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금비 (4)
환신은 구결을 마저 읽었다.
개금비 만자구결은 마치 우주 그 자체가 담긴 것처럼 심오하기 짝이 없었다.
홀린 듯 마지막 구결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천재적인 지능은 구결 한 번 읽은 걸로 처음부터 끝까지 거꾸로 외울 수 있을 만큼 완벽히 외워버렸다.
나무판에 있는 건 구결이 다가 아니다.
무명인은 인연자가 홀로 개금비를 익히는데 지장 없도록 하나하나 세심하게 주석까지 달아 놓았다.
그럼에도 만자구결은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평범한 재능을 지닌 자라면 백년을 용맹정진해도 1할도 채 익히지 못하겠지.
아니, 이해나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지도해줄 스승의 부재가 가혹하게 다가올 게 분명했다.
허나.
환신은 달랐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갈 때마다 기린지재와 태음칠절맥이 융합된 규격외의 천재성이 극도로 자극 받아 점차 고양됐다.
시시각각 깨달음이 밀려들어온다.
환신은, 아니 환신의 재능은 개금비를 완벽히 이해했다.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제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음을 말이다.
무명인은 구결을 완벽히 외우고 만자구결이 담긴 나무판을 모조리 태워 버리라 당부했다.
또 개금비를 연공 할 때 자신이 석실에 남긴 흔적을 참고하고 무림에 출도하기 전 모두 제거하라고 덧붙였다.
옳은 말이다.
절세무공은 비인부전이 기본원칙이었으니까.
누구도 신공의 비밀을 알아 선 안 된다.
비전을 탐하는 자, 살인멸구 당해도 무정하다 욕하지 못하지.
환신은 무명인이 나무판에 새긴 대로 그가 빛이 되어 사라진 자리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반구형 석실이 한 눈에 보이는 자리다.
자리에 앉아 개금비 전용 내가기공 구결을 암송하며 진기를 움직였다.
그 상태로 석실에 새겨진 개금비 흔적을 눈으로 쫓았다.
‘······보인다.’
그 순간.
환신은 놀라운 경험을 했다.
개금비 흔적 하나하나가 마치 야광도료를 바른 것처럼 희미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전용 내가기공을 운용해야만 보이는 빛이었다.
무명인의 잔류 공력이겠지.
절대고수의 가공할 내공이 영력으로 승화해 수백 년이 지난 이 순간까지 선명히 남아 있었다.
빛은 마치 천체의 운행처럼 무한한 점과 선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
“아······.”
무의 천재에게 그 광경은 미의 극치였다.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존재할 수 있을까.
환신은 다섯 개의 투사체를 동시에 사출해 개금비 초식에 따라 천변만화시키면 저런 흔적을 남길 수 있음을 깨달았다.
허나······ 쉽지 않다.
검강에 이은 이기어검.
나아가 심검의 경지에 이르러야 도달할 수 있는 절세무공의 도도한 흐름.
추구해야 할 이상향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만으로도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이득이다.
그래서 기연(奇緣)인 것이다.
문득 나무판에 담긴 주석을 떠올렸다.
인간은 신체적으로 보다 강인한 야생 동물, 혹은 강대한 영력을 지닌 영물, 요괴 등에 비해 철저한 약자에 불과했다.
허나 돌팔매질을 시작으로 창, 활 등을 통해 ‘거리’를 지배하게 됨으로서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음을 설파한다.
아득한 고대부터 수렵을 통해 생존해 온 무명인의 선조는 무언가를 던지는 행위야 말로 무의 처음과 끝임을 확신했다.
무명인의 조부인 규염객 연개금 역시 이에 동의하고 선조의 철학이 담긴 가전무공을 초식 하나하나 쪼개고 쪼갠 후 재조합하여 극한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다섯 자루 비도를 하늘로 던져 공간 그 자체를 지배하는 심검의 묘리를 통달해 당대 무공 천하제일의 영애를 누렸다.
여담으로 나무판에는 무명인의 조부 자랑이 쓰여 있었다.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조부 연개금이 선봉에 서서 찬란한 광채를 뿌리며 질주할 때면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고 한다.
또 개금비를 운용하는 내력은 태양의 기운인 일양지기(日陽之氣)기 때문에 절대적인 파마의 효용을 지닌다.
마공을 익힌 마도고수는 개금비의 공능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환신은 홀린 듯 손을 들었다.
다섯 손가락이 마치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점점 빨라지는 손가락.
그 움직임이 석실 벽에 새겨진 개금비 흔적과 묘하게 일치했다.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졌다.
기린지재가 환신을 무의 저편, 황홀경으로 이끌었다.
헌데 바로 그때.
“끄아아악!”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찾아오는 태음칠절맥 발작!
무아지경이 깨지고 바닥을 뒹굴 던 환신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틀었다.
삼재기공을 운용해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려는 것이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삼재기공 대신 개금비 전용 내가기공인 광자대력기(光子大力氣)를 운용하면 어떨까?
광자대력기는 무명인의 고향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 까마귀를 내가기공으로 승화시킨 것인데 양강 계열 내가기공의 최고봉이라 칭할 만 했다.
광자대력기의 일양지기라면 태음지기를 제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 광자대력기를 운용했다.
곧 환신은 경악했다.
삼재기공과는 차원이 다른, 100배를 훌쩍 넘는 광대한 기가 사방에서 몰려든다.
이를 운기조식을 통해 정제하면 본신공력으로 단전에 축적된다.
헌데······ 쉽지 않았다.
아니, 어렵다.
칠대혈에 웅크린 태음지기를 통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기린지재 덕분에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기감을 지닌 환신이다.
순전히 자신의 천재성으로 어찌어찌 통과 시킨 거지 평범한 재능을 지닌 자라면 막대한 일양지기 흐름이 태음지기에 막혀 혈관이 터지고 칠공으로 피를 토하며 죽었을 것이다.
태음지기를 통과해도 문제다.
칠대혈을 지나갈 때마다 태음지기에 의해 일양지기가 한순간 식어 버렸다.
혈맥을 타고 흐르는 와중 다시 열기를 북돋았지만 태음지기 벽을 통과한 순간 또 다시 식었다.
그렇게 칠대혈을 모두 통과하고 진기를 일주천 해 단전에 안착시키자 기묘한 상황에 직면했다.
극양극음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순수한 생명의 기운.
선천지기(先天之氣)였다.
일반적인 공력과 비교도 안 되는 신묘한 공능을 지닌 선천지기를 운기조식으로 얻을 수 있다니!
99회차 플레이동안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실로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환신 입장에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끄아아아아악!’
운기조식 할 때 입을 벌릴 수 없으니 내적비명으로 대신할 수밖에.
일양지기가 태음지기 벽을 통과할 때마다 지금까지 겪은 발작 따윈 애들 장난으로 느껴질 만큼 미친 수준의 고통이 들이 닥쳐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양지기가 혈맥을 따라 운용돼서 그런지 혈관에 실톱을 넣고 갈아대는 통증은 없었다.
문제는 일양지기가 칠대혈을 통과할 때 느끼는 고통이 본래 느꼈을 고통까지 적립해서 한 번에 쏟아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따로 없다.
선택해야 했다.
이 고통을 이겨내고 선천지기를 얻을 것인지.
아니면 포기하고 삼재기공을 운용할 것인지.
허나 얻어지는 결과는 천지차이.
그만큼 선천지기는 일반적인 진기와 비교불가의 공능을 품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하루에 일곱 번이나 겪는 고통······ 좀 더 아픈 게 뭐 어때서!’
이왕 아픈 거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뭐 하나 더 건져야지!
환신의 선택은 역시나 선천지기였다.
‘시바아아아아아알!’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절맥 발작 고통을 이 악 물고 견뎌냈다.
하루에 일곱 번 이 고통을 견딜 생각을 하니 확 죽어버리고 싶었지만 타고난 더러운 성질 덕분에 다시 한 번 이를 극복해냈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발작이 멈췄다.
단전에 일양지기가 축적되기 시작한다.
선천지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가공하기 짝이 없는 힘이다.
“끄아아악! 컥컥! 우웩!”
참지 못하고 운기조식을 멈춘 채 바닥을 뒹굴며 위액을 토해냈다.
한껏 웅크린 채 온 몸을 덜덜 떨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에 묻은 침을 손으로 닦아내며 씁쓸히 고개를 떨궜다.
광자대력기로도 태음칠절맥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절맥은······ 어떤 식으로든 고통의 총량을 완벽히 유지시킨다.
“······이런 제길. 고통 불변의 법칙이냐?”
별 수 없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양대신의를 찾을 수밖에.
“양대신의한테 치료 받으려면 역시 개금비를 익혀야겠지?”
결국 무공이다.
오직 무공만이 스스로를 구원 하리라.
그렇게 개금비 연공이 시작됐다.
***
시간이 흘렀다.
환신은 석실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운기조식을 하는 게 아니다.
한 조각 깨달음을 붙잡고 깊은 돈오의 시간을 맞이한 것이다.
순간.
눈을 떴다.
-번쩍!
어찌나 공력이 깊어졌는지 안구 깊숙한 곳에서 눈동자를 타고 기광이 흘러나왔다.
가부좌를 튼 상태 그대로 육체가 둥실 떠오른다.
허공에서 몸을 쫙 펴고 공력을 북돋아 어기충소의 신법으로 육신을 허공에 띄웠다.
환신의 양발에 마차 바퀴를 연상시키는 자그마한 불꽃의 륜(輪)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금비 상의 보신경 태양속(太陽速)을 펼칠 때 일어나는 기현상이다.
환신의 육체가 쏜살 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순식간에 석실 벽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허나 당황하지 않았다.
-콰르르르릉!
불꽃의 륜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회전하며 환신의 몸이 거의 직각으로 움직인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기동이었다.
-통. 통.
석실 벽을 따라 2, 3장씩 내달릴 때마다 엄지발가락으로 겨우 한 걸음 석벽을 밟을 뿐이다.
그 와중에도 신체의 균형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기만 했다.
실로 가공한 신법이었다.
본능적으로 개금비 상의 감각도(感覺道) 태양신경총(太陽神經叢)을 전개했다.
-파지직! 파직!
온 몸의 감각이 열리고 일양지기로 이루어진 미세한 신경 다발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일정 공간이 안구를 넘어 신경 말단까지 입체적으로 환신의 감각 아래 들어온다.
이 공간은 이제 온전히 환신의 것이다.
신기하기 짝이 없는 감각.
그 와중에도 벽과 천장을 밟아 가며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때 환신이 번개처럼 손을 휘둘렀다.
-스팟!
품에서 꺼내 전면으로 발출하는데 까지 찰나의 시간조차 필요치 않았다.
이 즉발식(卽發式)이야 말로 개금비의 총화.
언제 어느 때 건 병기를 사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그게 바로 개금비였다.
황금빛 광자대력기를 머금은 돌이 허공을 가른다.
동시에 환신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돌멩이가 한순간 선회했다.
비파를 타듯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자 궤도가 지그재그 형태로 연속해서 틀어졌다.
-스파팟!
감각도인 태양신경총으로 찰나지간 적을 찾아내 태양의 힘인 일양지기를 담은 돌멩이를 일반 무학의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속도로 던져 격살시킨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고대무학의 결정체다.
돌멩이의 움직임이 일견 이기어검을 연상시켰으나 그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개금비란 무공의 특성일 뿐.
-파짓!
돌멩이에 담긴 일양지기가 점차 압축된다.
환신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올라왔다.
이번 한 수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일양지기가 압축되는 모양새가 마치 도검장이 망치로 모루 위의 무쇠를 두드리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압축이 절정으로 치닫자 날카롭게 뻗어 삐쭉한 형태를 취했다.
검기였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불완전한 형태.
그럼에도 검기는 검기였다.
“흐아아앗!”
-쿠르르르릉!
12성 극성으로 공력을 전개해 허공을 미친 듯이 가로지르자 황금빛 막이 생성됐다.
물샐 틈 없는 하늘의 그물.
과거 철심수사의 금접선법을 연상시키는 광경.
이번엔 검막이다.
허나 여기까지다.
모든 공력을 소진하자 돌멩이가 힘을 잃고 석실 바닥에 떨어졌다.
환신 역시 바닥에 착지했다.
“허억! 허어억! 크으!”
숨을 헐떡이며 방금 전 펼친 개금비의 여운을 한껏 음미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일류의 극에 이르러 절정의 벽을 마주했음을.
중간중간 진기 흐름이 끊길 정도로 공력을 극성으로 전개해 억지로 뽑아낸 검기와 검막이 이를 증명한다.
“······이 정도면 철심수사와 정면으로 맞붙어도 죽진 않겠어.”
확신이 생겼다.
무림을 종횡할 준비가 끝났다는 확신 말이다.
환신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중원으로.”
역대급 무공천재의 눈이 무림을 정조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