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태음칠절맥(2)
냉조의 발걸음을 따라 기문진 생문을 밟아가며 약왕곡 내부로 진입했다.
지난번 약왕곡에 방문했을 때 목격한, 능선을 따라 층층이 조성된 영약 농장 사이로 운무가 흐르는 장엄한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득 냉조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30년이 흘렀구나. 상한론 원전을 통해 이 약왕곡에 고대 삼황오제의 영력이 담긴 식토(息土)의 기운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된 것이. 그때 무조건 이 계곡을 차지해야겠다 결심했지. 하지만 이 약왕곡엔 당시 꽤나 세를 떨치던 도적 떼의 산채가 자리 잡고 있어 난감하기 그지없었어.”
“그래서 사저와 내가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낭인을 고용한 거 아니요.”
서로 용서 없이 뒷담 까는 관계지만 양대신의는 사업적으로 매우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화약사가 생산하는 단약의 최대 구매처가 제천내각과 봉침구명이 운영하는 구명당이다.
구명당은 외상 치료에 특화된 만큼 안정적으로 단약을 공급받아야 했다.
사이가 더럽게 안 좋지만 은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화약사와 봉침구명 두 사형제는 의기투합해 사업을 구상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이 계곡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약왕곡 영약 농장에서 생산되는 영약은 식토의 영력 덕분에 천하제일의 품질을 자랑했다.
이를 대량으로 생산한 후 여러 공정을 거쳐 완제품 출하까지 모두 약왕곡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일관 공정이다.
덕분에 생산 비용을 극한으로 절감해 천하 만민이 싼값에 약왕당의 단약을 이용하고 양대신의는 어마어마한 은을 벌어들이고 있으니 모두가 행복한 결과였다.
동방척의 말을 구양숙이 받았다.
“흘흘흘. 기억나는구나. 냉씨 할망구와 여기 동방 늙은이가 어떻게든 이 계곡을 가져야겠다고 전전긍긍하길래 노부가 친분 있는 낭인을 죄다 이끌고 가서 도적 떼를 모조리 썰어버리고 산채에 불을 질렀지. 아주 시원하게 잘 타더구나. 노부 인생 최고의 불놀이였어.”
“……그런 사연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구양숙이 약왕곡 설립에 엄청난 공을 세운 모양이었다.
구양숙과 일정 이상 관계를 쌓고 함께 약왕곡에 방문해야 들을 수 있는 사연인 듯싶었다.
99회차 플레이에 빛나는 환신 역시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꽤나 흥미롭다.
하지만 실상은 그 이상이었다.
냉조는 슬쩍 구양숙 옆으로 다가오더니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구양 늙은이. 약왕곡 지분 좀 팔면 안 돼? 뭐 하러 지분을 3할씩이나 들고 있어.”
동방척이 그런 냉조를 거들었다.
“사저의 말이 옳아. 노부도 약왕곡 지분이 2할밖에 없는데. 좀 넘기지 그러나?”
“안 되지, 안 돼. 은에 미친 은 귀신들이 금창약이나 요상단 가격 올려 버리면 우리 낭인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겠는가. 그러니 노부가 꽉 틀어쥐고 있어야지.”
“……내가 미쳤지! 그때 왜 약왕곡 지분 주는 걸로 계약해 가지고! 일은 나와 사제가 다 하는데 돈은 저 늙은 낭인 새끼가 다 처먹잖아! 배당은 또 꼬박꼬박 잘 받아가지!”
“하아, 사저. 그러게 내가 제천전장에서 은 좀 땡기자고 하지 않았소.”
“30년 전이면 제천맹 막 설립하고 근황군과 한창 전쟁하던 시절이라고! 불안해서 거기 은을 어떻게 빌려! 누가 제천맹이 천하를 틀어쥘 줄 알았나? 다른 전장은 애송이 의원들 따위 상대도 안 해주고! 아아악!”
냉조가 자신의 백발을 쥐어뜯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시 돈이 부족해 구양숙이 사재를 털어 낭인 의뢰 비용을 지불하고 지분을 대신 받았으니.
환신의 머릿속에 형광등이 들어왔다.
‘거지 의숙이 제약 재벌이었던 건에 대하여…… 인 상황인 거지, 지금?’
그럼 태음칠절맥 치료비나 좀 보태주지.
역시 은에 칼 같은 양반다웠다.
구양숙이 씨익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마침 좋은 기회이니 이참에 미리 선포하도록 하마. 만약 노부가 죽으면 노부의 약왕곡 지분은 신이가 모두 상속받을 것이다. 얼마 전 제천전장을 통해 제천내각에 공증을 끝내뒀으니 그리 알거라.”
“뭐?!”
“예에?!”
다들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구양숙을 보았다.
“아니, 구양 숙부! 혼자서 무한 성도의 제천전장 다녀오시더니 그게 이거 때문이었어요?”
“물론이다. 신아. 기억해 두거라. 네가 나 검치 구양숙의 후계자다!”
구양숙의 뜨거운 눈빛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찜찜함을 느낀 환신이 구양숙에게 전음을 날렸다.
「구양 숙부! 사실대로 말해요. 약왕곡 지분 말고 또 숨겨둔 거 있죠?」
「흘흘흘. 신이 네 생각보다 노부가 제법 알부자니라. 나머지는 차후의 즐거움으로 해두자꾸나.」
「와, 능구렁이.」
「자고로 낭인은 굴을 세 개쯤 파둬야 오래 살아남는 법이니라.」
「그것참 명언이네요.」
구양숙은 냉조와 동방척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 다들 신이 치료에 최선을 다해. 실패하면 노부의 지분을 확 사사천(邪死天)에 넘겨 버릴 테니까!”
“헉.”
“미쳤어! 구양 늙은이!”
마도의 하늘 마천루보다 몇 배는 더 악독한 사도의 하늘 사사천을 입에 담다니.
해도 너무했다.
그만큼 구양숙이 환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반증이기도 했지만.
수십 년 지기 친구들이 투덕거리는 걸 구경하며 약왕곡 내부의 온천구를 지나 계곡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 공간에 진입했다.
지하 깊숙한 곳까지 이어지는 천연동굴이다.
아래로 내려가는데 냉조가 환신에게 물었다.
“신아. 근데 어쩌다 등천수룡과 의형제를 맺게 된 거니?”
“그냥 찐하게 싸우다 보니 친해졌는데요.”
“흐흥, 하여간 무식한 사내새끼들이란. 이래서 본 낭랑이 아름다운 소녀들을 사랑하는 거 아니겠어?”
“…….”
취향에 진심인 냉조였다.
밑으로 쭉 내려가자 하얀 김으로 가득한 거대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 한쪽 벽에는 돌을 깎아 만든 약왕동(藥王洞)이라 쓰인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공동 한가운데 일곱 가지 빛을 방출하는 신비로운 온천이 있었다.
저 온천이 바로 약왕곡의 정화인 칠채탕이다.
‘응?’
칠채탕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어쩐지 익숙했다.
‘아! 칠요신기!’
칠요전륜겁상의 내가기공 칠요신기와 유사했다.
‘신기하네.’
칠채탕 옆에 옥으로 만든 침상이 보였다.
냉조가 옥침상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만년온옥을 통째로 깎아 만든 침상이란다. 약왕곡의 보물이지. 음한 계열 절맥을 치료할 때 필수적이야.”
“그렇군요.”
만년온옥은 작은 조각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서불침의 공능을 얻을 수 있는 보물 중의 보물.
헌데 침상을 만들 정도로 거대한 만년온옥이라니.
저 만년온옥 침상을 팔면 작은 성채를 쌓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
물론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양대신의 정도겠지만.
만년온옥 침상 옆 협탁 위에 금과 은, 자개로 장식한 아름다운 옥 상자가 놓여 있었다.
헌데 만년온옥 침상과 달리 엄청난 한기가 느껴졌다.
“이 상자는 만년한옥으로 제작했어. 극양의 기운을 품은 영단을 보관하려면 이 방법뿐이라.”
냉조는 만년한옥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화아악!
엄청난 열기가 주변을 덮쳤다.
상자 안에 있는 건 비단 조각에 감싸인 투명한 붉은 구슬이었다.
붉은 구슬은 마치 태양과도 같은 열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냉조가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천양신단. 본 낭랑이 익힌 모든 의술의 집대성이자 최고의 예술 작품이란다.”
동방척이 떨리는 눈으로 천양신단을 응시했다.
“……천양신단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실로 엄청나군. 느껴지는 기운의 파장이 신이의 체질에 딱 맞춰져 있어.”
“후훗, 사제. 본 낭랑의 솜씨가 어때?”
“과연 명불허전이오. 허나 노부 역시 만만치 않지.”
그는 품에서 수정을 깎아 만든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홍옥을 붙여 만든 것 같은 기괴한 외골격의 벌떼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동방척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용왕채가 대단하긴 해. 정말로 홍황봉의 왕유를 구해올 줄이야. 덕분에 혈봉을 혈황봉으로 진화시킬 수 있었어. 그뿐 아니지. 천양신단 제조에 필요한 영약을 구하는 데 만금을 소모했을 게다. 신이 너는 네 의형에게 감사하거라.”
“그, 그 정도예요?”
환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형 겁나 멋지네.’
구자건은 최근 대호채와 긴장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며 흑룡함대를 이끌고 포양호로 돌아갔다.
‘흑룡대선 위에서 석양을 배경으로 전포를 휘날리는 건 형님은 그야말로 빛자건 그 자체였지.’
역시 돈 많은 형님이 최고였다.
환신은 향후 어떤 식으로든 구자건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통 이런 경우 환장할 정도로 빡센 의뢰로 돌아오지, 아마?’
벌써부터 두려웠다.
하지만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태음칠절맥 치료에 물심양면 도움을 준 은혜를 생각하면 아무리 어려운 임무라도 반드시 처리할 각오였다.
냉조가 환신을 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치료 과정을 설명할게. 오늘은 7차에 걸친 치료 중 첫 번째야. 먼저 천양신단을 섭취하고 운기조식을 통해 이를 칠대혈에 버티고 있는 태음지기와 융합하는 방식이지. 그럼 사제가 혈황봉으로 봉침을 놓을 거란다. 봉침을 맞자마자 칠채탕에서 운기조식하며 첫 번째 혈맥의 태음지기를 녹이면 돼. 녹은 태음지기는 다른 칠대혈의 태음지기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갈 거야.”
“알겠어요.”
“미리 말해두지만 집중해야 돼. 조금이라도 태음지기의 흐름을 놓치면 기혈이 얼어붙을 거야. 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만년온옥 침상과 칠채탕이 존재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 아까운 천양신단만 잃는 거지.”
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치료가 중요해. 여기서 물꼬를 제대로 트지 못하면 앞으로 치료가 힘들어져.”
“예.”
“그럼 만년온옥 침상에 올라가렴.”
환신은 냉조가 시키는 대로 침상 위에 올라갔다.
“그럼 천양신단을 섭취해. 요령은 신이 네가 품고 있는 극양지기로 천양신단을 녹이는 거야.”
인세에 보기 드문 영단이라 그런가?
섭취 방법도 복잡했다.
환신은 격공장의 묘리로 허공을 격해 천양신단에 일양지기를 불어넣었다.
붉은 유리구슬 같은 천양신단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용암을 앞에 두고 있는 것마냥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초절정고수를 제외한 전원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기우는 양대신의의 앞에 서서 곧장 명옥지기로 진기의 벽을 쌓았다.
-까직!
일정 이상 일양지기를 불어넣자 계란이 깨지는 듯한 기음이 공동에 울려 퍼졌다.
곧장 천양신단이 녹아내리더니 붉은빛을 내뿜는 걸쭉한 액체가 되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환신은 극한의 진기수발로 천양신단을 곧장 기화시켰다.
그리고 코를 통해 천양신단을 흡수했다.
순간.
환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기혈을 따라 일양지기와 또 다른 천양신단의 기운이 흘렀다.
엄청난 양기인데도 불구하고 환신은 오히려 시원함을 느꼈다.
‘사우나 들어온 거 같네.’
태음지기가 수도 없이 들락거린 기혈이다.
자연히 음한한 성질을 띠게 된 기혈이 천양지기에 의해 서서히 풀렸다.
천양지기는 칠대혈에 웅크리고 있는 태음지기에 달라붙었다.
산악과도 같았던 태음지기가 두부처럼 말랑말랑해졌다.
역시 태음지기를 저격하기 위해 만든 천양신단다운 공능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동방척이 다가와 말했다.
“자, 옷을 벗고 누워라.”
“예.”
시키는 대로 만년온옥 침상에 누웠다.
동방척은 수정 상자를 열었다.
혈황봉 수십 마리가 날아올랐다.
“후훗, 귀여운 것들.”
혈활봉은 영적으로 동방척과 연결돼 있었다.
동방척이 정신감응에 더해 손가락을 튕겨 미량의 여왕 혈황봉 페로몬을 환신의 혈도에 뿌렸다.
-애애애앵!
곤충 특유의 날개음과 함께 혈황봉 무리가 곧장 환신에게 날아들었다.
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12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