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위기의 양번(1)
의창이 안정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사이 양번과 한중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나마 한중은 정파의 심장 북천무맹과 산적 집단 녹림맹의 연수가 제법 잘 이루어져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이는 환신이 겪은 99회차 플레이 동안 한 번도 없는 일이다.
한중은 녹혈귀에게 완전히 파괴당하고 섬서성으로 가는 길을 내주는 일이 빈번했다.
이는 북천무맹의 녹림맹에 대한 경멸과 녹림맹의 북천무맹에 대한 반감이 겹친 결과였다.
구파일방의 연합체인 북천무맹 입장에서 녹림맹은 일개 산적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녹림칠십이채의 연맹인 녹림맹은 기본적으로 정파와 적대 관계다.
한 번씩 토벌대가 오면 대개 구파일방 속가 제자가 개파한 중소 문파가 주력이니 당연했다.
북천무맹과 녹림맹은 정도와 마도 정도는 아니지만 이에 못지않게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으르렁대는 관계였다.
상황이 이런데 북천무맹과 녹림맹의 연수가 이루어진 데는 녹림왕 초일비의 전향적인 태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초일비는 본래 거만하고 게으르다.
천재적인 재능과 기연으로 천령의 경지에 올랐으나 어느 순간 무공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렸다.
……환신에게 비참한 패배를 맛보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초일비의 변화는 너무도 극적이었다.
그는 녹림맹의 수장임에도 을종 녹혈귀는 물론이고 갑종 녹혈귀를 상대로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준천령급 갑종 녹혈귀 다수가 그를 잡아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천령의 절대고수의 살과 생혈을 먹으면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할 수 있으니 목숨을 걸고 덤볐다.
녹림맹 산하 고수들이 죽어 나가고 자신 역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됐다.
그럼에도 초일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면의 야성을 폭발시켰다.
살이 찢기고 뼈가 갈리는 고통 속에서 정체됐던 천괴연혼강기의 경지가 높아졌다.
두 주먹으로 녹혈귀를 짓이길 때마다 혼세마운이 진화했다.
어색하던 삼합굴공첩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수십 일에 걸친 목숨을 건 투쟁.
전장이 곧 그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수어검의 다음 경지.
목어검에 이르렀음을 말이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고작 이걸로 흑익비영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천령의 경지를 돌파한 괴물.
이 불가해한 존재를 상대로 우위에 서려면 목어검으로 만족해선 안 된다.
더욱더 탐욕스러워져야 했다.
초일비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이것이 북천무맹과의 연수를 낳았다.
자신들이 무시하던 산적 무리가 저리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동맹인 팔세영웅련조차 세속의 무리로 여기며 경멸하는 산인 집단 북천무맹이 어찌 가만있을쏜가.
북천무맹주 자하신협 매장소 역시 초일비에게 질세라 매화 향을 뿌리며 종횡무진 구파일방의 사기를 드높였다.
북천무맹과 녹림맹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는 기묘한 관계가 성립됐다.
이는 맹하후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환신이란 존재가 낳은 나비효과였다.
그렇게 한중은 악전고투 속에서도 나름 잘 버티고 있었다.
허나 양번은 그렇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팔세영웅련과 마천루의 불화 때문이다.
양번의 쌍둥이 성채는 5대 난공불락 서열 2위로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양양과 번성, 두 개의 성이 서로 기각지세를 이루며 협력했을 때의 이야기.
양양을 맡은 팔세영웅련과 번성에 똬리를 튼 마천루 사이에 일체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 성은 고립되었다.
맹하후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사태다.
그의 예상보다 팔세영웅련과 마천루의 반목이 심각했던 것이다.
이 역시 환신이 낳은 나비효과였다.
99회차 플레이 동안 이 시점에 염왕성이 멸문된 경우는 전무했다.
염왕성은 천주산을 자연 성채 삼아 적은 병력으로 시간을 질질 끌었다.
마천루 역시 염왕성을 그냥 방치하지 않았다.
구천검신마 단목승이 이끄는 구천병단이 적절한 시점에 지원을 와서 염왕성채와 기각지세를 이루며 팔세영웅련을 견제한다.
검제 남궁천은 광검제로 흑화해 팔세영웅련 수뇌부를 분열시킨다.
결국 염왕성에 대한 복수는 녹혈루 토벌전 이후로 미뤄지고 이조차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게 된다.
하지만 지금 염왕성은 너무 쉽게 멸문해 버렸다.
모두 결정적인 순간 환신과 흑오단이 대활약을 펼친 덕분이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은 건넌 팔세영웅련과 마천루 앞에 기다리는 건 오직 파국뿐이었다.
맹하후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이 약한 고리를 날카롭게 꿰뚫어 본 자가 있었다.
바로 냉혈독수 당각이었다.
* * *
그것은 장대한 녹색 해일이었다.
무려 45만에 달하는 녹혈귀가 번성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세공사 일족이 만든 혈석으로 강화된 기문진에도 불구하고 번성을 지키던 마천루 산하 정예 병단 상당수가 성 밖에 진을 쳤다.
강자존의 마도 무인이 두더지처럼 성에 숨는 건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여기서부터 제천내각의 작전 지시와 동떨어진 방향으로 전개됐다.
맹하후는 번성의 압도적인 방어력에 의지해 외부에 최정예 병단을 배치하고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마천루는 굳이 정면대결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팔세영웅련 역시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은 정마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우측 구릉 위에 있던 구천검신마 단목승이 구천병단을 이끌고 질주했다.
“구련검수회의 형제들이여! 본 가주의 뒤를 따르라!”
-구천무적! 구련천하!
구천병단 일천 검객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구천검가는 마도십문의 일익이었으나 내부에 검마 단목승을 우상으로 여기는 검객들의 모임, 구련검수회가 존재했다.
단목승은 이 구련검수회의 검객 중 실력자들을 모아 구천병단을 창설한다.
한 명 한 명 자신만의 검도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 일검쟁투와 검로종군에 매진하는 상승 검객들이다.
검객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무엇일까?
고도의 진기수발?
오묘한 검초?
전부 틀렸다.
검객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바로 검혼(劍魂)이다.
검이라는 병기가 가져오는 무한한 변화.
이를 궁극의 일검으로 완성한 것이 바로 검혼이었다.
검혼의 무학 이론은 너무도 심오해 초절정 이하에겐 뜬구름 잡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헌데도 검객은 어째서 검혼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신봉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단목승이 눈을 부릅떴다.
‘고금제일검이 그리 말했다! 검객과 검이 혼연일체를 이뤄 검혼을 완성하면 천망으로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아직 천령의 벽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단목승은 조급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내 오른팔을 앗아간 구양숙! 그자가 천령의 경지에 올랐다!’
제천순보를 통해 천령의 벽을 넘고 의창에서 무시무시한 신위를 과시하고 있단 소식을 접했다.
검치와 검마.
두 검객은 오랜 세월 서로를 맞수로 여겨왔다.
헌데 검치가 먼저 천령의 벽을 넘었다.
그는 공공연히 검제의 위에 도전하겠다 말하고 다녔다.
과거 검치를 입만 산 자라며 비웃던 자들도 더 이상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심지어 검치가 천령의 벽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검제 남궁천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고 하지 않는가!
참을 수 없었다.
자신도 검제, 검치가 보는 경치를 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단목승이 살짝 부양했다.
뒤이어 검의 존재감에 단목승의 신체가 완전히 가려졌다.
보이는 거라곤 허공에 둥둥 뜬 채 이글이글 타오르는 애검 묵성뿐.
완숙의 경지에 이른 신검합일이었다.
묵빛 광채와 함께 묵성이 전면으로 쏘아졌다.
검은 선과 함께 녹색 파도가 그대로 갈라졌다.
수십 구의 녹혈귀가 한순간 재가 됐다.
그것은 경이였다.
무병진만으론 실현 불가능한 위업.
무병진의 공능으로 천 명의 검객이 심혼을 하나로 모아 일검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키유우웅!
단목승이 신검합일을 전개한 채 길게 선회했다.
그 뒤를 구천병단의 검객들이 미친 듯이 검초를 전개하며 뒤따랐다.
엄청난 돌파가 이어졌다.
반대쪽 구릉에서 구천병단의 활약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가자.”
“궁주의 명을 받듭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섯 명의 오행마군이 일제히 적청흑백황(赤靑黑白黃) 다섯 가지 색상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각각 300기로 이루어진 5개 병단이 제각기 무병진을 전개했다.
곧 오색 장막이 이들을 뒤덮었다.
그들의 전면에 한 인물이 오연히 서 있었다.
시시각각 오색으로 변하는 신비로운 머리카락과 눈썹.
오행보갑이라 불리는 빛나는 견갑과 비늘 갑주.
머리에 금관을 쓴 중성적인 외모의 미청년, 오행신마 소황문이 오색구름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뒤를 오행병단이 뒤따랐다.
오색구름에 휩싸인 채 질주하던 소황문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절세 미소년.
흑익비영 환신!
소황문은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애송이가 천령의 벽을 넘었다.’
환신과 소황문은 장강에서 춘절지약을 맺었다.
돌아오는 춘절 황산 연화봉에서 생사결을 벌인다는 맹약이다.
소황문은 자신 있었다.
약간의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천령의 벽을 넘어 흑익비영 그 빌어먹을 애송이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라 확신했다.
헌데 환신이 먼저 천령의 벽을 돌파해 버렸다.
이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졌다.
춘절에 연화봉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미 제천순보를 통해 이 사실이 강호 전체에 공표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연화봉에 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과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며 강호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차라리 녹혈군단의 공세가 영원히 지속되길 바랄 지경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저 녹색 벌레들을 죽이고 또 죽여 경지를 높이겠다!’
소황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투쟁의 끝에 생로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천령의 문을 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파멸뿐이다.
‘난 절대 죽을 수 없어. 그들을 위해서라도!’
소황문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뿜어졌다.
얼굴과 팔, 목 등에 오색 문신이 그려졌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밤톨처럼 뻗치고 오색 후광이 사방을 비추었다.
오행광마혈 발동이다.
괴물로 변한 소황문이 끔찍한 열량을 내뿜으며 녹혈귀에게 쇄도했다.
“그라라락! 저놈을 죽여!”
을종 녹혈귀 다섯 구가 일제히 소황문에게 달려들었다.
소황문은 잔인하게 웃으며 적색 광채로 물든 손을 휘둘렀다.
화령기가 작렬하고 일정 공간이 수만 도 고열로 뒤덮였다.
을종 녹혈귀 1구가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다시 흑색 광채로 물든 손을 흔들자 을종 녹혈귀가 수령기에 휘말려 얼음덩어리로 변했다.
뒤따라오던 오행무사가 들고 있던 병기로 얼음덩어리를 박살 냈다.
-고오오오오!
소황문의 손에서 강력한 흡력이 발생하자 을종 녹혈귀가 끌려왔다.
을종 녹혈귀 2구의 목을 꽉 쥔 소황문이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죽어라.”
우측에 있던 을종 녹혈귀의 몸에서 백색 광채와 함께 쇠침이 자라났다.
좌측 을종 녹혈귀는 황색 기운을 뿌리며 칠공에서 모래를 토했다.
금령기와 토령기의 위력이다.
강렬한 기파를 느낀 소황문이 고개를 돌렸다.
청동 인형을 연상시키는,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녹색 피부를 지닌 자들이 달려왔다.
갑종 녹혈귀였다.
소황문은 입술을 깨물었다.
갑종 녹혈귀와 벌써 몇 번이나 맞붙었다.
홀로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의 강적.
무병진이 아니었으면 벌써 죽어도 몇 번은 죽었다.
하지만 저딴 괴물 하나 죽이지 못하고 어찌 녹림왕 초일비를 무릎 꿇린 흑익비영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빌어먹을 애송이, 아니, 흑익비영 환신! 결단코 나 소황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겠다!’
등 뒤로 오색 후광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이번에는 기어코 저 괴물을 찢어 죽이리라!
“본좌는 오행신마 소황문이다!”
소황문이 그대로 갑종 녹혈귀에게 달려들었다.
양대신마가 대활약을 펼치는 사이.
전장이 한눈에 보이는 중앙 언덕.
그곳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흑룡이 수놓인 검은 금의에 붉은 견갑과 비늘 갑주, 머리에 높은 흑관을 쓰고 검은 전포를 걸친 관옥 같은 미남자.
강호는 이 사내를 천마 담군명이라 불렀다.
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21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