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율약벽 암살 작전(1)
환신은 천천히 눈을 떴다.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 을지효와 만난 구화산 산봉우리였다.
을지효도 곧 정신을 차렸다.
“끄으응. 주, 주군.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아. 좌군사는?”
“소인도 마찬가집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보았다.
을지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겪은 일이 마치 꿈만 같군요. 너무나 신비로웠습니다.”
“아니. 현실이야. 군룡패와 철갑마왕이 연결된 걸 느낄 수 있거든.”
그 말에 을지효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째서 천망의 초월자를 반선이라 칭하는지 알겠습니다. 실로 옳은 말입니다. 마치 산신에게 홀린 기분이군요.”
환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언젠가 자신이 올라야 할 산꼭대기를 잠깐이지만 두 눈에 담았다.
남은 건 직접 산을 오르는 것뿐이다.
‘……지금은 막대한 깨달음을 갈무리할 때야.’
이 깨달음을 모두 수습하고 완전히 체화한 순간.
천망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릴 것이다.
환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좌군사. 나는 이만 돌아갈게.”
“소인도 함께 가겠습니다. 주군께서 철 봉공을 설득하셨으니 임무를 모두 완수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야지요. 소인, 아니, 소신은 이제 주군의 우마가 될 준비를 모두 끝마쳤습니다.”
“……오히려 주군을 우마처럼 부릴 거 같은데.”
“후훗, 창업 군주는 본래 몸으로 직접 뛰는 법입니다.”
“좌군사,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여덟 사형제 중 소신이 제일 무모하고 파격적인 성향을 지녔습니다. 그러니 적응하십시오, 주군.”
“어휴.”
환신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을지효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포권했다.
“그럼 주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환신 역시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해, 좌군사.”
바로 그 순간.
눈앞에 아지랑이 피듯 천천히 검은 선이 그어졌다.
[99
[99.4
[99.42%]
“……!”
업적도가 올랐다.
그것도 태음칠절맥을 치료하거나 중력신공 기연을 얻었을 때와 동일한 0.1%.
환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린 형님과 의형제를 맺어서? 아니면 을지효와 주종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영 헷갈리네. 에이, 그냥 각자 0.05%씩 반영됐다고 생각하지 뭐.’
어찌 됐든 업적도가 오른 건 반가운 일이다.
‘이제 99.42%. 절반 가까이 왔어.’
앞으로 0.58% 남았다.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전진하는 이 느낌이 너무 좋았다.
환신은 을지효를 보며 말했다.
“그럼 좌군사. 가 볼까?”
“예, 주군.”
흑영낭에서 쇠사슬이 튀어나와 을지효의 허리를 둘둘 묶었다.
환신의 정수리에 회색 영기, 중력자가 실타래처럼 풀리더니 바닥에 장막이 펼쳐졌다.
반중력장이 빛을 발하며 환신과 을지효가 천천히 허공으로 부양했다.
환신의 좌우로 금륜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주변 공기를 빨아들였다.
후방으로 뜨거운 기류가 뿜어지는 것과 동시에 환신과 을지효는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목표는 의창.
인간과 녹혈귀가 종의 운명을 걸고 격돌하는 최전선이다.
의창으로 돌아가 철린을 설득한 사실을 맹하후에게 보고하고 특공의 시기를 조율할 때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환신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구화산에 온 사이 어렴풋이 시기만 짐작하고 있던 대사건이 터질 거란 사실을 말이다.
* * *
제천사는 제천맹 산하 감찰 기관이다.
총수는 신검황 율무극으로 그 아래 좌우총령, 호법사자, 집법사자, 제천무사로 구성돼 있었다.
천간십존 중에서도 가장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신검황 율무극의 존재는 제천사를 감히 범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무적의 조직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다른 천간십존과 달리 적극적으로 강호의 대소사에 개입하는 천망의 초월자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제천사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단일 조직이며 그 절대적인 힘으로 제천맹 천하의 첨병 역할을 수행해 왔다.
허나 녹혈루 위하가 사천에서 발호한 지금 제천사는 과거의 위명을 잃어가고 있었다.
위하가 몸을 일으킨 것과 동시에 신검황 율무극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춰 버렸다.
세간에선 율무극이 녹혈루에게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 거라고 겁도 없이 떠들었다.
물론 소림철완 천절 신승과 무당비학 현월 진인이 동시에 사라지자 그런 말이 쏙 들어갔지만.
대신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천간십존 간의 맹약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풍문이 떠돌았다.
꽤나 사실에 근접한 추측이다.
율무극의 실종은 제천사의 위상을 빠르게 추락시켰다.
제천팔패는 맹하후의 영도 아래 일치단결했지만, 제천맹 외각 세력은 의뭉스러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또한 그간 율무극의 위세에 납작 엎드려 있던 암중 세력이 기지개를 켰다.
미증유의 적을 앞에 두고 중원은 내부에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 혼란한 시국에 한 명의 영웅이 등장하게 되니.
바로 제천사 좌총령 십전홍예 율약벽, 바로 그녀였다.
천령의 벽을 돌파해 강호 최정상급 강자로 발돋움한 율약벽은 천하가 좁다며 휩쓸고 다녔다.
제천내각의 막강한 첩보력이 율약벽이 이끄는 제천사의 무력, 행동력과 결합하자 이제 막 존재감을 드러내던 암중 세력이 잡초처럼 뽑혀졌다.
수로와 육로에서 치중을 공격하던 암중 세력은 율약벽의 신위에 짓밟혀 다시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그때 율무극이 하나의 전언을 보내왔다.
자신을 대리해 제천사의 전권을 행사할 지위, 대총령을 신설하고 그 자리에 율약벽을 앉힌 것이다.
제천사 대총령 율약벽.
명실상부 제천사의 실질적인 1인자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제천사는 다시금 제천맹의 힘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입지를 다져갔다.
하지만.
그런 율약벽을 노리고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화살이 날아들고 있었다.
* * *
호북성 십언현 무당산.
무림의 태산북두, 무당파의 본산인 이곳 무당산은 요 근래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무당파 장문인 운일 진인이 이끄는 최정예 무력 집단, 칠성병단과 태극병단이 한중으로 총출동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무당산에는 몇몇 1대 제자와 원로인 현자배, 이제 막 입문한 어린 제자가 전부였다.
또한 무당파 속가제자들이 이끄는 여러 중소문파 역시 무당이 깃발을 세우자 일제히 몰려들어 함께 한중으로 향하게 되니.
북적거리던 무당산 산하 마을은 을씨년한 분위기를 풍길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양번과 의창에서 수백만 녹혈귀를 상대로 중원의 운명을 건 대전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심약한 자들은 이미 인근의 섬서성, 하남성으로 피신한 지 오래다.
이곳에 남은 건 끝내 고향을 떠날 수 없는 자들뿐이다.
허나 그렇기에 강호의 암류 속을 종횡무진하는 비밀 결사에겐 최고의 회동 장소였다.
산하 마을을 가로지르는 대로 뒤쪽에 위치한 빈민촌 안가 지하.
전이술을 이용한 단거리 공간 전이로 2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1호.”
“3호.”
어둠 속에서 두 사내는 서로를 보며 포권했다.
이들이 바로 강호의 어둠에서 암약하는 비밀 결사.
청천의 정신적 지주인 청천 1호와 청천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책사 청천 3호였다.
청천은 철저한 점조직을 지향한다.
때문에 수뇌부인 13인회 역시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
청천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작전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청천 1호와 청천 3호의 회동이 성사되었다.
“3호. 준비는 모두 끝났소?”
“그렇습니다, 1호.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본천의 고수들을 한곳에 모아 훈련시켰습니다. 이들에게 물자를 공급한 자들은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모두 자결할 것입니다. 이로써 최소한의 희생으로 고천의 추적을 차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천에는 수많은 능력자가 존재했다.
여기에는 초절정고수에 비견되는 최상급 술사도 있었다.
하지만 묵시천존과 천간십존에 버금가는 강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는 술법으로 천망의 경지에 오른 고금제일술사 지뇌기가 고천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그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오직 하나.
독심(毒心)뿐이다.
제천맹을 방벌하고 푸른 하늘을 되찾고자 하는 이념으로 똘똘 뭉친 청천의 구성원은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었다.
이번 작전에서 희생된 자들은 푸른 하늘을 되찾는 위대한 여정에 기여한 영웅으로 청류무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청천 1호가 입을 열었다.
“상태는?”
“만전입니다.”
“으음, 과연 용살진(龍殺陣)으로 십전홍예를 제거할 수 있을까.”
“소인의 계산으론 충분히 가능합니다.”
청천 3호가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맹하후 휘하 무학자들에게서 천령사냥꾼에 관한 자료를 일부 빼돌려 청천의 주요 고수들이 고심 끝에 완성한 암살용 무병진 아닙니까. 믿으십시오.”
청천 1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맹하후에겐 최강의 패인 신검황 율무극이 있다.
하지만 그는 묵시천존과의 맹약에 묶여 맹하후를 도울 뿐 언제 돌아서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에게는 언제든 뽑을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필요했다.
갑급 무병진, 통칭 천령사냥꾼이라는 궁극의 무병진은 이런 필요성을 바탕으로 연구에 착수하게 된다.
그 움직임은 곧 청천에게 감지됐다.
강호 구석구석 청천의 사상에 감화된 자들이 수두룩했고 제천내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제천내각 산하 무학자 중에도 청천에 적을 둔 자들이 존재했다.
청천은 그들을 통해 갑급 무병진, 천령사냥꾼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청천은 천령사냥꾼 탈취를 시도했다.
하지만 맹하후는 천령사냥꾼의 파급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00명의 무학자에게 각자 과제를 나눠주어 파편화한 후 이를 취합해 자신이 직접 조립하는 방식으로 보안을 유지했다.
덕분에 청천은 천령사냥꾼의 진수를 고작 2할 정도밖에 얻지 못했다.
이렇게 얻은 2할을 바탕으로 수년에 걸쳐 연구하고 발전시킨 것이 바로 청천이 자랑하는 최강의 암살용 무병진, 용살진이다.
천령의 절대고수를 용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겠다는 13인회의 포부가 담긴 명칭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70명에 이르는 형제를 떠나보내야 한다니. 실로 뼈아프군.”
용살진은 천령사냥꾼에 비해 효율이 매우 떨어졌다.
고작 초절정고수 10명으로 천령의 절대고수를 상대할 수 있는 천령사냥꾼과 달리 초절정고수 10여 명과 절정고수 50여 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론상으론 60명이면 충분하지만 청천 3호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초절정고수 1명과 절정고수 9명을 더해 총 70명을 투입했다.
비록 다수의 일인전승 문파의 계승자가 청천에 투신했다고 하지만 초절정고수 10여 명과 절정고수 60여 명은 실로 엄청난 전력.
청천은 이번 작전에 정말이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작전을 맡은 건 누구요?”
“9호입니다.”
“그가?”
과거 합비대혈사를 주도한 청천 14호 마라혈겸 루빙보다 상위 서열인 청천 9호!
그는 13인회 내에서도 과격파로 유명했다.
또한 그는 과격한 성정에 걸맞은 무공의 소유자였다.
“……이해할 수 없군. 9호가 어째서 자살 임무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인가.”
“아시지 않습니까. 세상 그 누구보다 제천맹을 증오하는 자가 9호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는 이 순간을 위해 13인회의 회동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화살로 사용해 십전홍예의 목을 베고 율무극에게 깊은 절망감을 심어줄 거라 단언했습니다.”
“허어, 실로 무림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로다. 9호의 희생을 기록으로 남겨 동지들에게 널리 알리시구려.”
“그리하겠습니다.”
동지의 죽음조차 조직의 기강을 다지는 선전물로 이용하는 자들.
그게 바로 청천이란 비밀 결사의 무서운 점이었다.
문득 청천 1호가 청천 3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3호. 흑익비영은 어찌할 생각이오?”
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2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