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33)

125화

데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황실근위대와 데이모스 기사단의 깃발이었다.

그는 급하게 말을 멈춰 세우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를 따라 행군하던 기사들 역시 모두 멈춰 섰다.

‘저들이 왜 여기에 있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이 상황을 데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저들은 흩어져서 웨스타인 신전 주변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황제와 데이모스 공작이 그곳에 있으니까.

게다가 그곳에 있는 것은 황실근위대와 데이모스 기사단만이 아니었다.

뒤쪽으로 보이는 깃발은 분명 황제파 귀족 가문들의 기사단 깃발이었다. 적어도 열 개는 되는 듯했다.

데인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설마 각하의 계획이 들킨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들이 저렇게 중무장한 채 길을 막아서고 있을 리 없었다.

마른침을 한번 삼킨 데인은 50미터쯤 떨어져 있는 상대의 전력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총 기사들의 수가 오백여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데이모스 기사단과 황실 기사단의 실력을 고려한다고 해도 수적으로 자신들이 우세했다.

‘어차피 사원 근처에서 맞붙어야 했던 상대들이다. 조금 많아졌고 빨라졌을 뿐이지. 그리고 곧 서문을 통과한 사병들이 합류할 거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상황이 뒤틀리면 다 쓸어버리기로 마음먹고 데인은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상대 쪽에서도 누군가 말을 몰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데이모스 기사단장 크리스틴 롬벨이었다. 삼십 대 초반의 나이로 데이모스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을 만큼 실력 있는 기사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말을 멈췄다. 경계 어린 시선이 두 기사단장 사이에 오고 갔다.

“오랜만이군, 롬벨 기사단장.”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저렇게 많은 기사들을 데리고.”

데인이 크리스틴 뒤쪽의 기사들을 눈짓하며 묻자 크리스틴은 서늘하게 웃었다.

“저야말로 기사단장께 묻고 싶습니다. 저렇게 많은 기사들을 데리고 어디에 가십니까. 모양새를 봐서는 반역이라도 하러 가시는 것 같습니다만.”

“오랜만입니다, 아르노 기사단장. 이런 식으로 뵐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만.”

역시 눈치챈 건가.

데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밖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호기롭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떡할 텐가.”

“막아야겠지요. 그것이 제가 받은 명령이니.”

“젊어서 그런지 확실히 패기가 좋군. 그대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나 저 정도 숫자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자만을 패기라고 착각하지 말게.”

데인은 자신의 뒤쪽에 있는 기사들을 눈짓하며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숫자라는 것을 보여주어 기를 꺾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입가에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서늘한 웃음이 비웃음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착각은 그쪽에서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뭐?”

데인이 발끈하자 크리스틴은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그것은 작은 신호탄이었다.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크리스틴의 행동에 공격 신호인가 싶어 급히 말을 뒤로 물리던 데인은 그의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군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자 흠칫 놀랐다.

급히 말머리를 돌린 데인의 두 눈에 움직이고 있는 깃발들이 보였다. 카멜리아 후작가를 비롯한 여덟 가문의 깃발이었다.

“멈추시오! 아직 공격할 때가 아니오!”

신호탄을 공격 신호로 알아듣고 잘못 뛰쳐나온 거라 생각한 데인이 급히 외쳤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금세 데인을 스쳐 지나간 아홉 가문의 기사단은 당장이라도 싸우려는 듯 황실 기사단과 데이모스 기사단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당황한 데인은 이렇게 된 김에 나머지 기사들에게도 공격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기세 좋게 돌격했던 아홉 가문의 기사단이 황실 기사단과 데이모스 기사단 뒤쪽으로 가 조용히 자리 잡은 것이다.

황실 기사단과 데이모스 기사단 역시 그들이 그럴 것임을 알았다는 듯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한 데인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한 남자가 말을 몰고 크리스틴 옆에 와서 섰다. 카멜리아 기사단의 기사단장 멜빈 크라우스였다.

“크라우스 기사단장! 이게 무슨 짓인가!”

분노한 데인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멜빈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우리는 주군께 지시받은 대로 하는 것뿐이오.”

“뭐?!”

“내 주군 카멜리아 후작께서는 말씀하셨소. 라세트 공작의 협박을 받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제국을 향해 검을 뽑아들 수는 없다고. 그러니 때가 되면 올바른 편에 서서 검을 휘두르라고 말이오.”

그제야 데인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저들은 처음부터 배신할 생각이었다는 걸. 그러기 위해 숨을 죽이고 순순히 말을 듣는 척했다는 것을.

‘빌어먹을.’

데인은 욕지거리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카멜리아 기사단을 포함해 아홉 가문이 넘어가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300여 명이 넘는 기사들이 이동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데인을 지켜보며 크리스틴은 보이지 않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의 주군의 말대로 아홉 개의 가문은 자신들 쪽으로 이동했고 동시에 승기 역시 넘어왔다.

‘남은 건 승리뿐인가.’

멜빈과 눈빛을 교환한 그는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반역의 무리들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 ⚜ ⚜

단상 앞에 선 더스틴과 엘리시아를 쳐다보고 있던 라세트 공작은 황제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평온한 황제의 표정에 라세트 공작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갔다.

그의 시선은 곧 황제를 떠나 데이모스 공작에게로 향했다.

조금 전 잠깐 자리를 비웠던 것 외에는 착실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젊은 공작 역시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너무 똑같아서 도리어 불안해질 만큼.

‘이상하군. 느낌이 좋지 않아.’

그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그의 사병들이 서문을 통과했어야 했다.

그럼 당연히 그 소식이 전해지고 소란스러워져야 하는데 모든 것이 너무도 조용했다. 베라무스와 기사단 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양쪽 다 연락도 없고. 설마 일이 틀어지기라도 한 건가?’

아무래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라세트 공작이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한 남자가 잔뜩 굳어진 얼굴로 빠르게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보좌관이었다.

핏기가 빠져 창백한 보좌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라세트 공작은 불길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 ⚜ ⚜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대신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엘리시아는 눈동자를 또그르르 굴렸다.

단상 앞에 서 있다 보니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아니야. 분명 잘 되어가고 있을 거야. 이케르가 그랬잖아. 빨리 끝내겠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케르의 약속이었다. 걱정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던 그녀는 대신관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로서 축사를 마치겠습니다. 두 분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신의 축복 같은 소리 하네. 이 미친놈과 같이 가는 앞날이면 악마의 저주지.

속으로 투덜거리며 엘리시아는 머릿속으로 외워두었던 약혼식 순서를 재빨리 떠올렸다.

‘입장 다음에 대신관의 축사, 그리고 반지 차례인가?’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흰 장갑 위라고 해도 더스틴이 끼워주는 반지 따위는 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쯤 뒤집어지면 좋을 텐데. 그러려면 우리가 이겨야겠지.’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솟구치는 짜증을 누르고 있던 엘리시아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시 들려온 대신관의 말 때문이었다.

“그럼 약혼 서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약혼 서약? 갑자기 웬 서약?

엘리시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분명 예행연습 때까지만 해도 그런 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생겨났단 말인가.

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대신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대신관이 다른 약혼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신관님, 약혼 서약은 절차에 없던……!”

하지만 엘리시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불쑥 끼어든 더스틴에 의해 잘려 나갔다.

“내가 대신관에게 요청했다.”

“예? 그게 무슨……!”

순간 발끈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냐고 따지려던 엘리시아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닫고 아차 싶어 뒷말을 흐렸다.

아직까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데 섣부른 행동은 위험했다.

다행히 더스틴은 그녀가 질문하는 것으로 알아들은 듯했다.

“그냥 듣고 싶더군. 엘리 그대가 내 약혼자가 되겠다고 하는 말이.”

미리 말하면 반대할 것이 뻔하니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 분명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서 좋겠다, 이 미친놈아.’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욕을 그녀가 간신히 삼키는 사이 더스틴은 대신관을 보며 계속하라고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대신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더스틴 루케 체르만은 엘리시아 카멜리아를 약혼녀로 맞이하여 결혼식 전까지 성실하게 약혼자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나온 더스틴의 대답에 엘리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신관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엘리시아 카멜리아는 더스틴 루케 체르만을 약혼자로 맞이하여 결혼식 전까지 성실하게 악혼녀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대답해야 할 순간이 오자 엘리시아는 눈을 내리깐 채 두 주먹을 꾹 쥐었다.

⚜ ⚜ ⚜

“다시 말해봐. 지금 뭐라고 했지?”

라세트 공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다시 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베라무스 1조직과 3조직이 전멸했습니다. 헬리오스가 수사국과 손을 잡고 기습해왔다고 합니다.”

보좌관의 침통한 말에 라세트 공작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설마 헬리오스가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감히 헬리오스 이놈들이……!”

분노한 그가 이를 바득 갈고 있을 때였다. 남자 하나가 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블랭키 중위에게 붙여놓았던 그의 부하였다.

급하게 달려온 듯 머리도 옷차림도 흐트러진데다가 창백하게 질린 부하의 얼굴에 라세트 공작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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