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건곤일척(2)
“좌군사. 내가 그간 소이망과 숨바꼭질하느라 관심을 갖지 못했는데 서안과 무한의 전황은 어찌 돌아가는가.”
“그렇군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머릿속에 천하를 품고 있는 최고의 책사답게 을지효는 정도 연합이 작금에 처한 상황을 간결하게 풀어냈다.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서안, 무한, 동정호의 3개 광역 전장으로 나뉘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지만 소신을 비롯해 팔세영웅련과 북천무맹의 군사들은 긴밀히 연통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각각의 전장이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한 전장의 전황이 확 기울어 병력에 여유가 생기면 곧장 다른 전장으로 일부 예비대를 보내 뒤를 친다.
최상의 시점을 재려면 각 세력의 군사들 간 소통은 필수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 양측 정찰 병력 역시 관도 인근에서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서안은 마도 동맹의 우세, 무한은 정도 연합과 마도 동맹 간 박빙 상황입니다.”
“뭐? 서안이 밀리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서안은 중원 7대고도 중 하나로 비단길의 시작점.
암염총은 역으로 이 비단길을 따라 서안까지 침공해 들어왔다.
암염총은 소뢰음사와 대뢰음사, 혈뢰음사, 대막 광풍사 같은 세외 대문파의 종주.
마천루로 따지면 이들 세외 대문파는 마도십문 같은 존재다.
이들 역시 이번 전쟁에 참전했다.
놀라운 건 이들의 진격 속도였다.
치밀하게 중원 침공을 준비했는지 최단 경로를 이용해 쾌속으로 서안에 도착한 것이다.
이것이 서안 방어선이 밀리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손자병법에서 병력의 운용은 졸속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른다.
군사를 운용할 땐 벼락같아야 하는 법이다.
특히 대군에겐 속도가 중요했다.
상대보다 한발 먼저 요충지를 선점하면 아군에게 기세가 넘어올 수밖에 없으니까.
서안이 위치한 섬서성에는 구파일방 중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었다.
북천무맹의 맹주인 자하신협 매장소가 화산파 장문인인 만큼 서안은 북천무맹의 텃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에 산재한 북천무맹 산하 문파들의 집결이 생각보다 느렸던 것이다.
환신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서안 방면은 언제나 정도 연합의 우위였는데 대체 왜…….’
그때.
환신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 남자를 보고 크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이런 제길! 제갈노아! 제갈노아 때문이구나!’
99회차 플레이 동안 남봉황 제갈노아는 예외 없이 무당비상검 운한 진인을 주군으로 섬긴다.
운한 진인은 쟁투강호 시대 개막 후 무당 칠성병단의 병단주가 되어 엄청난 활약을 펼쳐 일약 정도 무림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여기에는 남봉황 제갈노아의 엄청난 능력이 뒷받침된다.
운한 진인은 단숨에 북천무맹 지휘부의 일원이 되고 제갈노아는 자연스럽게 북천무맹을 좌지우지하는 대군사로 자리매김한다.
‘제갈노아가 북천무맹에 있으면 암염총에게 선수를 뺏겼을 리 없어.’
아니, 기본적으로 전쟁은 방어 측에게 유리하니 최소한으로 손만 썼어도 이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환신은 한 남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서잠호 양량.’
신룡팔준의 셋째인 서잠호 양량이 암염총에 투신했다.
폭풍 같은 군사 전개는 양량의 전매특허로, 비단길을 가로지르는 쾌진격이 딱히 놀라울 것도 없었다.
결국 환신이 운한 진인의 오른팔을 자르고 왼팔을 가루로 만들어 폐인으로 전락시킨 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작금의 상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제갈노아가 북천무맹에 있었으면 빠르게 구파일방과 그 속가 문파를 서안에 집결시키고 치중을 끌어모아 효율적으로 분배했겠지.’
이것이 신룡팔준의 힘이다.
그들이 지닌 무력은 보잘것없다.
하지만 한 명 한 명이 대규모 전장의 전황 자체를 바꾸고 상대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정도의 지략과 능력을 보유했다.
이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 큰 것이다.
물론 신룡팔준의 일원인 을지효와 제갈노아 모두 이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들 역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스스로 환신을 주군으로 택했다.
환신을 강호의 정점에 우뚝 세우고 자신들이 꿈꾸는 대로 강호를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주군과 신하 관계지만 그 이면엔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포함되어 있었다.
환신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을지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저희 낭천과 사사천 간의 승패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역시 그렇게 되는 건가.”
본래 이기고 있어야 할 전장에서 밀리고 있으니 낭천의 중요성이 더더욱 커진 것이다.
환신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좌군사는 어찌해야 한다고 보나?”
그 물음에 을지효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주군. 아군은 딱히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린가?”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 저쪽이라는 뜻입니다.”
을지효는 가볍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빙그레 웃었다.
“혹시 모르지요. 이미 양 사형과 제갈 사형께서 움직이고 있을지.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주군께선 그저 기다리시면 됩니다. 때가 오길 말입니다.”
을지효의 의미심장한 말에 환신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섬서성과 호북성 접경에 위치한 옥화산.
이곳은 녹혈루의 난의 시발점인 사천과 거리상 가까운 중경(重慶) 인근으로, 그 여파를 정면으로 감당해야만 했다.
당연히 중경성과 그 일대는 녹혈군단에 의해 몰살당한다.
덕분에 옥화산 일대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이 때문에 옥화산은 비밀스러운 회동을 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옥화산 능선의 수풀에 위치한 은밀한 동혈.
그곳에서 누군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양 사형.”
“제갈 사제도 오랜만이군.”
천구 제갈모세와 서잠호 양량.
신룡팔준의 일원인 두 사형제는 가볍게 포권했다.
거구의 양량은 허리에 매달린 호리병을 손에 쥐고 안에 담긴 술로 시원하게 목을 축였다.
“크으, 좋구나, 좋아! 내 이놈의 암염총이 더럽게 마음에 안 들지만 서역에서 건너온 이 술 하나만큼은 참으로 마음에 들어!”
“저번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암염총을 욕하는군요. 어찌 그러십니까?”
“응? 이야기 안 했던가? 그럼 내가 어쩌다 암천제 조립동, 그 인간을 위해 일하게 됐는지도 모르겠군.”
“사실 그게 꽤나 의아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양 사형께선 정도 성향이니 말입니다.”
“정도는 무슨. 사형제 중 나와 가장 비슷한 성향을 지닌 건 아마도 막내 사제일 테지. 나는 태생이 정파이니 어쨌든 정도에 가깝긴 하지만 그에 얽매이진 않아. 사형제 중 정과 마의 굴레에 가장 휘둘리는 건 아마도 둘째 사형이 아닐까 싶군.”
신룡팔준의 둘째인 북기린 사마작은 뼛속까지 팔대세가 사람이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은 특정 성향을 지니긴 했으나 이에 휘둘리진 않았다.
그중에서도 을지효와 양량은 가장 자유분방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튼 천하를 주유하며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데 녹혈루의 난이 터졌지 뭔가. 그래서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일단 중원 밖으로 피신해 있었지.”
“피신은 무슨. 양 사형이 녹혈군단을 무서워할 사람입니까. 그 핑계를 대고 세외에 나가신 거겠지요.”
“푸하핫! 제갈 사제가 나를 이리 잘 알고 있다니. 그걸 몰랐군.”
“됐고,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뭐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대막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대막 광풍사에게 붙잡히고 말았지.”
“……예?”
양량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 보지 말게. 대막에서 전원 한혈마를 타고 질풍처럼 달리는 대막 광풍사를 상대로 책사의 지략 따위 별로 쓸모가 없으니. 그들이 던진 밧줄에 묶여 대막을 며칠 동안 질질 끌려다녔지. 그나마 다행인 건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급 노예로 팔릴 수 있었던 거야.”
“……설마 팔려간 곳이?”
“아아. 암염총일세. 나는 그냥 조용히 문서 정리하다 시기를 봐서 적당히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이게 웬걸? 암천제가 내 정체를 알지 뭔가.”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는 자가 아닙니까. 우리 사형제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요.”
“그런 거지. 덕분에 그가 역으로 제안을 해오더군. 이대로 자신의 손에 고통스럽게 죽든지, 아니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함께 중원을 도모하든지 양자택일하라더군.”
“결국 충성을 맹세하신 거군요.”
“과정 자체는 제법 구질구질했지만 이런 식으로 주군을 섬기게 되는 것도 운명이다 싶었지. 사제도 알다시피 내가 꽤나 운명론자 아닌가.”
“잘 알지요. 사소한 일도 은전을 던져 결정하는 분 아닙니까. 저로서는 잘됐습니다. 오히려 암천제에게 고마울 지경이군요.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게으른 대호를 깨워줬으니 말입니다.”
“고마워할 필요 없네. 일단 충성을 맹세했으니 암천제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일세. 동맹 관계라 해도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으면 망설임 없이 뒤통수를 칠 것이니 그리 알게.”
“물론입니다. 결코 섭섭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됐네. 나로서는 내키지 않으나 암천제가 마도 동맹과 연수할 뜻이 확고하니 따를 수밖에.”
“……양 사형께선 암천제의 뜻이 아니었으면 마도 동맹에 합류할 생각이 없으셨습니까?”
“그래.”
“어째섭니까?”
“간단하네. 흑천낭왕, 나아가 자네 쌍둥이 형과 막내 사제와 적대하고 싶지 않으니까.”
“…….”
제갈모세의 눈동자에서 섬뜩한 광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를 눈치챈 양량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제갈 사제는 이미 흑천낭왕에게 한 번 사로잡혔었지 아마? 망신살이 크게 뻗쳤겠구만.”
“그만하십시오.”
“이런이런, 모처럼 제갈 사제를 놀릴 기회가 생겨 우형은 참으로 즐거운데 예민하게 굴기는.”
“하아.”
제갈모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형제 중에서도 양량은 가장 자유분방했다.
제갈모세는 이런 양량이 불편했다.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시지요.”
“그럴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흑천낭왕이 2차 쟁투강호 시대를 평정할 거라 보고 있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그의 행보를 보게. 그게 정상적인 성장인가.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지. 천하를 주유하며 겸사겸사 흑천낭왕 환신의 행적을 쭉 살폈네. 그리고 아주 기함을 했지. 그는 정말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인물이야. 그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광동 계투 당시 흑천낭왕은 무공 따위 일초반식도 모르는 삼류 중의 삼류 낭인이었어. 다른 고참 낭인들에게 엉망으로 두드려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더군. 제갈 사제. 혹시 흑천낭왕이 최초로 익힌 무공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까진 모릅니다.”
“삼재기공, 칠성권, 원앙각, 육합검법일세. 이 네 가지 기본공을 광동 출신 낭인 왕힐에게 전수받았지. 흑천낭왕이 자신의 사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왕힐 말일세.”
제갈모세는 벼락에 맞은 것처럼 굳어졌다.
“……잠깐. 광동 계투는 불과 3년 전인데.”
“이제 알겠는가?”
양량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흑천낭왕은 무공을 익힌 지 불과 3년 만에 천령의 경지에 이른 거야. 그것도 혈마 소이망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한. 자넨 이런 무공 재능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린봉귀용의 재능.”
제갈모세의 중얼거림에 양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답일세. 봉신전설상의 신선이 지녔다는 선골.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네 개의 재능을 린봉귀용의 재능이라 부르지. 이 린봉귀용의 재능 중에서도 필두가 바로 기린지재고. 이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네.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곧 천망에 도달할 게야. 자네는 천망의 초월자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무병진조차 천망의 초월자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이는 천령의 절대고수 10인이 모여 펼친 갑급 무병진, 천령 사냥꾼을 상대로 녹혈루 위하가 압도한 걸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이제 알겠는가, 제갈 사제.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네.”
양량은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둬야 할 때야.”
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29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