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전설의 시작(3)
용연이 번개처럼 쏘아졌다.
파사의 기운을 머금은 용연이 이기어검의 묘리로 쏘아지자 사선(射線)상의 무급 녹혈귀가 일제히 막대한 열량에 녹아내렸다.
구양숙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게 정지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다.
느리지만 확실히 움직였다.
그저 개체마다 차이가 있을 뿐.
무급 녹혈귀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에 비해 을종, 병종 순으로 속도가 빨랐다.
갑종 녹혈귀는 구양숙에 비해 고작 5할 느린 시간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허면 환신은 어떠한가?
‘나보다 적어도 3배 빠르군.’
천령이라고 다 같은 천령이 아니다.
수어검, 목어검, 심어검 순으로 두꺼운 장벽이 형성돼 있었다.
‘남궁천이 목어검이라고 했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나는…… 도전자다.’
목표가 있다는 건 이토록 행복한 일이다.
설령 검로종군 과정에서 목숨을 잃으면 또 어떤가.
그저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 남길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이름뿐이다.
구양숙은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검제로 끝낼 생각 따위 없다.’
남궁천과의 일검쟁투에서 승리한다고 자신의 여정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매 시대마다 검제가 존재했다.
허나 원원자 장상봉을 개파조사로 모시는 무당파에게조차 고금제일검(古今第一劍)으로 인정받은 자는 오직 한 명뿐.
그는 구양숙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기쁨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혹시라도 고금제일검과 일검을 교환할 날이 오지 않을까?
알 수 없다.
허나 일말의 가능성은 존재했다.
검객으로서 이토록 행복한 시대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제 막 천령의 경지에 오른 구양숙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검초로 풀어냈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흡!”
손과 연결된 영기의 실을 따라 용연에 심혼을 불어넣었다.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마냥 통통 튀며 미끄러지듯 갑종 녹혈귀에게 쏘아졌다.
“이, 이건?!”
갑각질 칼날로 이루어진 환도(環刀)를 들고 있던 갑종 녹혈귀의 동공이 흔들렸다.
사천 출신 초절정고수이자 지살칠십이숙 중 구도, 천하구대도객의 일원인 귀명마도 왕정은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용연을 향해 본능적으로 환도를 휘둘렀다.
-차라랑!
왕정의 환도엔 세 개의 고리가 걸려 있었는데 도를 휘두를 때마다 고리가 칼등과 부딪치며 음공이 펼쳐졌다.
그래서 왕정의 별호에 귀명(鬼鳴), 귀신 울음소리가 들어가는 것이다.
노심이 품고 있는 엄청난 영기를 고리에 집중하자 음공에 노출된 구양숙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솟았다.
다행히 수라무병진의 반탄 강기를 뚫지 못해 수월히 버틸 수 있었다.
허나 용연은 왕정의 도초를 단숨에 뚫어냈다.
수백 번 휘둘러진 도초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가로질렀다.
용연이 엄청난 속도로 왕정의 복장뼈 자루를 관통했다.
“커헉!”
혈맥을 따라 단숨에 파사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각 혈맥마다 왕정의 기운과 파사의 기운이 끊임없이 충돌하더니 이윽고 노심으로 옮겨붙었다.
폭주였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육체 붕괴가 일어나며 두부와 흉부가 한순간 타버렸다.
완벽한 죽음이다.
왕정을 처리하자 용연이 곧장 호위하던 을종, 병종 녹혈귀에게 날아가 그들을 관통했다.
바로 그 순간.
목덜미가 서늘한 느낌에 구양숙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스가각!
반탄 강기가 뚜껑 따듯 뚫렸다.
천공이었다.
날카로운 검강에 구양숙의 목이 반쯤 베였다.
엄청난 잠영술.
생사판 좌소백이 이끌던 생사교 특급 자객 출신 갑종 녹혈귀의 치명적인 한 수였다.
초절정에 이른 특급 자객이 녹혈의 세례로 준천령급 녹혈귀로 각성했다.
은밀한 한 수에 구양숙조차 참수를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구양숙에겐 불괴수라마공이 있었다.
허공으로 비산한 피가 상처에서 방출된 붉고 푸른 기운에 이끌려 혈무(血霧)로 화해 코의 점막으로 흡수됐다.
검강의 열량으로 타버린 상처 단면에서 실처럼 가는 조직이 튀어나오더니 단숨에 봉합됐다.
그 위를 고운 피부가 뒤덮었다.
녹혈귀를 능가하는 압도적 재생능!
이게 고작 8단공에 불과했으니.
낭인에게 불괴수라마공은 그야말로 최고의 무공이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구양숙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전신에서 붉고 푸른 기운, 수라마기가 방출됐다.
기운이 뭉치며 머리 좌측에 붉은 얼굴, 우측으로 푸른 얼굴이 형성됐다.
등에서 수라마강으로 이루어진 2쌍의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역혈수라대법이다.
순간 공력이 4배로 폭증했다.
2쌍의 팔에서 검강이 쭈욱 튀어나왔다.
구양숙은 아수라와 같은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잠영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낸 갑종 녹혈귀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검강을 휘둘렀다.
-스거거걱!
수백, 수천 개의 선이 그어지며 갑종 녹혈귀의 육체가 수천 조각으로 갈라졌다.
번개처럼 손을 뻗어 노심을 회수하자 갑종 녹혈귀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구양숙은 급격한 탈력감과 함께 세상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인지 속도가 느려진 것이다.
“쿨럭!”
입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나온다.
역혈수라대법의 부작용으로 기혈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때 혈관을 따라 수라마기가 흘렀다.
기혈과 단전의 손상이 단번에 재생되더니 숨을 세 번 들이키자 내상이 완치됐다.
“……이, 이 정도라고?”
흑오단에 입단하고 그간 강호를 종횡하며 위기다운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어 불괴수라마공의 공능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수십 만 구의 녹혈귀와 마주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불괴수라마공의 힘을 체감했다.
그때 환신의 정신 감응이 쏘아졌다.
「구양 숙부! 뭘 멍하니 계세요! 저 혼자 녹색 벌레 짓밟는 거 안 보여요?!」
구양숙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칠채보광과 함께 기이한 회색 기운을 방출하며 홀로 수천 구의 녹혈귀와 대적하는 환신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장판파의 장비가 따로 없는 장엄한 광경이다.
‘……이젠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긴 하는구먼.’
그럼에도 순간순간 잔상만 남을 정도로 순속의 보신경이다.
자신은 아직 멀었다.
그걸 잊어선 안 된다.
구양숙이 손을 들었다.
번개처럼 용연이 날아와 잡혔다.
곧장 환신에게 정신 감응을 쏘아 보냈다.
「신아. 재미 좀 봤으니 이제 연수합격을 한번 해보자꾸나. 노부가 전위를 서겠느니라.」
「좋아요!」
아승기의 시간 속으로 진입한 구양숙과 환신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며 서로 교차했다.
흑오병단의 전설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 * *
훗날 협구전투로 불리게 될 흑오병단의 공중 강습에 이은 화공으로 무려 10만에 달하는 무급 녹혈귀가 불에 타 죽었다.
이 전투에서 죽은 건 무급 녹혈귀뿐만이 아니었다.
병종 녹혈귀 2,000여 구, 을종 녹혈귀 150구 그리고…….
갑종 녹혈귀 3구가 환신과 흑오병단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처음 2구를 제외하면 고작 1구의 갑종 녹혈귀를 추가로 제거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환신과 구양숙의 돌격을 을종, 병종 녹혈귀가 필사적으로 막은 결과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는 당연한 선택이다.
50만 녹혈군단을 이끄는 갑종 녹혈귀 숫자가 고작 8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중 3구를 척살했으니 그야말로 막대한 타격이다.
그럼에도 아직 40만 구에 달하는 녹혈군단이 건재했다.
갈대가 모두 타서 불길이 잡히자 녹혈군단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5리(약 2㎞) 정도 뒤로 물러났다.
유일한 출구를 틀어막고 있던 흑오병단은 전투가 끝나자 완전히 진이 빠졌다.
“으으으,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수라무병진이 아니었으면 한시도 버티지 못했을 거야.”
단원들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추룡이 크게 외쳤다.
“조장들은 들으라! 빨리 휘하 조원 숫자를 파악해! 어서!”
“예, 예!”
추룡의 닦달에 조원 숫자를 빠르게 확인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 한 명도 안 죽었다고?!”
“이건 말도 안 돼!”
허나 진실이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녹혈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조원도 죽지 않았다.
이는 온전히 환신과 구양숙의 공이었다.
한 병단에 천령의 절대고수 두 명이 존재한다?
지금까지 이런 병단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여기에 녹혈군단이 화공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점도 컸다.
이런 행운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다음 전투에선 전우를 잃을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흑오병단 결성 후 첫 전투에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은 건 의미가 대단히 컸다.
훗날 신입 단원에게 계승할 병단 전설로 영원히 기억될 테니까.
잠깐의 휴식 후 기운을 차린 흑오병단은 곧장 의창성으로 향했다.
사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암영마행을 펼치자 곧 의창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문으로 입성하자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흑오병단! 흑오병단!
10만 명에 달하는 낭인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자 성이 흔들릴 정도였다.
흑오병단은 최대한 턱을 당기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흑오단의 상징인 흑색 전포를 휘저으며 입성했다.
그런 흑오병단 앞을 제갈노아와 5대 병단주가 정중히 포권하며 맞이했다.
제갈노아가 환신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주군. 수고하셨습니다.”
“별거 아니야.”
그 말에 제갈노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10만 구에 달하는 녹혈귀를 태워 죽였는데 별게 아니라니요. 겸손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이릉대전에 버금가는 대승입니다. 일반적인 군대였으면 오분지 일 손실로 전멸 판정을 받고 바로 후퇴를 감행했을 겁니다.”
50만 대군 중 10만이 죽으면 그 2배인 20만이 큰 부상을 입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피해를 입고 버틸 수 있는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적이 인간이 아닌 게 문제지.”
녹혈귀는 상위 개체에 의해 통제받기 때문에 사기에 영향받지 않으며 상처 또한 금방 회복했다.
자상에 비해 화상은 재생이 더뎠지만 하루 정도면 싱싱한 40만 대군이 재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전투 속행 능력이야말로 녹혈군단이 진정 공포스러운 이유였다.
“전령에게 보고받았습니다. 구양 노사께서 천령의 벽을 돌파하셨다고요? 열한 번째 천령의 절대고수가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갈노아는 포권하며 위대한 무인에게 경의를 표했다.
구양숙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물론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흑오병단의 전력이 급증했으니 전략의 폭을 더욱 넓게 가져갈 수 있을 거 같군요.”
“어떤 식으로 포진을 짤 건데?”
“성내는 지금까지와 동일. 흑오병단은 성 밖에서 녹혈군단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
환신은 피식 웃었다.
“주군한테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기네. 협구와 달리 의창성 일대는 평야 지대라 자칫 잘못하다간 녹혈군단에게 포위당할 텐데. 그럼 나라도 위험해.”
제갈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주군께서 녹혈군단에게 포위당할 리 없지 않습니까.”
“훗, 그건 그렇지.”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구양 노사께서 천령의 경지에 오르시다니. 낭천은 천령의 절대고수를 두 명 보유한 유일무이한 대세력이 되었습니다. 이는 주군의 숙원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환신의 숙원 사업.
낭천을 제천구패로 만드는 작업이 급물살을 탈 게 분명했다.
“대신 그만큼 견제도 들어오겠지.”
“물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문산은 어때?”
사사천이 자리 잡고 있는 형문산성.
환신은 그곳의 동향을 묻고 있었다.
제갈노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이 형문산성을 오가며 사사천과 소통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역시 그런가.”
예상대로다.
사사천주 소이망이 청천과 손을 잡으려는 것이다.
환신은 이빨을 드러냈다.
“응징해야겠지.”
천하의 안위가 경각에 이른 이 시국에 감히 딴생각을 품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소이망에게 미증유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20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