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초절정의 세계
“흘흘! 좋다! 역시 시원시원하구나, 구씨 애송아!”
두 남자의 대화를 지켜보던 환신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쾌남답네.’
구자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가슴을 두드렸다.
“누가 저와 붙겠습니까! 구양 노사께서 나오시렵니까? 저는 청수…… 아니, 기 형제가 나와도 좋을 거 같군요. 그의 명옥과 저의 연옥. 누가 우위인지 한번 겨뤄보고 싶었습니다.”
“구씨 애송아. 네놈을 상대할 건 나나 기우가 아니다.”
“그럼……?”
구양숙이 고개를 돌려 환신을 보았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한쪽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끄덕인 환신이 앞으로 나와 포권했다.
“구 대협. 제가 구 대협을 상대하겠습니다.”
구자건의 얼굴이 엉망으로 찌푸렸다.
그는 구양숙을 보며 소리쳤다.
“구양 노사! 지금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그렇지 않습니까! 경매장에서 손속을 나누는 과정에서 흑익비영이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건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이제 막 초절정에 오른 애송이 따위가 제 상대가 될 리 없지 않습니다!”
그러자 구양숙이 버럭 성질을 부렸다.
“이놈아! 노부가 흰소리하겠느냐! 붙어보기나 해라! 큰코다칠 것이다!”
구자건이 이를 부득 갈았다.
“……좋습니다! 흑익비영을 박살 내고 구양 노사께 도전하겠습니다! 그때 제 도전을 피하지나 마십쇼!”
“좋다! 네 말대로 신이를 제압하면 노부가 손을 섞어주마!”
“약속하신 겁니다!”
그렇게 환신과 구자건의 비무가 성사됐다.
생사결이 아닌 만큼 서로의 목숨을 노리지 않겠지만 꽤나 치열한 전투가 예상됐다.
용왕병단과 흑오단이 뒤로 물러나 자리를 만들었다.
환신과 구자건이 서로를 앞에 두고 대치했다.
구자건이 입을 열었다.
“소형제. 미리 사과함세.”
“뭘요?”
“내가 마음이 좀 급해. 무려 천하구대검수의 좌장인 검치 아닌가. 오래전부터 구양 노사와 한번 붙어보길 원했네. 이렇게 기회가 왔으니 놓칠 수 없지. 빠르게 소형제를 제압하고 구양 노사의 칼솜씨를 한번 봐야겠어.”
“아, 예. 그렇군요.”
환신은 속으로 이를 뿌득 갈았다.
‘넌 내가 아주 제대로 만져준다. 각오해!’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죽이지만 않으면.
-스르릉!
구자건이 등에서 칼을 빼 들었다.
어지간한 사람 키보다 큰, 일본도를 연상시키는 날이 휜 장도였다.
헌데 칼날이 붉고 검신을 따라 홍염의 일렁임을 묘사한 기이한 문양이 음각돼 있었다.
이 도야말로 천하제일쾌남 구자건을 상징하는 병기.
염천도(炎天刀)였다.
“그럼 소형제. 시작하세!”
-끼우웅! 쿵!
등 뒤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곧장 환신 쪽으로 쇄도했다.
이형환위도 아닌 것이 그 이상의 속도를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연옥신공상의 보신경.
폭염행(暴炎行)이다.
구자건의 등 뒤로 불꽃의 날개가 넘실댄다.
눈을 부릅뜬 채 연옥지기를 듬뿍 밀어 넣고 염천도를 내려쳤다.
구자건의 성명절기 신화도법(神火刀法) 제1초 화천락(火天落)이다.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홍염의 소용돌이가 대폭발을 일으키며 그 충격이 온전히 환신에게 집중됐다.
환신은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구자건의 입술이 비틀렸다.
‘반응하지 못하는 건가, 죽고 싶은 것인가?’
사람의 속을 어찌 알까.
허나 환신이 이번 일수에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구양숙은 그를 비난하지 못하리라.
자업자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슈슈슈슉!
무언가 튀어나와 빙글빙글 돌며 홍염은 물론이고 폭발로 인한 물리적 충격을 모조리 지워냈다.
이조차 찰나지간에 불과했다.
-캉!
순식간에 돌아와 구자건의 염천도를 막아냈다.
‘……이건?’
그것은 투명한 강기가 맺혀 있는 초승달 형태의 은색 륜이었다.
거대한 크기의 은색 륜이 웅웅거리며 존재감을 뽐냈다.
그때.
본능적으로 폭염행을 펼쳐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위이이잉! 서걱!
은색 륜이 맹렬히 회전하며 구자건의 반탄강기를 단숨에 잘라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즉발식 묘리로 수령천강부를 잡고 일양지기를 밀어 넣었다.
‘……느려.’
세계가 급격히 느려진다.
지독히 느린 세계 속에서 오직 구자건만이 정상적인 움직임을 가져갔다.
하지만 걸어 다니는 정도.
환신에겐 살아 있는 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초절정의 벽을 넘은 지금.
같은 초절정고수조차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후발선제의 극치.
즉발식이 발동했다.
-키융!
구자건의 기감에 무언가 감지됐다.
본능적으로 연옥강기를 전개해 벌집 형태의 반탄강기를 구축하고 이것도 모자라 염천도를 들어 막았다.
-투쾅!
수령기가 폭발하자 주변 습기를 미친 듯이 빨아들여 순식간에 거대한 빙하를 생성했다.
“흡!”
빙하에 갇힌 구자건이 곧장 연옥신공을 폭발시켰다.
-부글부글부글!
열기가 폭발하고 빙하가 부글부글 끓어 단숨에 녹아내렸다.
허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투쾅!
전신을 가시덤불이 뒤덮었다.
이 역시 연옥강기를 방출해 모조리 태워 버렸다.
-투콰쾅!
대지에서 바위 손이 일어나 구자건을 꽉 쥐었다.
-스사사삭!
번개처럼 염천도를 휘둘러 바위 손을 산산이 토막 내버렸다.
토사를 뚫고 튀어나온 그를 맞아준 건 수천 개의 철침이었다.
구자건이 양팔을 활짝 펼치며 외쳤다.
“나는 구자건이다!”
-끼유우우우웅!
태양 표면의 대폭발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열기!
수만 도에 달하는 고온이 수천 개의 철침을 단숨에 쇳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환신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곧장 흑영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창촉이었다.
‘질량이 커지면 파괴력도 커지는 법. 초절정고수가 됐으니 화살촉은 이제 졸업이다! 가랏!’
즉발식 묘리로 곧장 창촉이 발출됐다.
-키이융!
“어?”
그것은 생존 본능이었다.
또한 초절정에 이른 무인의 지고한 감각이다.
머리를 옆으로 꺾는 것과 동시에 염천도를 바짝 치켜들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연옥강기를 밀어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반탄강기를 쌓아 올렸다.
뜨거운 무언가가 머리카락을 태우고 지나갔다.
연옥강기와 반탄강기로 열기를 상쇄하지 않았으면 얼굴 반쪽이 시커멓게 타버렸겠지.
‘……뜨겁다?’
말이 안 된다.
자신은 고금제일 극양기공 연옥신공의 주인, 구자건이다.
뜨거운 감각을 맛보지 못한 게 벌써 십여 년도 더 된 일이었다.
헌데 뜨겁다?
그가 알 리 없었다.
태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일양지기다.
연옥지기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거나 오히려 능가하는 극양의 기운이었다.
-키이융! 키이융! 키융!
-캉! 캉! 캉!
구자건은 어린 시절 처음 도를 들었던 시절로 돌아가 무아지경이 되어 칼을 휘둘렀다.
‘기괴하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무공.
그 기괴함이 율약벽의 전뢰신기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섬뜩한 느낌에 엉덩이를 뒤로 쭉 뺐다.
-우우웅!
좌에서 우로 무언가 배꼽 부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륜?’
방금 전 환신을 보호하던 초승달 형태의 은색 륜이 아니었다.
태양과도 같은 황금빛 광채를 발하는 원형의 금색 륜.
-쿠오오오오!
금색 륜이 미확인 비행 물체처럼 물리법칙을 아득히 초월하는 움직임을 선보이며 급격히 선회하더니 다시 구자건을 노렸다.
본능적으로 염천도를 휘둘렀다.
-쾅!
“크윽!”
울혈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억지로 꿀꺽 삼켰으나 내상을 입은 게 확실했다.
‘무겁다!’
손도끼, 창촉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다.
사람 키보다 큰 거대한 륜이니 당연했다.
철창, 화극 같은 중병기와는 차원이 다른 육중함이다.
개금비의 직선운동.
일광금륜의 횡 운동.
이 두 가지가 절묘히 결합돼 구자건을 무한 압박했다.
반격 따위 꿈도 꿀 수 없었다.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데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어리석었구나.’
이런 강자를 무시하다니.
모욕감을 참지 못하고 이 자리에 자신을 참살한다 해도 불만 따위 늘어놓을 수 없을 지경이다.
허나.
구자건은 천하제일쾌남이었다.
그의 입가에 길게 미소가 그려졌다.
‘즐겁다!’
사방이 완전히 막힌 상자에 갇힌 느낌이다.
개금비와 일광금륜으로 쌓아 올린 점과 선에 대항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허나 그 역시 비천십이룡에 이름을 올린 무공의 천재.
시기각각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으면 얻을수록 환신의 강력함만 피부로 느낄 뿐이었다.
그 순간.
-우우웅!
코앞에 투명한 무언가가 당장에라도 머리통을 반
쪽 낼 기세로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을 방출하고 있었다.
주변 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어 서리가 내렸다.
“하아.”
숨을 토하자 하얀 김이 새어 나온다.
초승달 형태의 은색 륜에서 튀어나온 투명한 월광검강이 비스듬히 구자건을 노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하죠. 어때요?”
은색 빛을 발하는 초승달에 감싸인 채 팔짱을 끼고 자신을 응시하는 미소년의 엄청난 위엄에 구자건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신이 환하게 웃었다.
어째서일까.
저 웃음이 너무나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은.
-스르르릉!
월광은륜이 빙글빙글 자전하며 뒤로 물러났다.
시퍼렇게 날이 선 초승달 형태의 장대한 륜이 허공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광경은 웅장함 그 자체였다.
허나 칼날에 대가리가 쪼개질 뻔한 입장에선 마냥 웃을 수 없었다.
환신이 미소를 흘리고 흑익신화포를 휘날리며 몸을 돌렸다.
문득 구자건은 생각했다.
‘멋지다.’
구자건에겐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자신만의 미학이 있었다.
바로 멋이다.
그는 멋을 추구했다.
또한 구자건에게 멋은 남자다움이다.
사나이는 자고로 강하고 멋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 이 순간.
구자건에게 환신은 자신이 꿈꾸는 사나이의 미학 그 자체였다.
그는 길게 생각하는 자가 아니었다.
마음이 가면 그대로 실행했다.
“소형제.”
구자건의 부름에 환신이 고개를 돌렸다.
“환신. 제 이름은 환신이에요.”
“그렇군. 환신, 환 형제. 나 구자건은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 의형제가 돼주게.”
“……예? 의형제요?”
구자건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환 형제와 의형제가 되지 못하면 한평생 후회 속에 살 거 같은 예감이 드는군. 그러니 부디 나 구자건의 의형제가 돼주게. 어떤가?”
“어, 음…….”
구자건의 말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이거?’
제천 썩은물인 환신은 무슨 상황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의형제 이벤트구나!’
제천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 호방한 성향의 몇몇은 느낌이 오면 바로 의형제 맺자고 달려든다.
형제의 연을 맺으면 피를 나눈 형제 이상의 관계가 된다.
플레이어에게 위기가 닥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와 목숨을 걸고 도움을 준다.
반대급부로 플레이어 역시 의형제가 위기에 빠지면 무조건 도와야 했다.
만약 의형제가 타인에게 목숨을 잃는다?
복수 퀘스트가 뜨고 이를 수행하지 못할 시 명성 수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명성 수치가 폭락하면 이벤트 수행에 제한이 생기고 상호작용에서 부정적인 결과가 뜬다.
한마디로 복수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으면 메인 시나리오 진행이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의미였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등천수룡 구자건 정도면 플레이어가 맺을 수 있는 의형제 중 최고 중의 최고였다.
‘아이고! 이게 웬 떡이야?’
환신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살짝 튕겼다.
“에이, 전 일개 낭인에 불과한데 비천십이룡씩이나 돼서 낭인과 의형제를 맺는다고요?”
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8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