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그러니까, 대신관과 거래를 하셨다고요? 아니 어떻게…… 대신관은 라세트 공작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엘리시아는 놀란 표정으로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대신관을 쳐다보았다.
그녀와 이케르는 황실 기사들과 함께 밀실 문 앞에서 라세트 공작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신관이 라세트 공작의 기부금을 받았던 건 신전을 운영하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신전이 무너지면 기부금이 소용없게 되지. 예배당 지하에 숨겨둔 폭탄에 대해 알려주니 마음을 바꾸더군.”
“그래서 어젯밤 제가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신기해했을 때 미리 합의를 봐놨다고 걱정하지 말라 하신 겁니까? 이제 당신이 기부자니까요?”
“맞아. 신관들을 다 물려 달라 부탁했지.”
이케르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녀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쩐지… 제가 약혼 서약을 거부할 때 대신관의 얼굴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대신관은 약혼이 무산될 걸 알고 있었던 거군요.”
“문제가 생기면 시간을 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래야 그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지 않겠나.”
담담한 목소리인데도 왜 이렇게 감미롭게 들리는 건지.
아무래도 이 남자는 자신을 녹여버리려고 작정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라세트 공작이 폭탄을 쓸 거라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자라면 모든 일이 뒤틀렸을 때를 대비해 최후의 방안을 준비할 거라 생각했지. 주요 인물들을 한 번에 보내기에는 폭탄만 한 것이 없고.”
“가짜 폭발은요? 전 정말 진짜로 터진 줄 알았습니다.”
“테스에게 부탁해 마도구에 걸려 있는 마법을 바꿔치기하게 했을 뿐이야. 그 마도구를 만든 자가 운 좋게도 마탑 출신이라. 폭탄 쪽만 건드리고 일회용 이동마법은 내버려 두었지.”
이케르의 말을 듣고 있던 엘리시아의 머릿속에 약혼식 전날 밤 테스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테스란이 그녀를 데리고 나타났던, 지금은 라세트 공작 일행이 들어가 있던 그 방에 대한 것이었다.
[이케르의 말대로 재미있는 방이었습니다. 제법 잘 만든 일회용 마법진도 하나 새겨져 있고.]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그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테스란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밀실에 대한 것도 폭탄에 대한 것도.
“그럼 그 폭탄들은 실제로 이곳 아래에 있는 겁니까? 위험하지 않나요?”
엘리시아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아래에 폭탄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해체 작업을 해두었으니 걱정할 것 없어.”
“정말요? 대체 언제 다녀오신 겁니까?”
“식이 시작되기 전에 잠깐. 녹턴과 함께 다녀왔지.”
진짜 뭐 이런 사람이 있지?
엘리시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라세트 공작의 모든 움직임을 미리 다 꿰뚫어 보고 막을 방법까지 모두 준비해 놓은 것이 아닌가.
“당신이 제 적이 아니라 정말 다행입니다.”
안도감이 깃든 그녀의 말에 이케르의 깊고 수려한 눈꼬리가 부드럽게 접혔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말하지 않았나. 내 심장은 이미 그대의 것이라고.”
아니 그런 말을 이런 데서 막 던지시면…….
당황해 귀 끝을 붉히던 엘리시아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다녀왔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황제 부부를 배웅하러 갔던 라시안이 엘리시아의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조금 전 이케르의 말을 들었나 싶어 그녀는 재빨리 황자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별다른 표정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케르의 말은 듣지 못한 눈치였다. 안도한 그녀는 라시안에게 물었다.
“두 분 모두 환궁하신 겁니까?”
“예. 아바마마께서는 라세트 공작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셨습니다. 저보고 대신 잘 보고 와서 말해 달라 하시더군요.”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폐하께서 정말 애처가이신 것 같습니다. 황후마마가 피곤하다고 하시니 바로 돌아가신 걸 보면요.”
“제가 보기엔 스승님께서 더 애처가가 되실 것 같습니다만.”
“예?”
엘리시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시안은 이케르가 듣지 못하게 입을 가리고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바마마께서는 다른 사람들 있는 데서 어마마마께 그런 낯 뜨거운 멘트를 하신 적은 없거든요.”
“…….”
라시안의 말에 엘리시아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당혹해하는 그녀를 구해준 것은 철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엘리시아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라시안 역시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케르의 나직한 속삭임이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께서 나오시는군.”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라세트 공작이 호위기사들을 데리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황비와 더스틴은 아직까지 밀실 안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라세트 공작은 마치 세상이 자신의 것이라도 된 것처럼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기사들의 검을 보는 순간 그 미소는 씻은 듯 사라지고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항상 침착하고 느긋하던 라세트 공작답지 않게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동공이,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역력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사이 황실 기사들과 수사국 직원들은 라세트 공작 일행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재빨리 둘러쌌다.
당황한 호위기사들이 급히 검을 들어 올리자 이케르는 들고 있던 검을 가볍게 휘둘러 라세트 공작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가능성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형형하게 빛나는 금안과 마주한 라세트 공작은 이를 악문 채 호위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은 호위기사들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황실 기사들이 그들의 무기를 수거하자 이케르 역시 검을 거두었다.
“……터지지 않았던 건가?”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이 사라지자 라세트 공작은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되어 있어서인지 지독할 정도로 낮고 억눌린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담담한 이케르의 대답에 라세트 공작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다.
“자네는 알고 있었군. 내가 폭탄을 설치했다는 걸.”
“몰랐다면 막지 못했겠지요.”
“어떻게 안 건가? 뒤를 밟힐 정도로 내 수하들이 허술하지 않았을 텐데.”
“뒤를 밟아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만.”
이케르의 대답을 들은 라세트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입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기술자들을 감시했던 건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라세트 공작은 눈앞에 서 있는 젊은 공작의 눈빛에서 그것이 정답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그 소리와 흔들림도 자네가 꾸민 것이겠군. 마법이었나?”
“그렇습니다. 이렇게 나오신 걸 보면 제법 그럴듯했던 모양입니다.”
“허!”
라세트 공작은 헛웃음을 웃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의 손바닥에서 완전히 놀아났다는 것이 그를 기막히게 했다.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던 라시안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라세트 공작, 당신을 역모죄로 체포합니다. 체포하라.”
황자의 명령에 황실 기사들이 달려들어 라세트 공작과 호위기사들을 포박했다.
몇몇 황실 기사들은 더스틴과 황비를 체포하기 위해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라세트 공작이 묶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시아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부름에 흠칫 놀랐다.
“엘리.”
“하르?”
고개를 돌리자 하르와 조셉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 다 전투를 하다 왔는지 여기저기 피가 튀어 있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인 하르는 엘리시아의 옆에 서 있는 이케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1조직장과 수하 셋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르의 말을 들을 이케르의 잘생긴 미간이 살짝 접혔다.
“조금 전 전투에서도 보지 못했나?”
“보지 못했습니다. 기감을 펼쳐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가. 나도 한번 확인해 보지.”
이케르는 곧바로 기감을 펼쳐 예배당뿐 아니라 신전 주변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의 기감에도 암살자들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을 떠났거나 숨은 모양이군.”
“도망치지는 않았을 겁니다. 라세트 공작의 말이라면 목숨도 내놓을 놈들이니까요. 분명 이 근처에 숨어 라세트 공작을 구해낼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겁니다.”
조셉은 이를 바득 갈았다. 형과 부하들의 복수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보이지 않으니 약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진정하라는 듯 조셉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하르는 이케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1조직장과 그 아래 세 명의 수하들은 암살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들입니다. 마음먹고 은신에 들어가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움직이게 해야겠군,”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하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케르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밧줄에 두 손이 묶인 라세트 공작이 있었다.
“마침 쓸 만한 미끼가 있으니 빌려주지. 자네들이 원하는 걸 낚을 수 있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