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승전연(1)
철린이 사라진 후 천령의 절대고수들은 땅에 떨어진 갑종 녹혈귀의 노심을 모두 챙긴 후 곧장 양번으로 향했다.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천령의 절대고수 모두 머나먼 천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허나 그 시선은 철린과 위하의 생사결을 모두 지켜본 후 그대로 사라졌다.
이를 통해 팔대명왕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천망의 초월자에게 사바세계의 일 따위 무의미하며, 오직 2차 태산쟁위만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이다.
천령의 절대고수들은 지독한 안도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위하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 천령의 절대고수 모두 절감했다.
천망의 초월자는 그저 대적 불가의 괴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갑급 무병진 천령사냥꾼을 전개해 대항했지만 모든 공격은 무산되고 위하의 염독은 그들을 벼랑 끝까지 내몰았다.
특히 중간중간 육체에 촉수가 돋아날 때마다 영혼까지 파고드는 정신 오염은 주화입마 위험을 증폭시켰다.
특히 사마의 지존인 천마 담군명과 혈마 소이망이 위험했다.
자칫했으면 당각을 능가하는 갑종 녹혈귀가 등장했을지도.
이렇게 쌓인 정신 오염을 회복하기 위해 얼마 간 정양이 필요할 정도였다.
헌데 천망의 초월자들은 완전히 속세를 초탈했는지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녹혈군단의 위협으로 천하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는데 천하 만민을 위해 나선 건 고작해야 장강백마 철린 한 명뿐이었으니 말 다 했지.
다른 제천팔패를 제압하고 제천맹을 장악하려는 야망으로 불타는 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른 감정도 들었다.
천령의 절대고수조차 개미 정도로 여기는 저들의 무기질적인 시선.
그것이 너무도 공포스럽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외면이었다.
야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모든 욕망을 벗어던지고 탈각한 초월의 길에 의문을 가지는 순간이었다.
천령의 절대고수들은 환신의 중력장을 이용한 초음속 비행으로 빠르게 양번까지 이동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땐 지난밤 수십만 녹혈군단의 공세를 방어하느라 지친 무인 모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을 반겨준 맹하후가 입을 열었다.
“맹도 모두 그간 밤을 세워가며 힘껏 싸웠느니라. 허니 오늘 하루 휴식을 주고 내일 승전연과 함께 논공행상을 하겠느니라. 자네들도 푹 쉬게나.”
“그리하겠습니다, 합하!”
천령의 절대고수들 역시 휴식이 절실했다.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맹하후가 마련해 준 고급 객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 * *
야심한 밤.
목덜미가 서늘한 감각에 환신은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자마자 든 생각은 하나였다.
‘……내가 제압당했다고?’
믿기지 않았다.
천령의 벽을 넘어 2차 환골탈태 용린을 이루면 그 순간부터 잠은 의미 없어진다.
체내의 내분비계를 자유자재로 조절해 원하는 생체물질을 신경계에 분비할 수 있으니 육체의 피로쯤 얼마든지 풀 수 있었다.
문제는 정신력이다.
잠을 자지 않으면 정신, 나아가 영혼이 마모된다.
천령의 절대고수는 내공 덕분에 오랜 시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약간의 숙면으로 정신이 완전히 회복되는데?
또한 자면서 일종의 영역을 펼쳐 얼마든지 기습에 대비할 수 있었다.
환신 같은 경우 숙면 중에도 언제나 태양신경총이 펼쳐진다.
당연히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 모두 감지할 수 있었다.
헌데 이를 뚫고 들어오다니?
천령의 절대고수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눈을 떠라. 그러라고 일부러 살기를 흘린 것이니.”
상대가 원하지 않았다면 잠든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삼도천을 건넜으리라.
환신은 조용히 눈을 떴다.
목을 겨누고 있는 것은 마치 기둥과 같은 7자(약 2.1m) 길이의 비취색 거도(巨刀)였다.
희미하게 자체발광하는 것이 신병이기임을 알 수 있었다.
환신은 고개를 들어 비취색 거도 너머를 응시했다.
새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장식이 달린 검은 투구에 까마귀를 떠올리게 하는 탈.
흑룡의 비늘을 이어 붙여 만든 검은 갑주 위에 걸친 검은색 피막 전포.
그리고 한 자루 비취색 거도, 벽옥도(碧玉刀)까지.
천하에 이런 기괴한 외양을 지닌 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광오 반문건…….”
자타공인 고금제일도객.
천간십존 병위(丙位).
신도지존 광오(狂烏) 반문건.
바로 그였다.
그는 허공에 쪼그려 앉은 채 환신의 목에 벽옥도를 겨누고 있었다.
반문건이 손목만 까딱하면 바로 목이 떨어지겠지.
‘……시발. 설마 날 죽이러 온 거야?’
광오 반문건은 고금제일도객으로 유명했지만 실상 그의 명성은 다른 방면을 통해 쌓아 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로 자객행이다.
그는 고금제일도객이며, 또한 고금제일자객이기도 했다.
그것도 금전적 이득을 취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객행을 하는.
반문건을 상징하는 단어는 악즉참(惡卽斬)이다.
그는 자신이 정한 기준에 어긋나면 천망의 초월자의 체면 따위 던져버리고 무지렁이 백성조차 망설임 없이 목을 베었다.
그리고 흑목을 깎아 만든 까마귀 조각을 신표로 던져둔다.
자신이 벌인 행사임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까마귀 조각을 이용해 자신을 사칭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반드시 찾아 죽이고 그 자리에 붉은 까마귀 조각을 남겨두었다.
뒷골목의 부랑자부터 천자의 처남까지.
악이라 판단하면 공평하게 죽음을 내렸다.
이런 반영웅적인 모습이야말로 반문건이라는 인물을 상징했다.
그런 반문건이 자신의 면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이런 야심한 시각에.
간담에 서늘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그때.
반문건이 입을 열었다.
“묵시흔의 제자, 흑천낭왕 환신.”
그 말에 환신이 발끈하며 대꾸했다.
“잠깐. 확실히 해둡시다. 난 묵시천존의 제자가 아닙니다.”
“묵시흔의 무공을 계승하지 않았는가.”
“흥! 대가를 지불하고 기연 형태로 묵시천존의 무공을 얻었을 뿐. 내 사부는 광동 출신 낭인 왕힐, 오직 한 분뿐입니다.”
까마귀 탈 사이로 안광이 번뜩였다.
순간 동공과 시신경을 거쳐 뇌의 말단 깊숙한 곳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사로잡혔다.
기세가 어찌나 살벌한지 연약한 인간의 육체로 버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원영신을 이룩한 천망의 초월자쯤 돼야 아무렇지 않게 받아낼 수 있겠지.
환신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악으로 깡으로 버텨냈다.
‘시발! 천망이면 다야! 지들이 뭔데 내 사부를 멋대로 바꿔!’
설령 천망의 초월자라도 자신의 사승을 멋대로 날조할 수 없다.
그것이 부모조차 주지 못한 정을 주고, 생명까지 버려가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왕힐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니까.
한참동안 환신과 반문건은 서로를 응시했다.
문득 반문건이 입을 열었다.
“묵시흔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십자살황무를 전수했는데 제자가 아니라니. 당연히 제자가 은원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는 고육지책인 줄 알았다. 헌데 정말일 줄이야. 믿기지 않는군.”
“믿기지 않는 일이 태연하게 벌어지는 곳. 그게 강호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럼 이제 이 벽옥도 좀 거둬주시죠?”
반문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다른 용무 때문이니까.”
“……그게 뭔데요.”
반문건의 눈에서 안광이 폭사했다.
“흑천낭왕 환신. 천령의 경지에 올랐으니 나에게 한 가지 맹세를 해야 한다.”
“……맹세라고요.”
“그렇다.”
“그게 뭔가요?”
“악을 행하지 않겠단 맹세다.”
“…….”
환신을 할 말을 잃었다.
‘뭔가…… 너무 반문건스러운 요구라 딱히 할 말이 없을 정도네.’
단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러고 보니 99회차 플레이 동안 천령의 경지에 오른 건 최근 몇 회차뿐이었지.’
그것도 항상 종장에 이르러서 말이다.
종장에 돌입하면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터지고 천령의 절대고수조차 심심하면 죽어 나자빠지는 대혼란이 펼쳐진다.
그 와중에 역경을 딛고 천령의 절대고수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인 전개였다.
반문건이 계속 말을 이었다.
“천령의 하수들은 경우에 따라 천하에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렇다고 함부로 죽이면 여러 중첩된 인연이 폭주해 예기치 못한 희생을 낳을 수 있지. 허니 기회를 주는 것이다.”
“무슨 기회 말인가요.”
“악을 행하지 않을 기회.”
“아하.”
“천령의 하수가 내 앞에서 맹세한 순간 나는 언제든 그자의 목을 거둘 수 있는 천기를 획득한다.”
반문건은 살의를 드러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천령의 하수를 모조리 죽여 악의 싹을 뽑고 싶다. 허나 그런 나의 행동이 의도치 않게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있으니 하지 않을 뿐이다. 제천팔패의 주인 모두 내게 목숨을 빚진 채 강호를 살아간다고 봐도 좋겠지.”
“……혹시 거부한 자도 있나요?”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셨는데요.”
“가볍게 만져줬다.”
“아…….”
환신은 왜 이 엄청난 비밀이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천령의 절대고수 중 대체 누가 이런 이야기를 떠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체면 떨어지게.
“흑천낭왕 환신. 너는 어찌하겠느냐? 맹세하겠느냐?”
“한 가지만 물을게요. 당신이 말하는 악은 대체 무엇이죠? 뭔지 알아야 지킬 거 아니에요.”
“간단하다. 정의롭지 않은 모든 행동을 말한다.”
환신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게 악을 미워하는 분이 녹혈루 위하가 천하를 위협할 땐 왜 수수방관했죠?”
“간단하다. 위하의 행동이 정의롭기 때문이다.”
“……뭐라고요?”
경악한 환신에게 반문건이 오히려 반문했다.
“오히려 내가 되묻지. 새로운 종을 창조한 위하가 자신의 종을 버리고 인간을 도우면 그건 정의로운가?”
“그, 그건…….”
“내가 규정하는 악이란 정의롭지 않은 모든 행동을 뜻한다. 이는 자신만의 정의. 즉 협(俠)이다. 정도는 정도가 추구하는 협을, 마도는 마도가 추구하는 협을 관철하면 그만이다. 협을 행하지 않는 자. 나 반문건의 심판을 받으리라.”
악즉참의 신념을 지닌 협의 수호자.
그게 바로 미친 까마귀, 광오 반문건이었다.
“……알겠어요. 악이 뭔지 대충 알 것 같네요.”
“그럼 환신. 내 앞에 맹세할 것이냐?”
“예.”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환신의 말에 반문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세한다고?”
“예.”
“정말로?”
“그렇다니까요. 거참, 의심 많으시네.”
“……이상하군.”
그 말에 환신이 물었다.
“뭐가 이상한데요?”
“맹세를 너무 쉽게 하지 않는가.”
“천망의 초월자에게 덤벼봐야 얻어터지기나 하지 대체 좋을 게 뭐가 있다고요. 딱히 어려운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바로 그거다.”
“예?”
“너는 너무…… 실용적이야.”
“응? 실용적인 게 나쁜 건가요?”
반문건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용적인 게 나쁘다기보다 뭐랄까…… 실용적인 강호인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에 가깝겠군. 대부분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굳이 목숨을 내던지지.”
“제가 그래야 하나요?”
“아니. 나로서는 귀찮게 손쓸 필요 없으니 오히려 편하다.”
“그럼 됐네요.”
“됐지. 됐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하군. 천존과 십존을 제외하고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할 존재가 있을 줄이야.”
환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천망의 초월자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다니. 제가 큰 업적 하나 세웠네요.”
“……철린의 의제라고 하더니. 환신. 너는 참으로 이상한 인물이군.”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아, 근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당신에게 한 수 가르침 받지 않고 맹세한 인물이 저 말고 또 있나요?”
“그렇다.”
“누구죠?”
“소이망이다.”
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23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