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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126/133)

126화

“블랭키 중위가 이끄는 사병들이 서문을 통과에 실패하였습니다. 블랭키 중위를 포함한 200여 명은 성 안에서, 나머지 1800명은 성 밖에서 죽거나 생포된 것 같습니다.”

잇달아 날아드는 패전 소식에 라세트 공작은 잠시 멍해졌다. 누군가가 쇠망치로 그의 뒤통수를 갈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라세트 기사단의 기사가 급한 발걸음으로 찾아든 것이다.

“기사단이 신전을 향해 출발했습니다만 황실 기사단과 데이모스 기사단을 비롯한 황제파 귀족들의 기사단들이 길을 막고 있어 교전 중입니다. 카멜리아 기사단을 비롯해 여덟 개 가문이 배신해 상황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번개에 맞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라세트 공작의 눈앞이 일순간 깜깜해졌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며 손끝부터 피가 싸하게 식었다.

당연히 성공할 거라 믿고 준비했던 세 가지 중 단 한 가지도 성공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의 몸이 순간 휘청했다.

라세트 공작은 급히 손을 뻗어 의자를 잡고 흔들리는 몸을 지탱했다.

발을 딛고 있는 단단한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던 것도 잠시 상황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올랐다.

‘헬리오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감히 우리를 배신하고 수사국 쪽에 붙을 줄이야.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카멜리아 가문과 다른 여덟 가문도 마찬가지야. 가문이 몰락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려주지.’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던 라세트 공작은 황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평소 오만하고 도도한 표정은 사라지고 창백해진 딸의 얼굴을 본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제국을 손에 넣기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얼만데 이대로 끝날 수는 없었다.

핏발 선 라세트 공작의 시선이 이케르에게로 향했다.

충격으로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단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 저 젊은 공작이라는 것. 저자를 제외하고는 그럴 만한 힘을 가진 자가 없으니까.

‘대체 언제부터 내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던 거지?’

헬리오스도 그렇지만 귀족파 아홉 개 가문을 돌아서게 만드는 건 결코 단기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애초부터 모든 것이 함정이었던 건가?’

헬리오스가 그의 손을 잡았던 것도, 카멜리아 후작을 비롯해 여덟 가문이 그의 앞에 순순히 머리를 숙였던 것도 모두 거짓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설명할 수 있었다.

‘속았던 거야. 저 여우 같은 놈에게. 그렇다면 이 약혼도 내 눈을 가리기 위한 것이겠군. 카멜리아 후작 역시 저놈과 결탁했다는 소리겠지.’

목줄을 여러 겹 덧씌웠기에 배신하지 못할 거라 방심했던 것이 크나큰 패인으로 돌아오자 라세트 공작은 헛웃음을 웃었다.

문득 더스틴의 말이 떠올랐다.

황후궁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갔던 날 한소리 하러 갔던 더스틴이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무래도 찝찝해서. 엘리와 데이모스 공작,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는 했지만.]

그때 라세트 공작은 그것이 젊은 사내의 치기 `어린 질투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의심만 했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었다.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이미 벌어진 것을. 그리고 아직 내게는 마지막 무기가 있어. 그러니 뒤집을 기회도 남아 있고. 게다가 저들은 자만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

라세트 공작의 시선이 데이모스 공작에게서 황제에게로 향했다.

여유롭고 느긋한 데이모스 공작과 마찬가지로 황제 역시 평온한 표정으로 단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함정에 빠진 목표물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아마도 저들은 완전한 승리를 위해 기사단에서의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모든 것이 실패했다는 절망을 맛보게 하기 위해.

그리고 한 번에 그의 숨통을 끊으려 하겠지.

‘바보 같은 놈들.’

라세트 공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반역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곧바로 체포했을 것이다. 모든 일은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니까.

아주 잠깐 예배당 안에 잠입시켜 둔 베라무스를 이용해 황제의 목숨을 노릴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의 모든 계획을 막아낸 데이모스 공작이라면 대비를 해두었을 확률이 무척이나 높았다.

‘결국 이것뿐인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작은 마도구를 조심스럽게 감싸 쥔 라세트 공작은 창백하게 질려 있는 황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딸을 안심시킨 그는 엘리시아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그의 눈을 속이기 위한 거짓 약혼이었다면 분명 기회는 올 것이다. 더스틴의 옆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 기회를 노리는 라세트 공작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 ⚜ ⚜

‘이걸 해야 돼? 미치겠네.’

엘리시아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눈을 내리깔았다.

차라리 약혼반지라면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흰 장갑 위에 끼기 때문에 손가락에 직접 닿지 않으니까.

하지만 약혼 서약은 그 의미가 달랐다.

대신관 앞에서 본인의 입으로 약혼을 충실하게 지키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당연히 그녀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엘리시아가 대답하지 못한 채 아랫입술만 잘근거리고 있자 더스틴의 눈매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더스틴은 곧바로 대신관을 노려보았다.

빨리 진행하라는 그의 매서운 눈빛에 대신관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엘리시아에게 다시 물었다.

“엘리시아 카멜리아는 더스틴 루케 체르만을 약혼자로 맞이하여 결혼식 전까지 성실하게 악혼녀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케르 쪽을 쳐다보았다.

그라면 이 상황에서 그녀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강렬한 금안이 눈을 맞춰왔다.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일자로 다물려 있던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늘어지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흠칫했다.

매력적인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이고 있었다. 이전 3황자의 탄신연회에서 그녀에게 말을 전해던 그 방식 그대로였다.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그려낸 문장을 확인한 그녀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대 마음대로 해.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

제대로 본 것이 맞나 싶어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보니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다정한 빛을 띠고 휘어있는 그의 금안을 보는 순간 엘리시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라세트 공작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 그리고 자유가 바로 코앞에 와 있다는 것.

혹독한 추위에 꽃잎을 오므린 채 숨어 있던 꽃이 따스한 햇살을 만나 피어나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도 생기가 차오르며 두 눈이 희망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린 엘리시아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대신관과 더스틴을 향해 미소 지었다. 화려한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두 사람이 그녀의 미소에 홀린 듯 멍해진 사이 그녀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계속해서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니요. 거부합니다.”

엘리시아가 내뱉은 대답에 예배당 안이 술렁거렸다. 여기저기서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도 들려왔다.

“엘리!”

더스틴이 경고하듯 사납게 불렀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 그의 말을 들을 이유도 없었다.

엘리시아는 대신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놀랐을 거라 생각했던 대신관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엘리시아에게 다시 물어왔다.

“지금 그 대답은 이 약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마치 그녀가 그럴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같은 대신관의 표정에 의아해하면서도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엘리!”

분노한 더스틴이 성큼 다가섰지만 엘리시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방긋 웃으며 하고 싶은 말을 덧붙였다.

“적어도 약혼이나 결혼은 정상적인 사람과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녀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던 더스틴은 곧 분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금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가?”

성난 목소리로 물어오는 더스틴에게 고개를 돌린 엘리시아는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답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더스틴에게 일침을 가한 그녀는 입매를 비틀어 보였다. 그에게 날리는 명백한 조소였다.

그녀를 가지기 위해 했던 비열한 행동들은 둘째로 치더라도 황위가 탐나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향해 칼끝을 들이미는 것은 말 그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더스틴의 폐부를 제대로 찌른 것 같았다.

이를 악문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시아는 치맛자락을 잡고 가슴에 손을 댄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런 이유로 저는 전하의 약혼녀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길.”

인사를 마친 그녀는 속이 시원해진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케르의 모습이 그녀의 두 눈 가득 들어왔다.

그녀를 향한 부드러운 그의 미소가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느껴져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하지만 그 발은 땅에 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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