 가족을 비밀리에 통제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도구라고 합니다.”
라세트 공작의 설명을 들은 더스틴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즉, 이것만 있으면 엘리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군.”
“맞습니다. 그러니 약혼식 날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그 팔찌를 후작에게 채우십시오. 그럼 후작은 전하께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겁니다.”
“내 마음대로 엘리를 움직일 수 있다라…… 요 근래 들었던 말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군. 앞으로도 아주 유용하게 쓰이겠어.”
그렇지 않아도 거사가 끝난 후 엘리시아를 침대로 어떻게 끌고 갈지 고민하고 있었던 더스틴으로서는 라세트 공작이 가져온 마도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히죽거리며 반지를 손에 껴보고 있던 더스틴은 공작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다만.”
“다만?”
“그 마도구를 쓰실 수 있는 건 그날 하루뿐입니다.”
“어째서? 사 온 것 아니었나?”
“거금을 주고 잠깐 빌려온 겁니다. 상대의 의지를 속박하는 주문이 걸린 마도구다 보니 마탑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나와서 확인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약혼식 다음 날 오전까지는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잊어버렸다고 하면 될 것이 아닌가.”
“마도구에 추적마법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
“어쨌든 그날 하루는 후작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이상의 욕심은 버리십시오.”
침묵하던 더스틴은 짜증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추적마법까지 걸려 있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이거… 미리 시험해봐도 되겠나? 정작 그날 가서 안 되면 곤란하니 말이야.”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만큼 해보십시오.”
“안 그래도 오늘 침실로 시녀를 하나 불렀으니, 그 계집에게 테스트해보면 되겠군.”
라세트 공작의 허락을 받은 더스틴의 눈빛이 음흉스럽게 빛났다.
⚜ ⚜ ⚜
평소와 다름없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속이며 행동하는 가운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10월 1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달력을 가만히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어둠이 드리워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밤만 지나면 드디어 결정되는 건가. 날아오를지 추락할지.”
구름에 가린 달을 가만히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가만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동안 라세트 공작과 더스틴에게 당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우들과 함께 해왔던 수많은 일과 함께.
그리고 그 기억들의 모든 끝은 한 남자에게로 이어졌다.
차악의 선택이라 생각했던 것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바꾸어버린, 이제는 다른 남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 소중한 남자.
‘그의 몸 위에서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이런 관계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머릿속으로 그와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곤란한 상황인 것 같은데, 필요하다면 한 번 더 빌려주지.]
처음으로 그와 얽혔던 연회의 밤.
그때만 해도 해리스의 부작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뿐, 그에 대한 감정은 없었다.
[침대를 데워줄 남자가 필요하다면 난 어떤가?]
조나단을 응징하러 갔던 자리에서도 점잖게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었고.
그런데…….
[엘리라고 부르게 해주게. 그대와 나, 단둘만 있을 때는.]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슴께를 살랑이는 미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그 미풍이 점점 세져 그녀의 온몸을 감싸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답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받으니 무척 기쁘군.]
먼저 입을 맞추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미 이 남자에게 빠졌는지도 모르겠다고.
[내게도 자격을 주지 않겠어? 그대가 내 앞에서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자격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던 것도,
[가능한 무겁게 빌려드리도록 노력해보지. 주인께서 원하는 것이라면.]
미칠 듯이 황홀한 쾌감에 젖어 들었던 것도 모두 그의 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것도 괜찮군. 난 그대가 내게만 응석을 부려줬으면 좋겠거든.]
그리고 이제는 진심으로 그를 믿고 의지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고 보면 이케르와 만난 뒤 많은 것이 달라졌네.”
감았던 눈을 뜬 그녀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통신구를 쳐다보았다.
내일이 오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꺼내놓은 것이었다.
라세트 공작과 더스틴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엘리시아는 일주일 넘게 후작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약혼식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그들이 그녀를 후작저에 가둬버렸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케르와도 만날 틈이 있을 리 없었다.
“얼굴이라도 보면 힘이 날 거 같은데 왜 이건 얼굴이 안 보이는 거야…….”
속상한 마음에 통신구를 쿡쿡 찔러보던 엘리시아는 갑자기 통신구에 환하게 불이 들어오자 화들짝 놀랐다.
[엘리?]
잠든 사람의 얼굴을 몰래 쿡쿡 찌르다가 눈을 마주쳤을 때의 심정이 이러할까. 머쓱해진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네. 저예요.”
괜스레 찔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나간 모양이었다. 곧바로 그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그냥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들어와서…….”
[내가 놀라게 했나보군.]
당장이라도 그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흘러나올 것 같아 엘리시아는 급히 두 손을 저으며 말을 돌렸다.
“살짝 놀랐을 뿐입니다.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니에요. 그런데 이건 목소리만 나올 수 있는 겁니까? 얼굴도 보이면 더 좋을 텐데요.”
[지금은. 하지만 테스가 연구를 하는 중이니 언젠가는 나오겠지.]
“아직 먼 이야기잖습니까. 아쉽네요. 사실 지금… 당신 얼굴이 보고 싶었거든요.”
귀 끝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도 같았지만 엘리시아는 꿋꿋하게 하고 싶었던 것을 입에 담았다. 어차피 얼굴도 안 보이는데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그러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그대가 보고 싶군.]
귀에 감기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엘리시아의 표정이 금세 흐물흐물해졌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입매를 실룩이면서도 그녀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말인데.]
“말씀하십시오.”
[지금 여기로 와줄 수 있겠나?]
“예?”
엘리시아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데이모스 공작저를 말하는 건가? 설마…….’
단 한 번 밖에 가 본 적 없는 곳인데 갇혀있는 그녀가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케르가 그 사실을 모르고 말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제가 어떻게 거기를 갑니까?”
[방법이 있다면 와 줄 건가?]
“물론입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나 의아해하고 있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침실 창문은 잘 닫혀 있나?]
“예? 예.”
[커튼도?]
“어, 커튼은 아직 치지 않았습니다만.”
[그럼 커튼을 쳐주지 않겠나? 밖에서 들여다볼 수 없도록.]
“예.”
왜 이런 걸 시키지?
의아해하면서도 엘리시아는 그가 시킨 대로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꼼꼼하게 쳤다.
혹시라도 빠진 틈이 없는지 재차 확인한 그녀는 테이블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커튼 치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요?”
[잘했군. 그럼 곧 그쪽으로 보내지.]
응? 뭘 이쪽으로 보내?
또다시 흘러들어온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갑자기 옆쪽 바닥에서 빛이 새어 나오자 흠칫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