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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0/133)

120화

“내 주인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내드려야지.”

기다렸다는 듯 두 개의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엘리시아를 가볍게 안아 든 이케르는 키스를 멈추지 않은 채 단상 앞 의자로 향했다. 그가 앉으면서 엘리시아의 가늘고 긴 두 다리가 그의 탄탄한 허벅지 양쪽으로 자연스레 떨어져 내렸다.

“하아…… 이건 제 마음대로 굴어도 된다는 의미입니까?”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깊고 진득한 키스로 부족했던 숨을 들이쉰 엘리시아가 속삭이자 이케르는 손을 들어 그녀의 등줄기를 느릿하게 쓸었다.

“기꺼이 내어드린다 하지 않았나. 그대 원하는 대로 해봐.”

그녀에 대한 갈증으로 일렁이는 열렬하고 더운 황금빛 눈과 마주한 채 엘리시아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둔부 아래로 단단하고 뜨거운 열기를 품은 것이 느껴졌다. 굳이 자극을 가하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잔뜩 성이 난 상태였다.

흥분을 참는 듯 살짝 일그러진 그의 표정이 보기 좋다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그의 뒷머리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그사이 연미복 안으로 파고든 그녀의 손이 얇은 셔츠 아래 단단한 근육을 관능적으로 더듬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달칵 하는 쇠소리와 함께 버클이 풀어지며, 안으로 파고든 희고 가는 손가락이 거대하고 뜨거운 욕망의 덩어리를 감싸 쥐었다.

위아래로 훑어 내리는 농염한 움직임에 이케르의 목울대가 거칠게 꿀렁였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말을 지키려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며 소리없이 웃은 엘리시아는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지금까지 이케르가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만족시켜줄 차례였다.

⚜ ⚜ ⚜

“하아…….”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이 점멸할 정도의 강렬하고 지독한 쾌락에 완전히 잠식되었다가 막 제정신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먼저 움직였지만 어느 순간인가부터 이케르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쳐올리기 시작하면서 주도권이 넘어간 것이 살짝 아쉬울 뿐이었다.

그래도 휘몰아쳤던 충동만큼이나 격렬했던 행위는 그만큼 그녀에게 충족감과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위에서 움직여서 쾌감이 더 컸는지도 몰랐다.

얇은 셔츠를 통해 전해오는 심장 소리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커다란 손의 촉감을 기분 좋게 즐기고 있던 그녀는 이케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예상보다 훨씬 짙게 물들여버렸군.”

즐거움이 묻어나는 그 목소리에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물들이다니, 뭘 물들인다는 말인가.

“무엇을요?”

그녀가 묻자 이케르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며 답했다.

“그대가 2황자와 이곳에 서기 전에 내가 먼저 그대와의 추억으로 물들이려 했거든. 내일이 와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래서 이렇게 연미복을 차려입고 오신 겁니까?”

“내일 2황자도 연미복을 입을 것이 아닌가. 지고 싶지는 않아서.”

정말 이 매력적인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엘리시아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의 뒷머리를 잡아당겨 키스했다. 그가 했던 것과 달리 깊고 진득한 키스였다.

몇 번이고 혀를 얽으며 타액을 나눈 후에야 입술을 뗀 엘리시아는 이케르와 코끝을 마주 대고 젖은 입술을 달싹였다.

“비교할 만한 대상과 비교하라고 해주세요. 그 미친놈과 당신을 어떻게 비교합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군.”

“진심이라니까요. 그리고 오늘 정말 멋지십니다. 오죽하면 제가 당신을 보자마자 키스를 하고 안아달라고 했겠습니까.”

“하하. 엘리가 이렇게 칭찬을 잘하는 줄 몰랐는데.”

듣기 좋은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울리자 또다시 욕정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조금 전 키스 때문인지 그녀의 몸을 채워오는 빠듯한 부피감도 흥분을 부추겼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까지 연결되어 있는 아래쪽을 흘깃 보고는 앙큼하게 속삭였다.

“그,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게 한 번 더 내주시는 건 어떠십니까? 저 아이도 돌아가기 싫은 것 같은데요.”

엘리시아가 대놓고 유혹하자 이케르의 입매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내어줄 수는 있지만 권하고 싶지는 않군.”

“왜요?”

“내일 이곳은 전쟁터가 될 거야. 그대의 안전과 관련해 상황판단이 필요한 순간들이 많겠지. 그런데 몸이 피곤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실수를 할 확률이 높겠지요.”

“난 그대가 위험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대신 모든 일이 다 잘 끝나면 저 아이의 투정을 받아줘. 지금까지 많이 참아 와서 하룻밤 정도로는 달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부드럽게 다독이는 말인데 이상하게도 야하게 느껴진다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다 끝나면 마음껏 투정부리라 하세요. 다 받아줄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것 정말 기대되는군.”

그의 깊고 수려한 눈매가 즐거움을 담고 휘어지자 엘리시아는 묘한 오싹함을 느꼈다.

뭔가 포식자 앞에 선 초식동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뼈까지 통째로 씹혀 먹힐 것 같은 그런…….

‘에이,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빨리 고개를 저은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 없으니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두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내려가는 것을 도왔다.

바닥으로 내려선 엘리시아는 구겨진 드레스를 펴기 시작했다.

흐트러졌던 하반신을 깨끗하게 정리한 이케르 역시 그녀의 뒤쪽으로 다가와 정리를 도왔다.

“감사해요.”

“별말씀을.”

엉킨 머리카락까지 바로 해준 이케르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시아가 그 손을 잡자 그는 자신의 팔짱을 끼게 하고는 단상 앞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엘리시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인기척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러지, 엘리?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내일 행사가 열리는 장소인데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요. 지키는 사람이라도 있을 줄 알았거든요. 병사라거나 아니면 신관이라도.”

그녀의 말에 이케르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미리 합의를 봐놨으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엘리.”

“예? 누구하고 합의를……?”

“다 왔군. 그건 나중에 알려주지.”

약혼할 커플이 서야 하는 자리에 도착하자 이케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가 애정을 듬뿍 담고 그녀를 응시해왔다.

“기억해 주었으면 해, 엘리. 내가 먼저 그대와 이 자리에 섰다는 걸.”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시아는 그가 자신을 왜 단상 앞으로 데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대가 2황자와 이곳에 서기 전에 내가 먼저 그대와의 추억으로 물들이려 했거든. 내일이 와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신의 말을 지키려는 그의 행동에 엘리시아의 가슴이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

잊으라고 강요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황비가 앉아야 할 자리에서 보란 듯 사랑을 나누었던 것도, 그와 함께 먼저 단상 앞에 선 것도.

그리고…….

엘리시아는 이케르를 끌어당겨 입 맞췄다. 이번에는 서로의 온기만을 나누고 떨어지는 정중한 입맞춤이었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모든 걸 끝내주세요. 당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이러는 건 정말로 싫으니까.”

그녀의 속삭임에 놀란 듯 살짝 크게 떠졌던 금안이 곧 반달처럼 곱게 휘었다.

“약속하지. 그 전에 모든 걸 끝내겠다고.”

⚜ ⚜ ⚜

엘리시아가 이케르와 함께 있는 그 시간, 백 명의 사병들이 어둠을 틈타 소리 없이 서쪽 성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성벽에는 보초가 있었지만 달마저 구름에 가린데다 사병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있다 보니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회색 머리의 남자는 자신이 보낸 부관과 사병들이 무사히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눈을 빛냈다.

블랭키 중위.

그는 블랭키 백작의 둘째 아들로 나름대로 군대에서는 이름난 인물이었다.

야망이 컸던 그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설득과 라세트 공작의 은밀한 약속에 넘어가 퇴역했다. 일이 잘될 경우 대위의 자리에 앉혀주기로 한 것이다.

더 높은 성공을 꿈꾸며 제대한 블랭키 중위는 곧바로 귀족 가문들의 사병들로 이루어진 반란군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지내다가 약속한 날이 되어 반란군을 이끌고 서쪽 성문을 향해 올라온 것이었다.

반란군의 숫자는 총 이천. 라세트 공작을 비롯한 그를 따르는 귀족들의 사병이 천오백이었고 나머지 오백은 베라무스에서 돈을 주고 사서 훈련시킨 자들이었다.

그는 그중 몸이 날쌔고 실력이 좋은 100명을 추려 부관에게 붙여 선발대로 내보냈다. 그리고 나머지 반란군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근처 숲에 숨어있으라 지시했다.

“서부 근위대는 오백, 숫자로는 불리하지만 기습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근위대장부터 사로잡으면 사기가 금세 꺾일 테니까.”

나직하게 중얼거린 블랭키 중위는 서신으로 받은 라세트 공작의 지시를 떠올렸다.

[협조자가 문을 열어 주면 성안으로 침투해 서부 근위대를 무장해제 시키게. 그리고 기다렸다가 정오가 되면 성문을 통과해 수도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

공작의 작전대로라면 그의 부대는 두 개로 나뉘어져야 했다. 그가 이끄는 부대와 부관이 이끄는 부대.

‘역시 내가 근위대를 상대하는 것이 좋겠어.’

나머지 근위대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역습한다면 의외로 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사이 부관이 이끄는 오백 명이 황실 기사단을 상대하면 될 터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블랭키 중위의 눈빛이 성에서 조심스럽게 나오는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단단하게 단련된 몸으로 보아 라세트 공작에게 전해들었던 기사인 듯했다.

“저자가 케인 필라드인가보군. 헬리오스에서 포섭했다는.”

블랭키 중위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사이 남자의 인도에 따라 선발대가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부관을 비롯해 백 명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남자 역시 문을 닫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블랭키 중위는 숨을 죽인 채 초조하게 성공을 알리는 신호탄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근위대를 제압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반란의 승패가 결정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성안에서 쏘아 올린 것으로 보이는 신호탄이 하늘을 밝히자 블랭키 중위의 얼굴이 환해졌다.

“성공했군.”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졌다.

다음 순서를 진행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돌아가는 블랭키 중위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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