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탕 소리와 함께 눈앞의 암살자가 쓰러지자 이케르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총알을 막기 위해 마법을 쓰려고 했던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마법이 풀린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확히 암살자의 심장에 총알을 맞출 수 없었다.
이케르가 고개를 돌리자 더스틴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엘리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로 마법이 풀렸다는 것을 확인한 그의 눈빛에 안도감이 깃든 것도 잠시, 암살자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자 이케르는 곧바로 엘리시아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날카롭고 매서운 그의 칼날에 암살자는 가슴에서 피를 흩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엘리시아의 얼굴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이케르.”
검을 내린 이케르는 곧바로 몸을 돌려 그녀를 살폈다.
걱정이 가득 배인 눈빛이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몸은 괜찮은 건가?”
“예. 잠깐 팔찌에 지배당하긴 했었는데 이제는 괜찮습니다.”
엘리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케르는 손을 뻗어 팔찌가 채워진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팔찌를 살핀 그의 금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팔찌에서 더 이상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군. 마법을 모르는 그대가 풀었을 리는 없고. 어떻게 된 거지?”
“그게 사실은…….”
엘리시아는 약혼식 전날 밤, 테스란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원하시는 대로 빠르게 모셔다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다만 그 전에.”
“예?”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싶어 눈을 깜빡이는 엘리시아에게 테스란은 두 눈을 곱게 휘어 보였다. 알 수 없는 미소도 함께였다.
“잠깐 제게 시간을 내주셔야겠습니다.”
“시간이요?”
“그렇습니다. 손을 내밀어 보시겠습니까? 손목이 보이게 말입니다.”
“……?”
마법진으로 이동하는데 손이 왜 필요한가 싶으면서도 그녀는 시키는 대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테스란은 그녀의 왼쪽 손을 눈짓했다.
“그쪽 손도 같이 내밀어 주십시오.”
“어, 예.”
엘리시아가 손목이 보이도록 두 손을 다 내밀자 테스란은 자신의 두 손을 뻗어 엘리시아의 손목 위에 가져다 대었다.
‘뭐 하는 거지?’
의아해하던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양쪽 손목에 무엇인가를 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서였다.
급히 손을 거두어들여 손목을 살핀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의 양 손목에 빛으로 새긴 듯한 마법진이 깜빡거리며 빛나다가 흡수되듯 스르륵 사라졌다.
“이건 뭔가요?”
당황한 엘리시아가 손목을 매만지며 묻자 테스란은 주홍빛 두 눈을 곱게 휘었다.
“후작님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 선물입니다. 여기 오기 전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해버려서 말입니다.”
“예?”
“마도구 중에 구속팔찌라는 것이 있습니다. 반지와 한 쌍으로 이루어지는데 반지를 끼고서 상대의 손목에 팔찌를 채우면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의 몸을 조종할 수 있게 됩니다. 주로 광인이나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들에게 사용됩니다만 가끔 나쁜 용도로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있어 일련번호와 위치추적마법을 새겨 제가 직접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중 하나의 위치가 바뀌었더군요. 이상하다 싶어 조사를 해보니 라세트 공작가로 움직였다가 황궁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마도 브로커를 통해 돈을 받고 빌려준 것이겠지요.”
테스란의 말에 엘리시아는 놀란 표정을 떠올렸다.
라세트 공작가를 통해 황궁으로 들어갔다면 누구의 손에 그 마도구가 있을지는 뻔했다.
‘분명 더스틴이야. 설마 그 구속팔찌를 쓰려는 대상이 나?’
그녀의 생각이 눈빛에서 드러난 것일까, 테스란이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짐작하신 모양이군요. 그래서 구속팔찌의 마력을 무효화 할 수 있는 마법을 새겨드렸습니다. 물론 마법이 무효화되기 전까지 잠시 동안은 마법에 휘둘릴 수 있겠지만 금방 풀어질 겁니다.”
“제게 마법을 걸어주시는 것보다, 그 마도구들을 회수하는 게 더 빠르지 않나요?”
왜 이렇게 귀찮은 방법을 쓰나 싶어 엘리시아가 묻자 테스란은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럼 재미가 없으니까요. 들어보니 라세트 공작도 2황자도 후작님을 꽤나 괴롭힌 것 같던데 먼저 뺏는 것보다 줬다가 뺏는 것이 더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그녀의 입가에도 똑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네요. 그게 훨씬 통쾌하겠네요.”
“제가 악당들을 무척이나 싫어해서 말입니다. 자, 그럼 이제 가 볼까요?”
에스코트하듯 테스란이 손을 내밀자 엘리시아는 그 손을 잡았다. 이케르에게 데려다줄 그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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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레커드 마법사님의 말에 동의했었습니다. 줬다가 뺏는 게 더 통쾌할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제 몸이 멋대로 당신에게 총을 겨누는 순간 정말 아찔했습니다. 정말 쏘면 어쩌나 하고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그 기분은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던 엘리시아는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오자 고개를 들었다.
안도감이 짙게 밴 따스한 눈빛으로 이케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 그대가 상대였다면 꽤나 고전했을 거야. 다치지 않게 팔찌를 끊어내야 했을 테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레커드 마법사님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런데 이 미친놈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케르를 향해 총을 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엘리시아는 더스틴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 대라도 치지 않으면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단상 앞에 서 있는 더스틴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라세트 공작, 그리고 황비와 함께였다.
그들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는 황제와 라시안, 그리고 황후가 황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었다.
“저기 있네요. 빨리 잡으러…… 어?”
이케르의 손을 잡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던 엘리시아는 두 눈을 깜빡였다.
라세트 공작 일행의 발아래로 마법진이 생겨나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서 그들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게 대체……?”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예배당이 흔들거리자 놀라 이케르에게 달라붙었다.
“이케르, 폭탄입니다! 빨리 피해야……!”
다급하게 외치는 그녀를 이케르의 단단한 팔이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동시에 웃음기 어린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괜찮아, 엘리. 걱정할 것 없어. 테스에게 부탁해서 작은 장난을 하나 쳤을 뿐이니까.”
“……장난이요?”
“그래. 직접 봐봐.”
엘리시아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의 말대로 예배당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등 뒤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놀랐다.
“짐도 궁금하군.”
“폐하.”
당황한 엘리시아는 재빨리 이케르에게서 떨어졌다.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은 황제는 이케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라세트 공작과 더스틴이 사라졌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자네는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이케르의 대답에 황제는 허허 웃으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럴 줄 알았네. 그렇지 않고서야 자네가 이렇게 여유를 부릴 리가 없겠지. 그런데 조금 전 그 굉음과 진동은 뭔가?”
“제가 준비한 마법입니다.”
그의 대답에 황제뿐 아니라 옆에서 듣고 있던 엘리시아와 라시안의 얼굴에도 놀란 빛이 어렸다.
“어째서 그런 걸?”
황제가 묻자 이케르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답지 않게 짓궂음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 ⚜ ⚜
밀실의 흔들림이 멈추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라세트 공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로 터진 건가?”
더스틴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도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예배당을 한 번에 날려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양이 터졌으니 황제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겠지요.”
“그럼 엘리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더스틴을 지켜보고 있던 황비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언제까지 그 계집 얘기만 할 겁니까! 그 계집도 죽었다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황자는 정신을 차리고 황제가 될 준비를 하세요!”
“어머니!”
분개한 더스틴이 발끈하자 라세트 공작이 황비를 거들고 나섰다.
“황비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황제와 3황자가 사라진 이상 전하께서 유일한 황족이십니다. 그러니 차기 황제로서의 위엄을 보이십시오.”
“하지만……!”
“후작은 죽었습니다. 마도구의 마법이 왜 풀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후작의 운명도 거기까지라는 소리겠지요. 그러니 마음을 다잡으십시오, 전하.”
“…….”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무는 더스틴을 흘깃 쳐다본 라세트 공작은 밖으로 신경을 돌렸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이제 나가도 될 것 같군.’
폭탄이 터질 때 그들이 있는 방의 입구가 무너져서 나가는 길이 막히지 않도록 해두기는 했지만 정말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가봐야 알 일이었다.
라세트 공작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문을 열라고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들은 재빨리 철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다행히 문이 매끄럽게 열리며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자 라세트 공작은 안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제 세상이 바뀔 것이다. 황위도 제국도 모두 내 손안에 들어올 테니까.’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는 것에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라세트 공작은 밖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씻은 듯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아닌 날이 바짝 선 기사들의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