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흑오병단(1)
그렇게 낭인군단, 아니, 낭천을 장악한 환신은 곧장 남하를 위한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의창까지 대략 600리(약 235㎞).
오군도독부 산하 일반 보병은 하루 20리(약 8㎞)도 걷기 힘들다.
국경을 지키는 정예병은 2배가 좀 넘는 50리(약 20㎞)를 주파할 수 있었다.
50리만 되도 차원이 다른 행군 속도로 엄청난 전략적 우위를 누릴 수 있다.
물론 환신이 이 정도로 만족할 리 없었다.
환신은 5대 병단주를 소집했다.
중앙 공터 앞에 대형 막사를 설치하고 빠르게 회의를 진행했다.
“12시진(24시간) 안에 600리를 주파한다.”
5대 병단주 모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독고벽이 당혹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천주. 이곳에 집결한 낭인 전원 이류고수로 이루어졌다지만 하루 600리는 무리입니다.”
수백, 수천 단위의 행군이 아니다.
10만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 600리에 달하는 거리를 행군하는 것이다.
이런 대군을 휘몰아 하루 100리(약 40㎞)만 주파해도 한신과 백기가 살아 돌아왔다며 군신(軍神)으로 칭송받겠지.
독고벽의 말에 다른 병단주들 역시 동조했다.
대독검 진가린이 볼멘소리를 냈다.
“하루 200리가 한계. 이조차 전원 무림고수라 가능한 일이요.”
그 말에 환신이 제갈노아에게 슬쩍 턱짓했다.
제갈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앉은 탁자 앞 등잔 아래 그림자가 소용돌이쳤다.
제갈노아는 어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서책을 몇 권 꺼냈다.
“받으시지요.”
병단주들은 서책을 집었다.
내용을 훑어 본 병단주들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서책에는 각 병단주에게 배속될 낭인단과 의창까지 이어지는 최단 경로, 이류고수들이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최소 거리가 나열돼 있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중간중간 휴식을 취할 장소와 시간, 언제 식사를 해야 하는지 등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행군 계획서였다.
독고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이걸 어떻게…….”
제갈노아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이곳 호북성은 우리 제갈세가의 본거지. 각 대로는 물론이고 소로, 나아가 빠르게 물길을 건널 수 있는 다리와 물이 얕은 지형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최단 시간에 행군을 마무리할 수 있는 계획서를 작성했을 뿐이지요. 중간중간 예기치 못한 시간 누수까지 계산해 12시진 안에 700리를 주파할 수 있도록 계획을 짰으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
말이 쉽지 이런 세밀한 행군 계획은 듣도 보도 못했다.
환신 역시 처음 행군 계획을 받아들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미니맵상에서 신룡팔준이 속한 세력의 이동 속도가 3, 4배라 그런가 보다 싶었는데 실제로 행군 계획서를 가져온 걸 보고 말이 안 나왔다니까.’
제갈노아 오히려 약과였다.
이 분야 최고의 실력자가 바로 중금오 을지효다.
을지효가 속한 군사 집단은 이동 속도가 다른 제천팔패에 비해 5배에 이른다.
그야말로 질풍 같은 속도인 것이다.
‘하지만 객원 군사로 활동할 때를 제외하면 특정 세력에 적을 둔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여기선 다를 것이다.
환신 휘하에서 수많은 전설을 써 내려가겠지.
그날이 너무 기대됐다.
제갈노아가 가볍게 행군 개요를 설명했다.
“병단주들께선 각각 2만 기씩 5로, 다섯 갈래로 이동하면 됩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병력이 관도에 유입되면 병목 현상이 생길 수 있어 불가피한 조치이니 양해 바랍니다.”
“아, 아니요. 우리도 그게 편하오.”
“감사합니다.”
제갈노아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확실히 낭인이 대규모 전투에 최적화된 건 사실인 거 같습니다. 북천무맹이었으면 전투 외적인 요소가 겹쳐 이보다 이동 시간이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걸렸을 테니 말입니다.”
낭인은 다른 제천팔패에 비해 행군 속도가 압도적이고 거친 환경과 부족한 치중에도 불구하고 사기가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타 세력에 비해 열악한 환경이 일상이라 그렇다.
‘뭐지? 이 슬픈 기분은…….’
하지만 낭천의 깃발 아래 모인 이상 앞으로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파황도 유흠이 입을 열었다.
“바로 출발하면 되겠소?”
“아니, 한 가지 더 있다.”
5대 병단주의 시선이 일제히 환신에게 집중됐다.
환신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명부를 통해 이곳에 집결한 낭인 중 낭인단에 소속되지 않은 자들이 대략 3만 명 정도인 걸로 파악됐다.”
“대충 그 정도 될 겁니다.”
3만에 달하는 낭인이라니.
실로 엄청난 숫자였다.
환신이 선언했다.
“낭인단에 소속되지 않은 낭인 중 절정고수 100명, 일류고수 1,000명을 선발해 나 환신 직속 흑오병단을 편성하겠다.”
5대 병단주 모두 경악한 눈으로 환신을 보았다.
100전을 치른 100인의 절정고수와 일류고수 1,000명으로 구성된 낭인병단이라니!
구파일방 산하 병단도 이런 구성은 불가능했다.
오직 제천무적병단만이 이런 편재를 채택했다.
환신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흐흐, 내가 이날만 기다렸다고.’
광동삼살을 영입해 흑오단을 결성한 바로 그 순간부터 낭인병단을 꿈꿨다.
하지만 낭인단과 낭인병단은 천지 차이였다.
‘인재 영입이 너무 어려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대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재 수급이 너무 힘들었다.
명성을 쌓고 인재를 모아도 한 세월이다.
그뿐이 아니다.
양질의 인재가 모일 거란 보장 역시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환신은 처음부터 이 순간을 노렸다.
‘낭시는 제천내각의 명을 거역할 수 없거든.’
낭시에 소속된 낭인 역시 평소 제천내각의 비호를 받는 대가로 무조건 소집령에 응해야 했다.
이때가 흑오단을 병단으로 확대 편성할 절호의 기회였다.
5대 병단주는 환신의 선언에 토를 달 수 없었다.
낭인계를 단번에 휘어잡은 풍운아인 환신이다.
그가 자신의 친위대를 꾸리겠다는데 이를 어찌 거역하겠는가.
“그리하십시오.”
회의가 끝나자 환신은 제갈노아에게 서책을 내밀었다.
“제갈 군사가 내준 명부를 전부 확인했다. 3만 명 중 추렸으니 이들을 부르면 될 것이다.”
“명부에는 이름과 별호, 출신지, 활동 지역밖에 없는데 얼굴도 안 보고 선발하신 것입니까?”
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99회차 플레이 동안 내가 굴린 낭인이 몇 명인데.’
그중 잘 키웠더니 경지를 돌파한 자들도 제법 있었다.
태음칠절맥의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이들을 떠올려 명부와 일일이 대조해 표시해 둔 것이다.
“어. 그대로 부르면 돼.”
“……알겠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제갈노아를 애써 무시했다.
대형 막사를 나온 5대 병단주는 각자 일군을 이끌고 차례로 행군을 시작했다.
내일 이맘때쯤 의창성에서 저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0만에 달하는 인원이 싹 빠져나간 주둔지에는 1,100명의 낭인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대체 왜 남겨진 거지? 제발 설명 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검은 전포를 입은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가장 전면에서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내디디는 인물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흑익비영 환신!’
‘낭천의 천주!’
이들 모두 환신과 5대 병단주 사이에서 벌어진 낭인투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일류고수는 초절정고수들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절정고수들은 달랐다.
초절정고수의 속도까진 어찌저찌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환신은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허공에 그어진 황금색 선이 눈에 담을 수 있는 전부였다.
삼천경의 고수와 초절정고수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이것이 강호의 전설인 천령의 절대고수인가?’
그는 낭인들에게 낭천이란 이름을 주고 자신들을 이끌어 줄 거라 선포했다.
환신은 어느새 낭인들의 가슴속에 우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흑오단 전원이 일제히 단상 위로 올라갔다.
환신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눈동자에서 오색 안광이 방출됐다.
“으윽.”
“꺼으윽…….”
말없이 바라볼 뿐인데 숨이 턱턱 막히고 심혼이 제압된 기분이다.
무학에는 이런 금언이 있었다.
-하수는 육신(肉身)을 단련하고, 중수는 영기(靈氣)를 갈고닦으며, 고수는 심혼(心魂)을 정련한다.
진정한 고수의 정신은 현상계를 넘어 영적 세계로 나아간다.
묵시천존의 혼백이 와류우주까지 진출한 것이 이를 증명했다.
이들의 정신은 환신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그때.
혼을 찍어 억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단숨에 기세를 거둔 것이다.
환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쓸 만하군.”
흑익신화포를 펄럭이며 입을 열었다.
“기뻐해도 좋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나 흑익비영 환신의 선택을 받아 명예로운 흑오병단의 일원이 될 자격을 부여받았다.”
낭인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흑오병단?”
“갑자기 이게 무슨……?”
낭인들이 웅성거리자 환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발을 굴렀다.
-쿵!
단상을 시작으로 낭인들이 서 있는 자리를 칠채보광이 휩쓸고 지나갔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기운에 입을 다물었다.
환신은 오연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만. 미리 말해두지만 너희는 아직 흑오병단에 입단한 게 아니다. 입단할 자격을 부여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 그 말은……?”
“원한다면 입단하지 않아도 좋다. 강요 따위 하지 않아.”
모두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흑오병단에 입단하는 것이 이득인가, 손해인가?
정보가 없으니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환신은 언제나처럼 이들이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을하.”
환신의 명이 떨어지자 을하가 앞으로 나섰다.
을하의 손가락에서 검기가 피어올랐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팔을 검기로 그어버렸다.
-촤악! 치이익!
검기의 열량에 불로 지진 듯한 날카로운 상처가 생겼다.
을하의 행동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경악했다.
“어? 저, 저건 뭐야?”
“히익!”
절단면에서 붉은 실이 튀어나왔다.
비비 꼬인 붉은 실이 각 조직을 꽉 묶어 단숨에 이어 붙였다.
그 위로 피부가 자라나며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재, 재생능…….”
환신이 입을 열었다.
“초상승 내가기공인 불괴수라마공이다. 극성까지 익히면 초절정고수의 강기도 호신기 없이 튕겨낼 있는 극한의 강체능과 사지가 떨어져도 빠르게 자라나는 재생능을 제공하지.”
“헉! 그럴 수가!”
환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흑오병단에 입단하면 불괴수라마공을 간소화해 새롭게 창안한 상승 무공인 나찰기공(羅刹氣功)을 전수한다. 절정고수는 불괴수라마공 소성 경지인 3단공까지 전수하겠다. 군장급인 초절정고수에겐 완전한 불괴수라마공이 제공된다.”
“오오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일반 단원, 조장, 군장으로 세분화해 각자에게 최적화된 상승, 나아가 초상승 병기술을 전수할 것이다. 어떠냐. 이 정도면 낭인병단은커녕 명문대파도 제공하기 힘든 특혜 아닌가?”
환신은 단체로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는 낭인들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기연이 비처럼 쏟아지는데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해? 츄라이, 츄라이!’
무림인 꼬시는 덴 뭐니 뭐니 해도 기연이 최고였다.
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19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