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변덕이라니. 이건 또 웬 신박한 개소리래?’
라세트 공작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엘리시아는 그를 노려보았다.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져서인지 지금까지 눌러두고 있던 그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그녀의 부모를 죽게 만든 것도 그녀에게 목줄을 걸어 제 입맛에 맞게 이용하려 했던 것도 다 저자의 짓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저 더러운 입으로 뭐라고 말하는 것인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두 주먹을 꾹 쥔 채 그녀는 라세트 공작을 노려보며 차갑게 웃었다.
“변덕이라니요. 제가 왜 마음에도 없는 약혼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가장 잘 아시는 분께서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라세트 공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뻔뻔한 얼굴로 잡아뗐다.
“후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나야말로 모르겠군. 전하와 후작, 두 사람이 의논해 진행한 약혼이 아니던가.”
“의논이 아니라 통보라 하셔야지요. 아니 협박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만.”
엘리시아의 입에서 협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예배당 안이 술렁였다.
라세트 공작가가 카멜리아 후작가를 내세워 귀족파를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약혼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라세트 공작의 강요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뒷말처럼 떠돌았었다.
더스틴과 함께 있는 엘리시아의 표정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뒷말에 한몫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라세트 공작이 손을 쓰고 더스틴과 거래를 한 엘리시아가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뒷말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귀족들의 가슴 한구석에는 의심이 남아 있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 엘리시아의 입을 통해 사실이 되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귀족들이 동요하는 가운데에서도 라세트 공작은 여전히 흔들림조차 없었다.
“협박이라니 무서운 말을 하는군. 내가 무엇으로 후작 자네를 협박할 수 있었겠나. 물론 내가 자네 가문에게 자금을 빌려주기는 했지만 자네가 그 정도로 협박당할 사람이던가. 어디 한번 말해보게. 내가 무엇으로 협박했는지.”
그녀가 여덟 가문의 폐부를 드러내지 못할 것을 안다는 듯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라세트 공작의 모습에 엘리시아는 기가 막히다 못해 말문까지 막혔다.
그런 그녀 대신 나선 것은 이케르였다.
“약혼이 후작의 뜻이었다면 파혼 역시 후작의 뜻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황자 전하.”
그의 말에 예배당 안의 시선이 라세트 공작을 떠나 엘리시아를 붙들고 있는 더스틴에게로 쏠렸다.
“그렇다면 후작이 선택할 수 있도록 놓아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억지로 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더스틴은 여전히 엘리시아를 힘으로 붙들고 있었다. 그런 그를 쳐다보는 이케르의 시선은 찌를 듯 날카로웠다.
귀족들의 비난 어린 시선과 함께 그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은 더스틴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이마에서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더스틴이 이를 악문 채 엘리시아를 놓을 생각을 하지 않자 이케르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반역에 실패하니 후작을 인질로라도 잡으시려는 건지?”
그가 던진 반역이라는 단어는 순식간에 예배당 안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이케르는 시선을 돌려 라세트 공작을 쳐다보았다.
“사병 2000명, 베라무스 조직원 200명, 기사단 800여 명.”
귀를 때리는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라세트 공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늘 이곳으로 오려다 실패한 자들의 숫자입니다. 각하의 야욕에 희생당한 자들의 숫자이기도 하지요. 꽤나 판을 크게 벌리셨습니다, 라세트 공작.”
“……역시 자네 짓이었군. 내 계획을 모두 망가트린 것이.”
이를 악문 라세트 공작을 보며 이케르는 느슨하게 웃었다.
“제국의 신하로서 불온한 무리를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데이모스 공작의 말이 맞다. 불온한 무리를 내버려 둘 수야 없지.”
이케르와 라세트 공작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황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라시안 역시 함께였다.
형형한 황제의 시선이 라세트 공작에게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계속해서 짐이 져왔지만 이번 판은 짐의 승리인 것 같군. 그렇지 않나, 라세트 공작?”
황제의 말에 라세트 공작의 입매가 비웃듯 비틀렸다.
“……도박판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갈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직도 포기를 못 한 건가?”
“아직 제게는 남은 카드가 있어서 말입니다.”
라세트 공작이 비릿하게 웃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조금 전부터 라세트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이 소리 없이 예배당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상황이 불리해지니 달아나는 거라 생각했는데 라세트 공작의 말과 표정을 보니 그것이 아닌 것 같았다.
‘무슨 꿍꿍이지? 어쨌든 나도 빨리 이 미친놈에게서 빠져나가야겠어.’
더스틴의 신경이 황제와 라세트 공작에게 쏠리면서 그녀를 안고 있는 그의 팔도 느슨해진 상태였다.
엘리시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팔꿈치를 들어 있는 힘껏 더스틴의 복부를 찍었다.
“윽!”
배에 가해진 충격에 더스틴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팔에 힘이 빠지자 그녀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엘리!”
새우처럼 굽혀졌던 몸을 바로 세운 더스틴이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엘리시아에게 닿지 않았다. 이케르가 만들어낸 작은 빛의 장막이 그의 손을 튕겨낸 것이다.
더스틴의 손에서 풀려난 엘리시아는 재빨리 이케르의 옆으로 움직였다.
“다친 곳은 없나?”
“예, 괜찮습니다.”
엘리시아의 대답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이케르는 그녀의 머리끝부터 빠르게 훑어 내렸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오른쪽 손목에 닿았을 때 잘생긴 미간이 살짝 접혔다.
“원래 끼고 있던 팔찌인가?”
“팔찌요? 아……!”
이케르의 물음에 엘리시아는 잊고 있던 팔찌의 존재를 기억해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요. 잡혀있을 때 저 미친놈이 갑자기 채운 겁니다.”
엘리시아의 말을 들은 이케르는 팔찌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이 팔찌에 닿기 전에 라세트 공작이 먼저 움직였다.
“폐하의 가장 큰 실수는 자만입니다. 이번 싸움의 승리는 제가 가져가지요.”
라세트 공작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손을 들어 올리자 예배당 여기저기서 검을 든 자들이 튀어나왔다.
그가 숨겨놓았던 베라무스의 암살자들이었다.
“폐하를 보호하라!”
황실 기사단장의 외침에 황실 기사들이 재빨리 황제와 라시안, 그리고 황후를 둘러쌌다.
암살자들은 곧바로 황제와 이케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중 반 이상이 하객석에서 튀어나온 자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이케르가 위장시켜 숨겨 둔 수사국 직원과 기사들이었다. 그중 한 명이 달려와 이케르에게 검을 내밀었다.
기사에게서 검을 받아들던 이케르는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짙은 눈썹을 꿈틀했다. 뭔가 옷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엘리?”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떨어져 있는 드레스 자락과 검은 바지 차림의 엘리시아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늘씬한 허벅지에 매여 있는 총집도.
이케르의 놀란 눈빛과 마주한 엘리시아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총집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혹시 몰라 위아래가 분리되도록 드레스를 좀 고쳐놨습니다. 싸우려면 바지가 편하니까요. 이상하지는 않죠?”
안전장치를 푼 그녀가 달려드는 암살자를 향해 총을 쏘며 묻자 이케르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보군. 그대는 뭘 입어도 예쁘다고.”
엘리시아의 귓가에 속삭인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총에 어깨를 맞고 비틀거리는 암살자를 단숨에 베어버렸다.
‘정말이지 선수 같다니까.’
이케르의 칭찬에 귀 끝을 붉힌 엘리시아는 재빨리 그의 옆으로 붙었다.
그를 도와 두 번째 암살자를 막 처리했을 때였다. 음산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역시 저놈과 통정하고 있었군.”
기분 나쁜 소름이 온몸에 돋는 느낌에 엘리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그녀가 몸을 돌리자 더스틴이 보였다.
“내 직감이 맞았어. 저놈이 임시회의에 나타났을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었지.”
분한 듯 이를 가는 더스틴을 쳐다보며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
“제가 누구와 무엇을 하든 전하께서 상관하실 일은 아닙니다만.”
“어떻게 상관할 일이 아니지? 내 여자가 딴 놈과 놀아나는데 그걸 가만히 두고 보라고?”
분노에 찬 더스틴의 말에 엘리시아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누구의 여자란 말인가.
그동안 억눌려 있던 그에 대한 분노와 짜증이 치솟아 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엘리시아는 더스틴을 노려보며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여과 없이 내뱉었다.
“헛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제가 왜 전하의 여자입니까? 그런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전하의 여자가 되느니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게 백배는 낫습니다.”
증오가 어린 냉랭한 그녀의 말에 더스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곧 비릿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어렸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게 낫다라……. 과연 그렇게 될까?”
더스틴은 무언가를 보란 듯 들어 보였다. 그것은 붉은색 반지였다.
‘반지? 갑자기 저런 걸 왜……?’
의도를 알 수 없어 눈살을 찌푸리던 엘리시아는 흠칫하며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더스틴이 들고 있는 반지의 색은 그녀가 차고 있는 팔찌의 색과 똑같았다.
‘설마……!’
급히 고개를 든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에 악랄한 미소를 띤 채 반지를 끼는 더스틴의 모습이 투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