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고통의 끝
혈황봉의 꽁지에서 날카로운 침이 튀어나왔다.
동방척은 봉침구명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혈봉만으로도 어지간한 괴질은 거뜬히 치료할 수 있었다.
혈황봉은 혈봉보다 무게는 1.5배, 봉침의 효능은 3배로 늘어난다.
이 정도는 돼야 천양신단의 기운을 전신 기혈을 따라 최선의 경로로 이끌 수 있었다.
혈황봉의 침이 일제히 환신의 육체에 꽂혔다.
그러나.
-팅! 팅팅! 티팅!
혈황봉의 침은 환신의 육신을 뚫지 못했다.
그걸 본 동방척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 경험상 이는 육신을 단단하게 해주는 외문무공 혹은 강체능의 공능이라 확신했다.
동방척은 천양신단의 약력을 태음지기와 융합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환신에게 전음을 날렸다.
「신아. 네놈 피부가 너무 단단해 침이 뚫지를 못한다. 어떻게 해보거라.」
‘……젠장!’
혈황봉은 침은 영물답게 강철을 뚫을 정도로 단단했다.
허나 불괴수라마공 9단공 즉 대성을 목적에 둔 환신의 피부는 이보다 훨씬 단단했다.
거의 만년한철에 버금갈 정도.
환신은 칠요신기를 운용해 피부 위에 상시 흐르는 수라마기를 억제했다.
칠요신기는 애초에 환신이 운용하는 모든 내가기공을 통제할 목적으로 창안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피부는 여전히 강철 갑주에 버금갈 정도로 단단했다.
허나 혈황봉의 침으로 충분히 뚫을 수 있을 정도의 강도였다.
-푹! 푸푹! 푸푹!
동방척은 관현악단 지휘자라도 된 것마냥 현란하게 진기의 실을 조종해 혈황봉을 계속해서 유도했다.
혈황봉은 동방척이 의도한 대로 환신의 혈도에 침을 찔렀다.
과연 천하제일 침법 대가다운 엄청난 실력이다.
구양숙이 초조한 얼굴로 냉조에게 물었다.
“냉씨 할망구.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이냐?”
냉조가 도끼눈을 뜨고 구양숙을 노려봤다.
더 성질 긁으면 뒷감당이 심히 어려움을 예리하게 감지한 구양숙은 슬쩍 고개를 돌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른 척했다.
강호에서 손꼽히는 능구렁이다운 처신이다.
“흥! 본 낭랑과 사제가 양대신의라는 별호를 검패로 딴 줄 알아! 당연히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으니 늙은 낭인은 지켜보기나 해!”
“아, 알았어. 거참 다 늙어서 성질은.”
“뭐?!”
“끄응. 아무것도 아니야.”
구양숙이 백발을 곤두세운 냉조에게 깨갱하는 사이 동방척의 시침은 절정에 이르렀다.
일곱 개의 대혈을 제외한 전신 혈도에서 뜨거운 열기가 방출되더니 붉게 달아올랐다.
기혈을 따라 천양지기가 흐르자 태음지기가 마치 점차 탱글탱글하게 변했다.
태음지기의 벽 사이를 통과하는 것도 꽤나 수월해졌다.
‘진짜 신기하네.’
그때 고막에 냉조의 전음이 꽂혔다.
「지금이야! 어서 칠채탕으로 들어가! 그리고 첫 번째 칠대혈의 태음지기를 녹여!」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신은 칠채탕에 몸을 던졌다.
-풍덩!
환신의 몸이 칠채탕 속으로 점점 침잠해 들어갔다.
마치 어머니 자궁 속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기혈을 따라 칠요신기와 천양신단의 기운을 융합해 천천히 일주천시키자 기세가 점점 강해졌다.
‘좋아. 바로 시도해 보자.’
환신은 곧장 쌓이고 쌓인 천양신단의 기운을 칠대혈 중 첫 번째 음교맥을 향해 곧장 찔러 들어갔다.
천양신단의 기운을 머금은 칠요신기는 해일처럼 음교맥의 태음지기 벽을 녹여 버렸다.
‘돼, 됐다아아아앗!’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태음칠절맥의 중 하나를 타동한 것이다!
녹아버린 태음지기가 순식간에 다른 칠대혈에 위치한 태음지기로 이동해 하나로 합쳐졌다.
냉조의 말대로였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이제 시작이야! 앞으로 여섯 번만 더 치료받으면 돼.’
그런데.
천양신단의 기운을 일주천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음, 뭔가 여력이 많이 남는 느낌이…….’
이대로 몇 번 더 일주천하면 다른 혈맥도 뚫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한번…… 해봐?’
위험부담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여유가 넘쳐서 문제다.
이대로 흩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자신의 기린지재라면…… 성공할 수 있었다.
고민은 잠깐이다.
실패하면 냉조와 동방척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 믿고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곧장 천양신단의 기운을 머금은 칠요신기를 두 번째 칠대혈로 돌진시켰다.
-쾅! 쾅! 스르륵!
‘……쉬운데?’
첫 번째 혈맥의 태음지기를 녹일 때보다 저항이 두 배 정도 됐지만 할 만했다.
곧장 계산을 끝마쳤다.
태음칠절맥 치료를 대가로 동방척의 의뢰를 다섯 개나 더 수행해야 된다.
이건 구자건이 은을 지불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여기서 몇 개라도 혈맥을 더 뚫으면?
수행해야 할 의뢰를 확 줄어드는 것이다.
‘이거 완전 개꿀이잖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다섯 개.
최대한 많은 혈맥을 뚫는다!
그렇게 결심하고 곧장 혈맥 타동에 들어갔다.
이 세계에 온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열의에 불타오르는 환신이었다.
* * *
-부글부글.
환신이 칠채탕에 들어간 지 벌써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구양숙은 신경이 잔뜩 곤두선 채 팔짱을 끼고 칠채탕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냉조가 엄지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뭐지.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지?”
그 말에 구양숙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뭐?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동방척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상하군. 나와도 몇 번은 나왔을 시간인데.”
“동방 늙은이! 어떻게든 해봐! 왜 가만있어!”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지금 칠채탕은 신이의 공력이 깃들어 자칫하다간 나 위험한…….”
그때였다.
-쩍! 쩌저적! 쩡!
칠채탕이 빠른 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냉조가 자신의 백발을 움켜쥐었다.
“이, 이게 뭐야! 내 칠채탕!”
“냉씨 할망구! 지금 그딴 소리가 나와! 신이 어쩔 거야, 신이!”
“으으, 나도 몰라! 분명 하나의 대혈만 타동 하면 진작에 나왔을 텐데! ……잠깐. 혹시 신이 저 녀석, 다른 대혈도 타동하고 있는 거 아니야?!”
“뭐?! 사저! 그게 가능한 일이요?”
“당연히 불가능하지! 한 번 혈맥을 타동할 때마다 그 태음지기가 다른 혈맥의 태음지기와 합쳐진다고! 그럼 혈맥 타동이 두 배로 어려워져! 마지막 혈맥 타동 때 무려 49배의 힘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에 대응해 세심히 천양신단의 약효를 조절해야 되는데! 신이 녀석 왜 무모하게!”
구양숙을 비롯해 기우와 광동삼살 전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두 꽁꽁 얼어붙어 빙하가 된 칠채탕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모두가 걱정하는 사이.
환신은 마지막 혈맥 타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미치겠네.’
냉조의 예상대로였다.
여섯 번째 칠대혈인 충맥까진 어떻게 뚫었는데 마지막 대맥이 문제였다.
태음지기 공략에 최적화된 천양신단의 기운이 거의 소진된 것이다.
‘젠장! 어떡하지?’
외부의 도움 역시 받을 수 없었다.
본신 공력으로도 부족해 모공으로 칠채탕의 기운까지 흡수해 충맥을 뚫고 지금은 완전히 빈털터리 신세였다.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너무 욕심부렸다.
본래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기린지재의 천재성과 칠요신기의 공능이 이를 가능케 했다.
그렇게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야말로 죽음의 함정이다.
‘이대로 얼음덩어리가 되는 건가?’
진짜로?
욕심 좀 부렸다고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도 되는 부분인가?
‘아무리 그래도 냉동식품 엔딩이라니. 이건 너무해!’
모두 자업자득이라 다른 사람 핑계 댈 여지도 없었다.
‘생각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미 밑천을 다 털렸는데 어떻게?
바로 그 순간.
엄청난 영감이 환신의 뇌리를 스쳤다.
‘마, 맞아! 선천지기가 있었지!’
그간 죽을 고생을 해 상단전에 응집시켜 놓은 선천지기.
이거라면 가능했다.
‘선천지기는 모든 기운을 부풀리는 공능을 품고 있어. 그렇다면!’
환신은 한 줌도 채 남지 않은 천양신단의 기운과 선천지기를 융합시켰다.
‘이, 이건?!’
다 죽어가던 천양신단의 기운이 거품처럼 한순간 몇 배로 불어났다.
살길을 찾은 것이다.
‘할 수 있어!’
아니, 무조건 해내야 했다.
자신의 생명이 달려 있었으니까.
곧장 천양신단의 기운을 칠요신기의 묘리로 운용했다.
-웅! 웅!
마지막 남은 대맥을 피해 기혈을 따라 진기를 맹렬히 회전시켰다.
지금까지 아슬아슬 곡예비행 하듯 진기를 운용했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팔다리를 묶고 있던 족쇄가 반쯤 풀린 느낌이다.
‘……그동안 좁은 골목길을 전전했다면 지금은 시내 대로를 달리는 느낌?’
마지막 남은 태음지기의 벽을 녹이면 드디어 자유다.
이 세계에 와서 지금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루 일곱 번 자신에게 고통을 준 원흉.
태음칠절맥의 저주로부터.
‘가즈아아아!’
쌓이고 쌓인 원념을 담은 마지막 폭주였다.
곧장 역혈수라대법을 격발했다.
전신으로 붉고 푸른 기운이 방출됐다.
그러자 진기가 거의 5배 이상 폭증했다.
칠요신기에는 수라마기 구결 역시 첨가돼 있었다.
역혈수라대법은 무리 없이 칠요신기와 융합했다.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진기를 드디어 태음지기의 벽과 충돌시켰다.
-쾅!
‘끄아아아악!’
이거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고통.
실톱을 전신 혈관 한 가닥 한 가닥에 밀어 넣고 단숨에 당기는 듯한, 그런 미칠 듯한 고통!
이 고통을 지금까지 죽을 고생을 해가며 버텨냈다.
헌데 이 고생을 더 겪으라고?
‘지랄!’
그럴 수 없다.
1분 1초도 더 이 고통을 참지 않겠다.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태음지기의 벽에 안녕을 고한다.
‘뒤져!’
천양신단의 기운이 해일처럼 태음지기의 벽을 덮쳤다.
천산산맥처럼 굴강하던 태음지기가 흐물흐물해졌다.
칠요신기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형성하더니 그대로 돌진했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거대한 둑이 기어코 무너졌다.
-찌이이이잉!
세상이 온통 이명 천지다.
산산조각 난 태음지기가 칠요신기를 따라 소용돌이치듯 환신의 단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환신은 단전에 다양한 기공을 품고 있었다.
허나 기본이 되는 건 역시나 광자대력기.
칠요신기는 양과 음의 기운이 기본이 되며 이를 오행상생의 원리로 굳게 결합시키는 형태다.
단전에 양의 기운은 차고 넘쳤다.
허나 음의 기운은 그간 칠대혈을 막고 있는 태음지기에서 조금씩 빌려오는 형태를 취했다.
그것이 이제 단전으로 완전히 흡수돼 하나가 된 것이다.
칠요신기의 완성이었다.
단전이 음양의 완전한 조화를 이룬 태극 주위로 적청흑백황의 다섯 가지 색상의 별들이 공전하는 형태로 변모했다.
천의무봉의 완전무결한 형태다.
잔은 넘치도록 채워졌다.
마지막 한 가닥 깨달음만 얻는다면.
도달할 수 있다.
삼천경의 입문.
천령의 경지에 말이다.
멀지 않았다.
기린지재의 천재성이라면 곧 오를 것이다.
꼬리뼈를 시작으로 척추를 타고 엄청난 기운이 정수리를 관통했다.
천인합일이다.
극한의 희열과 함께 천지가 교태하는 법열이 교차하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냉씨 할망구! 어떻게 좀 해봐!”
“본 낭랑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럼 신이가 이대로 얼음덩어리가 돼서 죽는 걸 보고 있을 참이야!”
“신이가 멋대로 굴어 일이 이 지경이 된 걸 나보고 어쩌라……. 잠깐. 저, 저게 무슨……?!”
“뭐?”
구양숙은 냉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헉!”
얼어붙은 칠채탕이 녹고 있었다.
아니, 녹는 정도가 아니다.
순식간에 펄펄 끓어올랐다.
그때.
칠채탕 안에서 무언가 중력을 거스르며 점점 떠올랐다.
태극과 오행의 별에 감싸인 환신이었다.
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1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