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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124/133)

124화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제 계획대로만 움직여 주신다면 별다른 피해 없이 라세트 공작의 음모를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정말입니까?]

[제가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들어봅시다. 그 계획]

데이모스 공작이 그에게 제안한 것은 놀랄 만큼 치밀하고 잘 짜인 계획이었다.

감탄한 로랜드는 자신이 직접 그 계획을 수행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공작에게 곧바로 거절당했다.

[근위대장께서 이 일을 하시기엔 너무 강직하십니다. 연세도 있으시고. 목표 대상을 바꾸려고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믿을 만한 부하 중에서 한 명 골라주시면 충분합니다.]

공작이 돌아가자마자 고민하던 로랜드는 케인을 몰래 불렀다. 그의 부하들 중 가장 그와 가깝고 믿을 만한 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계획을 들은 케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제국을 위해 자신이 미끼가 되겠다고 답했다.

그다음 날부터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케인은 민간인과의 싸움을 일으켰고 로랜드는 그걸 이유 삼아 케인을 평기사로 강등시켰다.

케인이 술을 입에 댄 것도 도박에 빠진 것도 모두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노력의 결실이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데이모스 공작 같은 젊은이가 폐하의 곁에 있는 한 제국의 앞날은 밝을 것 같군.’

성 안과 성 밖의 병사들이 동시에 진압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로랜드의 입가에 기대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 ⚜ ⚜

‘후우-’

엘리시아는 예배당 문 앞에 서서 눈을 내리깔고는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긴장이 돼서가 아니라 짜증이 치미는 것을 참아내기 위해서였다.

극도로 싫어하는 남자와 약혼식이라니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버틸 수 있는 것은 곧 끝날 연극이기 때문이었다.

이케르가 그녀에게 그렇게 약속했었으니까.

‘다들 잘 해낼 거야. 하르도, 헬리오스도, 기사단도. 그러니 이케르와 그들을 믿고 내 일을 하자.’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저들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일이었다.

표정을 가다듬은 엘리시아는 문 옆에 서 있는 시종에게 눈짓을 했다.

“엘리시아 카멜리아 후작님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시종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기나긴 싸움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화려하고 잔혹한 무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시아가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많이도 모였다. 제국의 귀족들은 다 모아놓은 것 같네.’

예배당 안의 상황을 확인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이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던 예배당은 좌석이 부족할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이래서는 피신시키기도 만만치 않겠는데.’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걱정을 담고 짙어졌다.

이케르의 지시를 받고 녹턴이 대피로와 대피 방법을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인원이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설마 라세트 공작이 아무 관련 없는 귀족들까지 죽이려 하겠어.’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단상 앞에 서 있는 더스틴과 시선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국도 그녀도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될 거라 생각하는지, 그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친놈, 냉수라도 들이부어야 정신을 차리려나.’

갱생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찬 엘리시아는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발을 내디뎠다.

모든 것이 예행연습을 했을 때와 똑같았다. 걷는 속도만 빼면.

‘그때는 천천히 걸으라고 한소리 들었었는데.’

예행연습을 떠올린 엘리시아의 입매가 보이지 않게 살짝 비틀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 빠르게 걸었다가 황비에게 잔소리 폭탄을 맞았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기껏 조언해 주신 거니 따라야지. 누구의 말씀인데.’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그녀는 걸음 속도를 더욱 늦췄다.

연습 때야 빨리 끝내려고 그랬지만 지금은 단상 앞에 빨리 가봤자 손해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더스틴의 짙은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이 보였지만 엘리시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답답하다 한들 지가 어쩌겠는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지켜보는 앞에서 뛰쳐나와 그녀를 잡고 끌고 갈 수도 없을 테고.

‘시간이나 끌자. 나는 거북이다. 나는 거북이다.’

노려보는 더스틴의 시선을 무시한 채 눈을 내리깐 엘리시아는 더욱더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케르는 단상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오는 엘리시아를 쳐다보며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느릿느릿한 입장에 여기저기서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에게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속도였다.

2황자의 옆에 서는 것이 그만큼 싫다는 표현이었으니까. 그 김에 시간을 끌려는 것도 있겠지만.

그녀가 제 속도로 입장했다면 살짝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케르는 자신을 향해 날아든 살기에 짙은 눈썹을 꿈틀했다.

이런 식으로 그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서 단 한 명, 하르 테스케 뿐이었다. 그리고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하르는 지금 베라무스의 아지트에 있어야 했다.

‘변수가 생긴 모양이군.’

이케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라시안이 곧바로 물어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오늘 이 약혼식이 평범한 약혼식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황자의 눈빛에는 긴장이 어려 있었다.

“별일 아닙니다. 잠깐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라시안은 다시 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실 기사단장에게 황족들을 잘 지키라고 눈짓한 이케르는 조용히 예배당 밖으로 빠져나왔다.

쏘아오는 살기를 따라 20미터쯤 걸어 왼쪽 복도로 접어들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하르와 조셉이 그의 두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호출이 빠르군.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지?”

이케르의 물음에 하르는 심각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베라무스 쪽은 대충 정리가 되었습니다만, 저희가 베라무스의 아지트에 갔을 때 1조직장을 비롯해 마흔 명의 조직원들이 그곳에 없었습니다.”

“역시 빼돌렸나.”

조금도 놀라지 않는 이케르를 보며 도리어 놀란 조셉이 급히 되물었다.

“각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겁니까?”

“라세트 공작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했어. 하지만 인원수는 내 예상보다 많군.”

“몇 명을 예상하셨습니까?”

“눈에 띄지 않고 숨어들어야 하니 스무 명 정도를 예상했네.”

“스무 명…….”

“라세트 공작이 불안했던 모양이야. 그 정도 숫자라면 들킬 확률이 높다는 걸 알 텐데도 움직인 걸 보니. 심어놓은 자들만으로는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겠군.”

그가 예측했던 상황에서 어긋나는 것이 얼마만의 일이던가. 카멜리아 전대 후작 부부가 마차 사고를 당한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그때는 그렇게 빨리 손을 쓸 줄 몰랐었지.’

기억을 더듬던 이케르는 하르의 질문에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황실 기사단 말고도 이곳에 추가 인원이 있는 겁니까?”

“스무 명. 수사국과 기사단에서 차출한 인원들이 하객으로 위장해 있네. 황실 기사단이 열 명이고. 자네들이 왔으니 서른다섯 명은 넘는다고 보면 되겠군. 인당 셋 정도야 손쉬울 테니.”

“조셉은 하나입니다.”

“음?”

“조셉은 1조직장을 처리할 겁니다. 나머지는 제가 맡습니다.”

1조직에 대한 조셉의 원한을 알고 있는 이케르는 하르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원하는 대로 하게. 어차피 베라무스는 자네들에게 맡긴 것이었으니.”

이케르의 대답에 조셉의 얼굴이 밝아졌다. 혹시라도 생포해야 한다고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던 그였다.

그런 조셉을 흘깃 본 하르는 이케르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는 사람들 눈을 피해 숨어들겠습니다. 각하 먼저 들어가십시오.”

“그러지. 나중에 보세.”

고개를 끄덕인 이케르는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그는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성문 쪽은 끝났을 시간이고…… 기사단 쪽은 지금쯤 부딪치고 있겠군.’

두 가지 모두 그의 손을 떠났다. 남은 것은 결과를 확인하는 것뿐.

‘예배당 쪽 인원수가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 내가 손을 얹으면 충분할 테지.’

회중시계를 다시 품속에 넣고 걸음을 옮기는 그의 얼굴에는 다가올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 ⚜ ⚜

앞장서서 말을 몰며 데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라세트 기사단을 포함해 스물두 가문의 기사단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 수만 해도 거의 팔백 명에 육박했다.

‘카멜리아 기사단과 여덟 가문의 기사단도 모두 나왔군. 다행이야.’

귀족이라고 해서 모두 기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지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데이모스 공작가와 라세트 공작가에 소속된 기사 수가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카멜리아 후작가였다.

가주가 여성이어서 그런지 카멜리아 후작가는 다른 후작가보다 기사단 육성에 공을 들였다.

덕분에 보유한 기사 수도 공작가가 보유한 기사수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아쉬운 것은 과거와 달리 이번 대의 기사단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찰스의 말대로라면 별 볼 일 없다는 건데. 확실히 재정적으로 어렵기는 한가보군. 그래도 머릿수가 있으니 쓸데가 있겠지.’

전력은 별도로 치더라도 원래의 계획대로 한 가문도 빠짐없이 나온 것에 그는 안도했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베라무스가 밀렸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각하께 서둘러 가야겠어. 베라무스 건도 말씀드려야 하고.’

속도를 올리기 위해 박차를 가하려던 데인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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