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의뢰 (4)
“오오! 환신! 우리 대형 고객께서 오셨구만! 다행일세, 다행이야. 꼼짝 없이 죽거나 잡혀가는 줄 알았어.”
“제가 있는 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태음칠절맥을 치료해줄 때까진 말이죠.’
환신의 외침에 동방척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허허. 그거 참 다행이구먼.”
“그런 의미에서 치료비 좀 깎아주시죠.”
동방척의 표정이 바로 구겨졌다.
“뭣이?!”
“저 낭인이에요. 낭인 아시죠? 절대 공짜로 일해주지 않는 거.”
무림에서 낭인 돈 밝히는 거 모르는 사람 없다.
이쪽 방면에서 거성으로 군림하는 동방척은 더더욱 모를 리 없지.
환신의 요구는 타당했다.
“······끄응. 알겠네. 노부는 계산이 아주 확실한 사람이야. 치료비 중에서 은원보 10개를 탕감해주지.”
“100개.”
“······욕심 부리지 말게. 20개로 해주지.”
“100개.”
“어허! 젊은 사람이 욕심이 이리도 많아서야! 50개로 하세!”
“100개.”
“······어디 가서 자랑해도 좋네. 이 동방척의 주머니에서 은원보 70개를 털어간 건 아마도 자네가 처음일 게야.”
“100개!”
동방척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기어코 은원보 100개를 가져가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은원보 9,900개 가져와야 될 사람한테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요?”
“끄으으응! 좋아! 은원보 100개!”
“앗싸!”
금전 거래 하나만큼은 철저한 동방척의 약점을 노린 환신의 승리였다.
당연하게도.
‘제천’에서 동방척과 수도 없이 거래해 본 환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은원보 100개면 흑점에서 일류무공을 살 수 있는 금액이라고! 팔아도 그거 반은 나오고. 절대 포기 못해!’
환신은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나 동방 의원님이 강호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적정 몸값을 제시한 거라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동방 의원님 체면 생각해서 1,000개 쯤 제시할 걸 그랬어요.”
“그럼 노부가 판을 깼겠지.”
“그래서 100개를 제시한 거죠.”
“······나이에 비해 아주 능숙해. 신기할 정도로 말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아니. 괜찮네. 대형 고객이 이 정도로 이문에 밝으면 치료비 못 받을 일 없을 테니. 오히려 걱정을 덜었어.”
“······.”
이겼는데 진 거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은원보 100개를 탕감 받았지만 반쯤 노예 신세인 건 변함없었다.
동방척이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부가 의뢰 하나 하지.”
“무슨 의뢰인가요?”
그의 눈동자에 한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다름 아닌 걱정이었다.
“복면인들의 습격 때문에 함께 있던 소소와 떨어졌느니라. 방금 전 우릴 공격한 복면인은 일부에 불과하다. 소소를 쫓는 자들 중엔 절정고수도 포함돼 있다. 그러니 서둘러 소소를 구해다오.”
“뭐라고요?”
“아, 한 가지 말해두는데 만약 소소가 죽으면 태음칠절맥 치료는 없느니라.”
“예?!”
깜짝 놀란 환신이 분통을 터트렸다.
“그런 게 어딨어요!”
동방척이 차가운 눈으로 환신을 보며 말했다.
“다른 남궁세가 놈들은 죽던 말든 상관없다. 노부에게 환자란 은을 가져오면 치료해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게 내버려두면 그만인 존재니까.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다.”
그의 눈에 살짝 물기가 어렸다.
“허나 소소는 다르다. 노부는 소소를 의손녀로 삼았느니라. 친인이나 다름 없다. 그러니 소소가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알겠느냐?”
동방척은 단언했다.
“소소를 멀쩡히 내 앞에 데려오지 못한다면 네 목숨 역시 장담할 수 없다.”
“으으으!”
환신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시발! 일찌감치 동방 늙은이 만난 거 까진 좋은데 이건 아니잖아! 진짜 불지 옥 난이도가 따로 없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생명줄을 틀어 쥔 동방척이 갑 중의 갑인데.
“한시가 급하다. 어찌 하겠느냐?”
선택을 강요하는 동방척.
물론.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할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무엇이냐.”
“소소 구해오면 의뢰 7개 중 두 개 해결한 걸로 쳐줘요!”
“뭣이?”
“손해 보는 장사 할 수 없잖아요! 이번 일에 제 목숨이 달렸다고요!”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자 동방척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눈앞의 잘생긴 애송이는 지 목숨 걸리면 언제든 마성을 폭발시킬 놈이었다.
“······알겠다. 받아들이마. 이 동방척을 이토록 후려친 놈은 정말로 네가 정말 처음이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환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환신은 전 세계 ‘제천’ 플레이어들이 실패했던 길을 걷게 되었다.
***
-슈슉! 슈슈슉!
십여 명의 창궁무사가 전력으로 보신경을 전개했다.
그들은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납게 으르렁 거리며 빛살처럼 달리는 은색 늑대의 갈기를 꼭 붙잡고 있는 소녀.
남궁소소였다.
그런 남궁소소와 창궁무사 뒤를 쫓는 자들이 있었다.
금색 견갑과 호심갑을 착용한 복면인 세 명이 암행복을 입은 복면인 30여명을 이끌고 마기를 풀풀 흘리며 쫓고 있던 것이다.
호위대장이 이를 갈며 외쳤다.
“공녀를 창궁각으로 모셔야 한다! 서둘러라!”
“존명!”
창궁각은 창궁병단의 주둔지로 항상 100여명의 창궁무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곳까지 가면 공녀의 안전은 보장된다.
그때였다.
견갑 복면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공력을 주입해 곧장 던졌다.
-끼아아아악!
귀청을 찢을 듯한 귀곡성에 호위대장이 이를 갈았다.
“염왕표!”
염왕성의 염왕무사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암기, 염왕표(閻王?)였다.
작은 원반에 톱니 형태의 칼날이 붙어 있는 기이한 형태의 암기인 염왕표는 내부에 구멍이 뚫려 있어 공력을 실어 발출하면 기혈을 뒤흔드는 귀곡성을 내뿜는다.
창궁무사 한 명이 귀신의 울음소리에 순간적으로 진기가 이어지지 않는지 걸음이 느려졌다.
그에게 염왕표가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스팟!
흠칫 하며 염왕표를 피하는 창궁무사.
헌데 염왕표가 스치고 지나간 상처에서 녹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급격히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독!”
일반적인 독이 아니었다.
진기 흐름을 방해하는 산공(공력을 흩어지게 하는 것)의 묘용마저 있는, 철저히 무인을 겨냥해 설계된 독이었다.
공력으로 독이 퍼지는 걸 억제할 틈도 없었다.
창궁무사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왼팔을 어깨부터 베어버렸다.
-촤악!
바닥에 떨어진 팔이 한순간 녹색 혈수가 되어 녹아내렸다.
그 광경을 본 호위대장이 이를 갈았다.
“부시독! 비열한 염왕성 놈들!”
염왕성은 쟁투강호 시대부터 남궁세가와 오랜 은원으로 묶인 관계.
당연히 서로에 대해 숙지할 만큼 숙지한 상태다.
염왕성은 마도의 하늘 마천루를 이루는 열 개의 기둥인 마도십문 중에서도 천마신교, 구천검가, 오행마궁에 이은 서열 4위의 초거대 문파.
남궁세가와 비교해도 그 세력이 꿀리지 않는다.
허나 제천맹 천하가 열리고 장장 수십 년 동안 양측은 국지전을 제외하면 대규모 분쟁을 일으킨 적이 한 차례도 없었다.
설령 크게 시비가 붙어도 제천사 차원에서 대부분 조율이 가능했으니 더욱 그랬다.
헌데 이렇게 기습해 오다니!
‘역시 마도는 상종할 종자가 못 된다!’
원한이, 증오가 가슴 깊은 곳에 인이 박혔다.
하나의 원한에 또 하나의 원한이 겹쳐지면 피로 쓰인 차용증이 된다.
원금, 아니 이자까지 받아내야 했다.
원수의 피로 말이다.
그게 복수다.
하지만 지금은 남궁소소를 살리는 게 먼저였다.
호위대장이 외쳤다.
“염왕성의 마졸들아! 어찌 제천의 하늘 아래 이런 패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이냐!”
그 말을 들은 견갑 복면인이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우린 그저 윗분들이 시키는 대로 할 뿐, 생각 따위 하지 않는다! 그간 정파의 위선자 놈들과 한솥밥 먹는 게 역겹기 짝이 없었는데 잘 되었구나! 수십년 간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렸도다!”
마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빛내며 외치는 견갑 복면인.
그는 마성을 폭발시켰다.
“고고하기 짝이 없는 검제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금지옥엽을 잃으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구나! 우리 마도인을 참살 할 때처럼 피도 눈물도 없이 굴까? 그도 아니면 저잣거리 버러지처럼 질질 짤까?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크하하핫!”
“그럼 정마대전이다!”
“마도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호위대장은 안색을 굳혔다.
협상은 없다.
그렇다면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뿐이다.
복면인들은 대열을 이뤄 염왕표를 던졌다.
후미에 있던 창궁무사들이 벼락같이 검을 뽑아 이를 튕겨냈다.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그 사이 창궁무사와 복면인들 간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꼬리가 잡혔다!
“창궁무애검진을 펼쳐라!”
“존명!”
창궁무사들이 순식간에 대형을 이뤄 검진을 형성했다.
푸르고 장중한 기운이 사위를 잠식시켰다.
동시에 창궁무애검진이 연환으로 펼쳐지며 복면인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 선봉엔 절정고수인 호위대장이 있었다.
이에 대응해 복면인들은 염왕성의 독문 진법인 환영괴로진을 펼쳤다.
-끼아아아악!
염왕표를 던졌을 때처럼 고막을 찢는 괴음과 기이한 환영이 정신을 어지럽힌다.
그 순간.
창궁무애검진과 환영괴로진이 격돌했다.
-쾅! 콰카카캉!
연속적으로 대열을 바꿔가며 서로의 병기가 부딪쳤다.
환영괴로진은 끊임없이 창궁무사의 감각을 교란시켰다.
환술이 가미된 환영괴로진의 공능이다.
정신이 혼미해진 창궁무사에게 복면인들의 병장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재빨리 주변 창궁무사들이 검초를 뿌리며 견제해 겨우 살았다.
그들이 내뿜은 경력만으로도 주변 담벼락에 금이 쩍쩍 갔다.
그만큼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반면에 창궁무애검진은 남궁세가 특유의 강검의 묘리에 따라 강력한 파괴력을 선보였다.
특히 호위대장의 활약이 대단했다.
절정고수답게 창궁무애검진의 모용을 십분 살려 기공을 공유하는 다른 창궁무사들의 공력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평소의 두 배에 달하는 검기가 뿜어지며 견갑 복면인을 맞상대했다.
-쾅! 콰카카캉! 콰쾅!
섬전 같은 보신경으로 빠르게 발을 놀려 서로의 병기를 부딪칠 때마다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허나 상대하기 쉽지 않다.
견갑 복면인 역시 같은 절정고수였기 때문이다.
그는 염왕성의 잔혼탈백도로 맞섰다.
견갑 복면인의 좌우로 복면인 두 명이 뛰쳐나와 호위대장에게 달려들었다.
쏘아지는 기파로 볼 때 일류고수가 분명했다.
초반 박빙의 승부에도 불구하고 복면인 두 명이 가세하자 점점 호위대장이 밀리기 시작했다.
호위대장뿐만이 아니다.
창궁무사 전체가 밀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쪽은 고작 십여 명.
반면에 저쪽은 서른 명이 넘는다.
3배에 달하는 수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호위대장은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하아아압!”
사방으로 검기를 난사했다.
견갑 복면인이 기막을 펼쳐 이를 막는 사이 좌우에서 복면인이 그림 같은 합공으로 호위대장에게 짓쳐 들어갔다.
호위대장은 왼손으로 남궁세가의 천풍장력을 뿌렸다.
강맹한 장력에 기함한 복면인들이 몸을 틀어 피했다.
동급 강자와 일류고수 두 명을 상대로 호위대장은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점점 한계가 다가온다.
견갑 복면인의 잔혼탈백도에서 발출되는 도기는 둘째 치고, 도기에서 뿜어지는 경력을 상쇄하는 게 점점 더 힘들어졌다.
공력의 총량에서 차이가 크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초식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
허나 강호에서 만전 상태의 전투는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창궁무사 조장의 임무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었다.
“진지룡! 왕양! 소공녀를 모셔라!”
“존명!”
그는 남궁소소의 호위대장을 역임할 정도로 창궁무사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실력자.
또한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이 시점에서 남궁소소를 탈출시킬 최적의 순간을 잡아냈다.
창궁무사 두 명이 창궁무애검진에서 빠져나왔다.
그럼에도 검진은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훈련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랑과 함께 뒤쪽으로 쏜살 같이 뛰쳐나갔다.
견갑 복면인이 소리쳤다.
“쫓아라!”
복면인 다섯 명이 환영괴로진에서 빠져 나와 설랑과 창궁무사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