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에 미친 새끼 (4)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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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 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암자.
오랫동안 방치돼 폐허가 된 암자로 들어가면 과거 수많은 향화객의 소망을 들어주던 불상 하나가 단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걸 볼 수 있었다.
헌데 이상했다.
족히 수백 년은 방치됐을 법한 암자에 인기척이 느껴지니 말이다.
불상 뒤쪽 공간의 육중한 석재 바닥이 열려 있었다.
단상의 한 부분을 누르면 기관이 작동해 뚜껑이 열리는 구조다.
지하로 내려가 통로를 지나자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부는 촛불이라도 켠 듯 은은한 빛으로 가득했다.
석실 한가운데 까마귀 깃털이 잔뜩 박힌 전포를 걸친 인물이 서 있다.
환신이다.
그의 전신에서 웅웅거리며 금광이 파도치듯 일렁이고 있었다.
광자대력기를 운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금광에 의지한 채 환신이 보고 있는 건 지하 석실 벽에 걸려 있는 한 장의 불화(佛?)였다.
여덟 명의 부처가 수많은 점과 선으로 연결된 천체의 운행을 배경으로 참선에 열중하고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환신은 눈을 부릅뜬 채 불화를 응시했다.
그런 환신의 손이 기이하게 움직였다.
이름 없는 무인도에서처럼 무공 초수를 연구하는 움직임이 아니다.
마치 퍼즐을 맞추는 듯한 손동작이었다.
‘제천에서 기연 얻는 방법 중에 퍼즐 푸는 게 제법 있어서 현실에선 어떻게 구현 했을까 궁금했는데 이런 느낌이네.’
단순히 퍼즐을 맞추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 와중에 한 가닥 깨달음의 조각을 낚아 채 숨겨진 초식을 찾아내는 것.
개금비 기연과 비교 했을 때 전혀 다른 차원의 불친절함이었다.
평범한 오성과 재능을 지닌 자라면 몇 년을 고련해도 불화에 숨겨진 무공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겠지.
머릿속에 삼차원 공간을 구축하고 그 안에 209층짜리 부르즈 할리파를 나사하나까지 건설하는 수준의 난해함이었다.
어려운 게 당연했다.
물론 환신에겐 해당사항 없는 일이다.
기린지재의 천재성과 태음칠절맥의 지능이 결합되자 1시간도 채 안 돼 불화속에 숨겨진 여덟 개의 무공 초식과 투로를 발굴해낼 수 있었다.
눈을 뜬 환신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부처의 위대한 법열이 담긴 불세출의 도법, 천애무아도(天涯無我刀). 겟!”
‘제천’ 세계관에 존재하는 수많은 도법 중에서도 손에 꼽힐 가공할 도법이다.
환신은 손바닥을 곧게 펴 수도를 만들어 천천히 천애무아도를 전개했다.
불법의 현현인 천애무아도지만 자애로운 부처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구니에 대한 부처의 가혹한 철퇴를 상징했다.
진기를 거의 주입하지 않았음에도 천애무아도의 장중하면서도 오묘한 초식이 투로에 그대로 묻어났다.
1초부터 8초까지 천애무아도의 초식을 전개했다.
천애무아도를 훌쩍 뛰어넘는 최고 수준의 무학인 개금비를 익힌 환신으로서도 천애무아도의 파괴력과 무궁무진한 조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놈들은 도초를 뿌리면 정신 못 차리고 죽어 나자빠지겠는데?”
또 천애무아도는 내가기공의 성질을 타지 않는다.
그저 순응할 뿐.
한 가지 더.
천애무아도의 진정한 힘은 바로 연환식에 있었다.
초식이 중첩될수록 위력이 곱절로 늘어나는 것이다.
“······어라? 1성 돌파해버렸네?”
누가 천재 아니랄까봐 초식 몇 번 펼친 걸로 벌써 천애무아도 입문에 성공해 버렸다.
“근데 역시 절세 도법이라 난해해. 이 이상 경지를 높이려면 연습 좀 해야겠어.”
아무리 환신이라도 초상승무공을 대성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
‘시간’만 있으면 어떤 무공이든 대성할 수 있다.
그게 바로 기린지재였다.
물론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다.
환신은 이를 바득 갈았다.
“이놈의 태음칠절맥만 아니었으면 이런 개고생 따위 안 했을 텐데.”
환신에게 무공을 펼치는 건 일종의 곡예다.
전신 칠대혈을 굳건히 막고 있는 태음지기 벽 안의 좁디 좁은 계곡을 마치 곡예비행 하듯 통과해야 한다.
기린지재만의 ‘기 민감성’이 아니었으면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을, 묘기 그 자체였다.
덕분에 환신은 전체 내공 출력의 2할도 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대충 이 정돈가.”
석실 바닥에 철퍼덕 누워 생각에 잠겼다.
“일단 필요한 기연은 대부분 확보했어.”
광동성 전체를 쭉 훑으며 상승절학이라 불릴 만한 기연을 모두 수습했다.
최소가 상승절학이다.
개중엔 초상승무공도 있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공력을 보충하기 위해 영물과 영단 기연도 휩쓸었다.
자잘한 건 거르고 굵직한 거 위주로.
그 과정에서 기연의 수호자들을 상대로 목숨을 건 사투를 펼치거나 기관진식을 돌파해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있는 공략법과 개금비의 막강한 위력으로 무난히 승리하고기연을 쟁취할 수 있었다.
오히려 천애무아도처럼 퍼즐 푸는 기연이 더 어려울 지경이다.
물론 아직 극초반이라 그럴 뿐.
시간이 지나면 기연을 놓고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을 벌이는 경우가 잦아 획득이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꿀 빨 수 있을 때 빨아 줘야지!”
이제 진정한 ‘제천’의 시작을 위한 사전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초반 빌드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택지가 완전히 달라지거든.”
기연도 기연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주요 캐릭터와의 ‘인연’이다.
‘제천’은 인연에서 시작해 인연으로 끝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연 시스템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떤 캐릭터와 인연을 맺고 루트를 따라가느냐에 따라 서브퀘스트는 물론이고 메인스토리까지 전혀 달라지니 당연했다.
은혜를 베풀면 양질의 퀘스트로 보답하고 원한을 맺으면 복수하기 위해 떼로 몰려오기도 하지.
수십 회차 동안 업적도 99%에 막혀 있던 환신은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걸어야 했다.
“지금까지 모은 기연을 가지고 광동삼살 영입하러 가야겠어. 추룡한테 천애무아도 주면 좋아하겠지.”
40회차 전쯤 주력으로 사용했던 도법인 만큼 얼마나 끝내주는 성능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불괴수라마공의 폭발적인 파괴력과 결합하면 그야말로 아수라의 현신급 위용을 보여줄 것이다.
“물론 그냥 갈 순 없지.”
일류의 극에 달한 경지론 부족하다.
“이 시점에 이 정도 경지는 지난 회차에도 도달했어.”
그래선 안 된다.
태음칠절맥이라는 말도 안 되는 패널티를 안고 기린지재라는 초월적인 특성을 얻었는데 고작 지난 회차와 같은 수준에 머물 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아무튼!”
좀 더 압도적인 강함을 손에 넣어야 했다.
‘그곳’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말이다.
“여기서 절정의 벽을 돌파하는 거야.”
환신은 기관장치를 조작했다.
족히 2장(6m)은 될 법한 두께의 석문이 굳게 닫혔다.
내부를 완전히 밀폐시킨 후 석실 중앙에 가부좌를 틀었다.
절정의 경지에 도전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흑영낭에서 두툼한 가죽끈을 꺼내 조용히 입에 물었다.
시간이다.
곧 전신 칠대혈에서 태음지기가 혈맥을 타고 흐르며 고통이 시작됐다.
절맥 발작과 동시에 광자대력기를 운용했다.
선천지기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고통이 더욱 커졌다.
‘아아악! 으아아아악!’
내적 비명과 함께 이빨이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가죽끈을 꽉 깨물었다.
‘······주, 죽을 거 같아.’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천지기의 묘용이 그만큼 끝내주는데.
무공을 펼칠 때 선천지기를 아주 조금 가미하는 것만으로도 위력이 천양지차다.
첨단 소재에 희토류를 가미하면 성능이 확 오르는 느낌이랄까.
지옥 같은 고통에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인간의 욕망이란 이토록 지독한 것이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절맥 발작이 그쳤다.
신경질적으로 가죽끈을 퉤 하고 뱉었다.
그리고 조용히 무릎 꿇고 앉아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시발!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 건데!”
환신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중얼거렸다.
“양대신의······. 양대신의를 잡아야 돼! 필요하면 잡아 족쳐서라도 치료를 받아야······.”
환신의 눈동자에서 섬뜩한 광채가 번뜩였다.
누가 봐도 주화입마의 징조였다.
지옥 같은 고통이 마(魔)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잠시 자학의 시간을 가진 후 흑영낭에 가죽끈을 던져 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기연을 통해 얻은 금령단이란 영약이었다.
공력 증진에 탁월한 효능을 자랑하는 상급 영단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금령단이 경지를 높일 때 큰 효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 따위 없었다.
곧장 금령단을 입에 털어 넣고 운기조식에 돌입했다.
환신이 운기 하는 건 다름 아닌 불괴수라마공.
상처 입은 기혈을 빠르게 복원시키는 재생능과 폭발적인 파괴력이면 단숨에 경지를 돌파할 수 있을 거란 계산 때문에 선택했다.
불괴수라마공을 운용하자 기괴한 장면이 펼쳐졌다.
얼굴 좌측이 붉은색, 우측이 푸른색으로 물든 것이다.
피부 아래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동시에 폭발적인 기운이 사방으로 퍼졌다.
불괴수라마공 특유 기공 수라마기(修羅魔氣)였다.
광자대력기와 전혀 성질을 지닌, 파괴의 화신 아수라의 힘을 모방한 강대한 힘이다.
거칠고 패도적인 기공인지라 운용이 극도로 까다롭지 만, 기린지재에 예외란 없었다.
성난 망아지 마냥 미친 듯이 날 뛰는 수라마기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노도와도 같은 기세로 혈맥을 타고 흐르는 수라마기.
하지만 언제나처럼 태음지기의 벽이 수라마기를 가로막았다.
여기서부턴 아무리 환신이라도 쉽지 않다.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수라마기를 살살 달래가며 태음지기의 벽을 통과시켰다.
공력을 일주천한 수라마기가 노리는 건 미간 사이의 인당혈.
절정의 벽을 넘어 검기상인에 도달하려면 진기의 유통을 뇌까지 연결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무학에서 말하는 양광이현(陽光二現)의 경지다.
그 과정에서 하단전과 미간을 잇는 기혈을 개통하기 위해 이를 막고 있는 벽을 허물어뜨려야 했다.
태음지기의 벽과 달리 충분한 힘을 가하면 뚫을 수 있었다.
환신은 수라마기를 일주천한 기세 그대로 힘을 모아 인당혈을 막고 있는 벽을 때렸다.
-쾅!
머릿속에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전신을 때렸다.
하지만······.
‘뭐야. 별로 안 아픈데?’
태음칠절맥 고통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절맥 발작이 가져다 준 예상외의 순기능이었다.
별로 달갑진 않지만.
‘······근데 왜 아프기만 하고 꿈쩍도 안 해!’
다시 수라마기를 일주천한 후 회전력을 이용해 인당혈의 벽과 충돌시켰다.
-콰쾅!
소용없었다.
몇 차례 더 시도했지만 뚫지 못했다.
‘······젠장. 칠대혈 통과하는 과정에서 속도가 너무 느려져서 충분한 회전력이 만들어지지 않아.’
이놈의 태음칠절맥은 생전 도움이 안 된다.
사사건건 방해였다.
실로 기린지재라는 괴물 같은 재능에 어울리는 사상최강의 패널티.
아주 지긋지긋했다.
악재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운기조식이 길어지자 수라마기가 태음지기와 조금씩 융합돼 점점 냉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태음칠절맥 발작이 일어날 징조였다.
‘헉, 미친? 이건 예상 못했는데!’
이대로는 절정의 경지를 돌파하는 건 고사하고 태음지기가 침투해 혈맥이 꽁꽁 얼어붙고 단전에 금이 갈 가능성이 있었다.
불괴수라마공의 가공할 재생능으로도 단전과 기혈에 손상을 입으면 하루 이틀 안에 회복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인 환신이다.
그런 손해를 감수할 수 없었다.
하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
‘어쩌지. 절정지경 도전 포기해?’
바로 그 순간.
기린안이 발동했다.
일류고수의 경지에 오르자 기린안은 한 단계 진화했다.
단순히 기와 영력의 흐름을 볼 수 있던 것에서 벗어나 신체내부 오장육부는 물론이고 혈맥까지 손금 보듯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니, 보는 게 아니다.
뇌에 그려지는 것이다.
환신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일렁였다.
기린지재의 천재성은 기린안으로 얻은 정보를 계산해 인당혈의 벽을 돌파하기 위한 최적의 루트를 도출해냈다.
‘각이 섰는데 뭘 망설여! 질러!’
곧장 수라마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이변이 일어났다.
가부좌를 튼 환신의 등 뒤로 아지랑이처럼 기이한 영기가 피어오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팔처럼 보이는 네 개의 영기 덩어리.
좌우 붉고 푸른 무시무시한 얼굴에 여섯 개의 팔을 지닌 아수라의 현현!
‘여기닷!’
-쾅쾅쾅!
수라마기가 기혈을 질주해 인당혈의 벽을 연속으로 세 번 두드리자 기어코 뚫렸다.
-화아아악!
양미간 사이로 번갯불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금광, 적광, 청광이 연속으로 교차한다.
환신이 눈을 떴다.
-번쩍!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기광에 어두운 석실이 일순 대낮처럼 밝아졌다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후우우······.”
환신은 깊은 한숨을 토했다.
잠시 운기요상을 통해 기혈을 다스렸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흑영낭에서 화살촉을 하나 꺼냈다.
화살촉에서 폭발적인 금광과 함께 무지막지한 열기가 뿜어지더니 황금색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절정고수의 상징.
검기였다.
그것도 광자대력기로 구현한 광자검기(光子劍氣).
“오오오! 젠장! 멋져! 그럼 이것도 되려나?”
화살촉을 하나 더 꺼냈다.
거기서도 광자검기가 피어올랐다.
일류고수일 때 하나밖에 다를 수 없었던 투사체가 절정의 경지에 이르자 두개로 늘어났다.
광자검기를 머금은 화살촉이 파르르 떨더니 ‘키이융-’하는 기음과 함께 석실 내부를 미친 듯이 쏘아지며 금빛 궤적을 낳는다.
직각 운동은 물론이고 수십 차례 기이한 각도로 뻗어나가는 화살촉의 움직임에 석실 벽이 녹으며 기하학적인 흔적을 남겼다.
이윽고 화살촉은 환신의 미간 앞에 우뚝 멈춰 섰다.
화살촉을 잡아채 흑영낭 안으로 갈무리한 환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신이 생겼다.
광동삼살을 영입할 자신이 말이다.
“돌아가자.”
모든 것이 시작된 곳.
광주 성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