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급히 고개를 돌린 그녀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설지 않은 빛의 마법진이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건 임시 귀족 회의 때 봤던 거잖아. 그런데 이게 왜 내 침실에……?’
현실 같지 않은 상황에 멍해진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자 마법진 대신 훤칠한 미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은빛 머리카락, 노을을 닮은 주홍빛 눈동자
임시 귀족 회의에서 그녀를 돕기 위해 이케르가 데려왔던 차기 마탑주가 분명했다.
“테스란 레커드?”
놀란 그녀의 외침을 들은 것일까, 통신구에서 이케르의 느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도착한 모양이군.]
“아니 이게…….”
엘리시아가 어리둥절해하자 성큼성큼 통신구로 다가온 테스란이 대신 답했다.
“그래, 잘 도착했다. 정확하게 찍은 걸 보니 와 본 적이 있는 모양이지?”
[이전에 초대를 받아 잠깐 방문했었지.]
“초대를 받았다고?”
테스란이 묘한 시선으로 엘리시아를 흘끔 보자 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변명했다.
“스캔들 때문에 의논할 것이 있었는데 감시의 눈이 많아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깐 방문을 요청 드렸던 것뿐입니다.”
“아, 그 스캔들 말이군요.”
기억난 것 같은 테스란의 표정에 안도했던 것도 잠시, 이어진 그의 말에 엘리시아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스캔들이 아니라 사실이었으니 이케르를 침실로 초대하시는 것도 이상하진 않군요.”
“아니 그러니까 그때는…….”
“굳이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이케르도 후작님도 성인들이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산뜻한 표정을 짓고 있는 테스란을 보며 엘리시아는 차기 마탑주고 뭐고 한 대 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녀의 손이 올라가기 전에 경고하듯 이케르의 목소리가 먼저 통신구에서 흘러나왔다.
[테스. 경고했을 텐데.]
“알았어. 반가워서 장난 좀 쳤을 뿐이야. 바로 모시고 가면 되는 거지?”
[부탁하지.]
그제야 엘리시아는 테스란이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법으로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서라는 걸.
‘만날 수 있다고? 지금? 정말 그와?’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얼떨떨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그녀를 부르는 이케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엘리?]
“예.”
엘리시아가 재빨리 대답하자 짤막하지만 기분 좋은 말이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기다리고 있겠네. 그대가 오기를.]
“알겠습니다. 빨리 가겠습니다.”
호기롭게 대답한 그녀는 벌떡 일어나며 테스란을 쳐다보았다.
“뭐하십니까? 안 가십니까?”
그녀의 재촉에 테스란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도 같았지만 엘리시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이케르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 가슴이 들뜬 상태였다.
“그사이에 이렇게 가까워지다니. 하여간 남녀 일이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테스란은 엘리시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원하시는 대로 빠르게 모셔다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다만 그 전에.”
“예?”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싶어 눈을 깜빡이는 엘리시아에게 테스란은 두 눈을 곱게 휘어 보였다. 알 수 없는 미소도 함께였다.
“잠깐 제게 시간을 내주셔야겠습니다.”
⚜ ⚜ ⚜
“도착했습니다.”
테스란의 말에 엘리시아는 내심 놀랐다.
마법을 통한 공간이동이라고 해서 긴장했는데 눈 한번 감았다 뜨니 주변 환경이 순식간에 바뀌어 있었다.
물론 테스란이 마법을 쓰는 순간 빛의 장막이 그들을 감싸기는 했지만 그것도 아주 순간적으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마법은 역시 놀랍네요.”
엘리시아가 감탄하자 테스란은 싱긋 미소 지었다.
“편리한 만큼 악용될 위험성도 높습니다. 그렇기에 사용도 신중해야 하지요. 사실 이렇게 연애에 쓸 마법은 아닌데 말입니다.”
“흠흠. 그런데 여기는 어딘가요?”
장난스럽게 덧붙여진 테스란의 뒷말에 머쓱해진 엘리시아는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테스란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해왔다.
“웨스테인 신전이라고 하더군요.”
“웨스테인 신전이요? 여기가 말입니까?”
엘리시아는 믿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어제 약혼식 예행연습을 했었기에 이곳이 웨스테인 신전이라면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온 방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적인 것이었다.
돌을 쌓아 만든 방과 비슷했는데 돌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더 검고 단단한 형태였다.
“이케르의 말대로 재미있는 방이었습니다. 제법 잘 만든 일회용 마법진도 하나 새겨져 있고.”
“……?”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더군요. 하나는 마법을 통해서, 또 하나는 문을 통해서. 그에 비해 나가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던 테스란은 싱긋 으며 한쪽 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저 문을 열고 나가 보십시오. 이케르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케르가요?”
문을 쳐다본 엘리시아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테스란을 쳐다보았다.
“레커드 님은 같이 안 가시나요?”
“예. 이케르 녀석이 오지 말라고 하더군요. 남의 연애는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
“끝나면 불러주십시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테스란이 주문을 외우자 발아래 마법진이 나타나며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가버렸네…….”
역시 마법은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철문으로 다가선 엘리시아는 손잡이를 잡고 힘껏 당겼다. 철문이라 잘 열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예상과 달리 문은 무척이나 매끄럽게 열렸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문을 열고 나오면서 엘리시아는 철문의 두께에 놀랐다. 적어도 이십 센티미터는 되는 듯했다.
“이상한 곳이네. 정말 폭탄이 터져도 끄떡없겠어.”
이런 방이 웨스테인 신전 내에 있었다는 것을 신기해하며 그녀는 환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입구를 향해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또 하나의 문을 빠져나오자 드디어 엘리시아가 알고 있는 예배당이 눈앞에 나타났다.
바로 내일 더스틴과 약혼식을 치를 곳이기도 했다.
더 놀라운 건 밤이 되었으니 어두워야 할 이 공간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는 것이었다.
“와아…….”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천정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허공에 떠 있는 빛의 구슬들이 찬란하게 빛을 뿌려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던 그녀는 이케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엘리.”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단상 앞에 서 있는 이케르의 모습이 그녀의 두 눈 가득 들어왔다.
금색 수가 수놓아진 새하얀 연미복을 차려입은 그가 입매를 부드럽게 늘어트린 채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깔끔하게 올려 넘긴 머리 아래 드러난 시원스런 이마, 깊고 그윽한 눈매와 날카롭게 뻗은 콧날, 얇지도 두텁지도 않은 매력적인 입술, 조각칼로 깎은 듯한 날렵한 턱선에 훤칠하게 큰 장신의 키와 오랜 시간 검술로 다져진 탄탄한 체격까지.
예술의 신이 혼신을 다해 빚어낸 모습이 저러할까, 그의 눈부신 외모에 잠시 멍해졌던 엘리시아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이리와, 엘리.”
그녀를 부르는 눈빛은 부드럽기 그지없었고 목소리 역시 귀가 녹아내릴 만큼 감미로웠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엘리시아는 홀린 듯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밀어져 있는 그의 손위로 그녀가 손을 올리자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게 잡은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두 사람의 몸이 가까워지며 깊고 은은한 우디향이 그녀의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이제는 그녀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향이었다.
고개를 들자 달콤한 꿀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애정이 담뿍 담긴 금안이 엘리시아의 두 눈에 들어왔다.
“엘…….”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그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엘리시아는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녀는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그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겨 그대로 입술을 맞붙였다.
놀란 듯 살짝 커졌던 이케르의 두 눈이 곧 반달처럼 곱게 휘어지며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휘감았다.
입술이 벌어지고 촉촉한 점막이 맞닿는 순간 서로의 혀가 진득하게 얽혀들었다. 녹아내릴 정도로 깊고 진득한, 열정적인 키스였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과 입술이 각도를 달리해 깊게 맞닿았다. 달뜬 한숨과 신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엘리시아는 키스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짜릿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그녀의 온몸으로 흘렀다. 흥분으로 인해 몸 안 깊은 곳이 찌릿찌릿해지며 허벅지 안쪽이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강렬한 감각 속에서 엘리시아는 잡고 있던 이케르의 멱살을 놓고 손을 움직였다.
갈라진 복근을 더듬다가 서늘한 벨트를 넘어 더 아래로 내려가자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열기를 지닌 채 꽈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것이 손아래 닿았다.
엘리시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그것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자 반응이 곧바로 돌아왔다.
“하아…… 엘리.”
입술을 떼고 그녀를 쳐다보는 욕정으로 얼룩진 황금빛 눈이 아찔할 정도로 황홀했다.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케르의 모습을 보며 엘리시아는 그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한 그 욕구는 조금 전 키스만큼이나 충동적이고 강렬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달아오른 숨을 토하며 말했다.
“안아줘요, 이케르.”
“음?”
“당신을 가지고 싶어요. 지금 당장.”
장소가 신전이면 어떻단 말인가 이렇게 그를 원하는데.
야살스런 미소를 지은 채 그녀는 잔뜩 부풀어 오른 바지 위를 유혹하듯 더듬었다. 이래도 참을 수 있냐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엘리시아의 도발에 욕망으로 물든 이케르의 금안이 짙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