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이케르에게 향하려던 엘리시아의 손목을 더스틴이 거칠게 낚아채면서 그녀의 몸이 뒤로 확 끌려갔다.
“읏……!”
놀란 엘리시아가 급히 고개를 돌리자 더스틴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보였다. 그녀의 손목은 그의 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눈살을 찌푸린 엘리시아가 잡힌 손목을 더스틴의 손에서 빼내려했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를 끌어당겨 단단하게 안은 그는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먹잇감을 놓친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분노에 찬 사나운 목소리였다.
“내가 그렇게 쉽게 널 놓아줄 거라 생각했나? 그렇게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엘리.”
“이거 놓으십시오!”
더스틴의 품 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엘리시아는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안고 이는 사내의 팔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혹감에 젖은 엘리시아가 얼굴을 구기고 있을 때였다. 묵직한 저음의 힘 있는 목소리가 예배당 안에 울려 퍼졌다.
“카멜리아 후작을 놓아주시지요, 전하. 그녀가 싫다 하지 않습니까.”
이케르?
엘리시아가 고개를 돌리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케르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눈빛과 표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화가 많이 나 있다는 것을.
문득 라시안이 탄신 연회에서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말로는 설명이 좀 어렵습니다. 앞으로 후작이 스승님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저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으니까요.]
[걱정 마세요, 후작. 후작은 그렇게 걸리지 않을 테니. 제가 보장하지요.]
그때는 반신반의했었다. 5년이란 시간을 그녀가 따라잡는 것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그녀는 그의 감정을 읽어내고 있었다.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어쩐지 기쁘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이케르를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느낌의 무엇인가가 그녀의 손목에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흠칫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목에 채워져 있는 붉은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더스틴의 입가에 어려 있는 비열한 미소도 함께였다.
“이게 무슨……!”
당황한 엘리시아가 팔찌로 손을 뻗으려 했을 때였다. 라세트 공작의 목소리가 예배당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멈추게, 데이모스 공작.”
엘리시아는 놀라 라세트 공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케르 또한 그녀에게 오던 발걸음을 멈춘 채 라세트 공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이케르와 라세트 공작 사이에 흘렀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모두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라세트 공작이 황비와 함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지켜보던 엘리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챙 소리와 함께 찰스가 비틀거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하벨이었다. 매번 대련에서 자신에게 졌던 그 하벨 로베르트 말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찰스는 조금 전 검을 맞부딪친 충격으로 가늘게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힘도 속도도 모든 것이 그가 알던 것과 달랐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하벨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네놈이 감히 나를 농락해?!”
분노한 찰스가 달려들며 검으로 찔러오자 옆으로 살짝 피한 하벨은 그 검을 가볍게 쳐내고는 빙긋 웃었다.
“그럴 리가요. 카티아 경의 실력이 퇴보하신 거겠죠. 제 실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만.”
“웃기는 소리! 네 놈만큼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조롱당했다는 것에 열 받은 찰스는 이를 악문 채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검들을 여유롭게 받아내며 하벨은 찰스가 그랬던 것처럼 혀를 쯧 하고 찼다.
“라세트 기사단의 수준이 높다고 들었는데 카티야 경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허점이 많으셔서야.”
“이……!”
찰스는 치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벨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언젠가 그가 하벨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를 더 열받게 하는 건 여전히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하벨의 모습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기에 배알도 없는 놈이다 생각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그냥 타고난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저자를 붙였던 건가? 내 눈과 귀를 가리려고?’
잔뜩 성난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던 찰스는 경쾌하게 들려오는 하벨의 목소리에 발끈했다.
“이 실력으로 단장님과 붙을 생각을 하셨다니. 목숨이 여러 개인 모양입니다, 카티아 경.”
“입 닥쳐!”
계속해서 들어오는 웃음기 어린 모욕에 눈앞이 벌게진 찰스는 검을 들어 그대로 하벨을 내리쳤다. 하지만 거대한 반동과 함께 손에서 튕겨 나간 것은 그의 검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보며 당황한 그는 하벨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당장이라도 검 끝이 목에 와서 닿을 것 같은 느낌에 조금 전 패기는 씻은 듯 사라지고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그런데 하벨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도리어 웃는 얼굴로 떨어진 그의 검을 눈짓했다.
“뭐하십니까? 안 주우십니까?”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다 싶어 찰스는 재빨리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가 안도했던 것도 잠시 몇 초 지나지 않아 그의 검은 또다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찰스를 내려다보며 하벨은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었다.
“기사가 검을 놓치면 안 되지요. 어서 일어나서 주우십시오.”
“…….”
찰스는 웃고 있는 하벨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떨어트리고 구르고 집고의 무한 반복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으며 찰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저놈의 별명은 분명 웃는 또라이일 거라고.
찰스가 기절하자 하벨을 쭈그리고 앉아 그의 얼굴을 탁탁 때렸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자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기절해 버렸잖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제 겨우 시작인데. 어디 차가운 물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하벨을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틴은 피식 웃었다.
그가 하벨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정리가 잘 되고 있는지 둘러보다가 하벨이 찰스를 가지고 노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크리스틴은 말을 몰고 다가오는 멜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카멜리아 기사단에 실력도 좋고 개성 있는 기사들이 많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영광입니다. 클라우스 단장.”
소문으로만 듣다가 그가 직접 본 카멜리아 기사단의 실력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황실 기사단에 그리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크리스틴의 칭찬에 멜빈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과찬입니다, 데이모스 기사단이야말로 놀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더군요. 기회가 되면 대련을 해보고 싶을 만큼 말입니다.”
“그거 괜찮군요. 그렇지 않아도 기사들이 황실 기사단만 상대하다 보니 나태해진 면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이번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시합 한번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그나저나 이제 완전히 끝난 것 같습니다만.”
악수를 마친 멜빈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완승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정리할 인원들만 놔두고 신전으로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두 기사단장은 신전으로 향할 인원들을 차출하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승리를 축하하듯 밝은 햇살이 그들의 머리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 ⚜ ⚜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자리에서 일어선 라세트 공작과 황비는 앞으로 걸어 나와 더스틴의 옆에 섰다.
또다시 긴장 어린 공기가 예배당 안을 타고 흘렀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라세트 공작이 이케르를 쳐다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시선은 이케르의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라세트 공작은 보이지 않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예식 중 일어서서 앞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예배당을 빠져나가라고 미리 언질 해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 귀족들이 폭발에 휩싸여 사망하더라도 국정을 운영할 최소 인원은 유지할 수 있었다.
‘저들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만 좀 끌면 되겠군. 원래 자만이 일을 그르치는 법이지.’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기에 라세트 공작은 평소처럼 오만한 표정으로 이케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약혼의 당사자는 전하와 후작일세.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해서 제3자가 나서는 것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
말을 마친 라세트 공작은 이케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엘리시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보통 여자들이 약혼이나 결혼을 앞두면 마음이 심란해진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 그래도 설마 후작 자네가 그럴 줄은 몰랐네.”
엘리시아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라세트 공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네가 변덕을 부리면 전하의 체면은 뭐가 되겠나.”
시간을 끌기 위해 그가 선택한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지금의 상황을 이용해 엘리시아를 도발하는 것이었다.
목줄이 쓰여 있던 상태에서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그녀인데 목줄이 풀린 지금 당연히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물론 그녀를 건드리면 반역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테지만 모든 것이 뒤틀린 마당에 상관없다고 라세트 공작은 생각했다.
어차피 모두 날려버릴 터인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의 예상대로 엘리시아는 발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