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359화
146. 남해 동맹
주세페의 말에 북궁초와 도진풍구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해의 지배자 환신에게 협력자로 받아달라는 요구의 의미는 절광성, 왜국과 동등한 지분을 달라는 뜻이었다.
새로운 참여자의 등장은 언제나 변화의 바람을 불러온다.
북궁초나 도진풍구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각 세력에 대한 이권 침해로 이어질 여지가 있었다.
당연히 경계심을 드러낼 수밖에.
제갈노아는 부드럽게 섭선을 부쳤다.
“서반아를 남해 무역의 협력자로 받아달라라. 무차별 해적질은 이를 위한 시위 목적이었던 거로군. 협력자로 받아주지 않으면 남해 무역의 판을 깨버리겠다는 위협이고.”
“……그렇다고 볼 수 있소.”
주세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익스터미나투스는 교황청 산하의 비밀결사지만 에스파냐 국왕 폐하께서 교황 성하께 유럽 신앙의 수호자 칭호를 수여받은 이후 에스파냐 국왕 폐하의 요청을 최우선적으로 반영하고 있소. 에스파냐, 나아가 유럽 귀족 사회에 동방 무역은 너무나 중요하오. 때문에 회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사략 활동을 펼쳤소. 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환신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쪽이 힘이 없으면 개처럼 물어뜯었을 거면서. 하여간 양놈들 태세 전환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그쪽을 보았다.
아르크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생긋 웃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환신은 살짝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주로 연상의 여자에게 관심받는구나, 나.’
율약벽도 그렇고 아르크는 그렇고.
물론 아르크는 겉은 소녀지만 속은 화약사 냉조보다 더욱 오래 묵은 노파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주세페의 말을 들은 제갈노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를 위해 먼저 칼을 빼 든다라. 고전적인 수법이구려. 허나 그거 아시오? 그 해적질 때문에 하마터면 마닐라가 지도상에서 사라질 뻔했다는 사실을. 주군께서 마닐라를 지워 버리겠다는 걸 말리느라 크게 고생했소이다.”
“끄으응.”
불과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갈노아가 이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겠지.
이곳엔 익스터미나투스의 총수, 신을 치는 창 아르크가 있었으니까.
어째서 아르크가 로마를 떠나 여기 머나먼 동방까지 오게 됐는지 주세페조차 알지 못했다.
허나 유럽 세계 무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종결자 아르크가 옆에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오행도 항구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만만했다.
허나 아니었다.
유럽 세계는 동방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비록 밀리긴 했으나 종결자 아르크와 대등하게 싸우는 저 중년인.
그리고…….
‘악마왕…… 아니, 성인 환 변경백.’
유럽 최강의 에소테리카인 롱기누스 오리고를 손가락 두 개로 잡는 괴물 중의 괴물.
아르크는 환신을 성인이라 인정했지만 주세페는 완전히 마음을 열지 못했다.
‘동방은 참으로 이상하고 위험한 곳이다.’
주세페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주세페의 표정을 보고 제갈노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해를 본 광동십삼행과 절광성, 도진씨, 오행마궁에 배상하시오. 배상이 선결되지 않으면 더 이상 논의는 진행되지 않을 것이오.”
“……그리하겠소.”
주세페는 창문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모두 저길 보시구려.”
장내의 모두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
부두에 서반아 선단의 선박이 모여 있었다.
총 여섯 척이다.
한 척은 초대형 갤리온이고 네 척은 프리깃, 한 척은 옆으로 넓적한 화물용 카락선이었다.
주세페는 카락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카락선을 배상금으로 드리겠소.”
제갈노아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남해 해전에서 서반아의 함선을 많이 노역했소. 서역 함선은 필요 없소.”
주세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배에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 아카풀코에서 이곳 포르모사까지 오기 위해 필요한 보급품을 제외하면 선창이 모두 은으로 채워져 있소.”
주세페는 희미하게 웃었다.
“에스파냐 국왕 폐하께서 남해의 지배자께 화해의 의미로 은을 선물한다 하셨소.”
“…….”
모두 눈을 크게 떴다.
도진풍구는 아예 입을 쩌억 벌릴 정도였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은이었다.
도진풍구는 왜국에서 은을 긁어모아 이곳 오행도까지 실어 나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허나 왜국의 배는 너무 작고 약해서 원양 항해에 취약해 그리 많은 은을 옮기지 못했다.
이마저도 풍랑에 휘말려 열 척 중 두세 척이 가라앉는다고 봐야 했다.
저 배 한 척으로 못해도 왜국 배 수십 척에 육박하는 물량을 적재할 수 있었다.
헌데 선창이 은으로 가득하다니?
환신조차 엄청난 물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략 배수량을 700톤으로 잡고 선창에 은을 가득 실었으면…… 미친! 15만 관이 훌쩍 넘는 양이잖아!’
지난 쟁투강호에서 환신이 중원의 모든 낭인을 고용한 비용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은이었다.
‘크으! 스페인이 한때 칠레의 포토시 은광에서 은을 미친 듯이 캤다고 하더니. 어마어마하잖아?’
카락선에 가득 실린 은을 광동십삼행과 절광성, 오행마궁, 도진씨가 적당히 나눠 가지면 서반아 사략선단에게 입은 피해를 보상하고도 한참 남았다.
은을 제공하는 주세페는 속이 쓰렸다.
‘본국의 세비야로 보낼 보물선 중 한 척을 이곳으로 돌렸다.’
에스파냐 국왕은 이번 일을 위대한 대왕인 자신과 남해의 지배자.
두 지배자의 결투로 규정했다.
거대한 이권을 놓고 배포와 품격을 칼로 삼아 지배자들끼리 벌이는 위대한 결투다.
때문에 보물선 중 한 척을 환신에게 선물로 내준 것이다.
이단에겐 가차 없으나 대우할 만한 자에겐 최고의 예우를 하는 엄청난 배포의 소유자.
그게 바로 현 에스파냐 국왕이었다.
환신은 입맛을 다셨다.
저 정도 은이면 향후 남해 교역이 매끄럽게 진행되는 마중물 역할을 수행하기 충분했다.
천망의 초월자가 됐음에도 은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한 환신이었다.
환신과 제갈노아의 눈이 마주쳤다.
환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노아는 가볍게 포권한 후 주세페를 보며 말했다.
“주군께서 사과를 받아들이셨소. 절광성과 오행마궁, 도진씨는 주군의 뜻을 따르겠소?”
북궁초와 후토마군, 도진풍구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환신이 아니었으면 손해를 회복할 길이 없는데 이걸로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으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서반아 쪽도 마냥 손해 보는 건 아니었다.
사략을 통해 얻은 전리품을 서역으로 돌렸으니 약간 숨통이 트였다.
이 정도면 약육강식의 바다에서 서로 제법 예의를 지켰다고 볼 수 있었다.
서반아에서 지불한 엄청난 은 덕분에 분위기가 한순간 화기애애해졌다.
냉혈한인 제갈노아의 입에도 살짝 미소가 맺힐 정도였다.
“서반아에서 성의를 보였으니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지. 원하는 걸 말해보시구려.”
주세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남해 무역의 독점적인 권한을 갖고 싶소.”
“독점권이라. 정확히 범위를 설정해 보시구려.”
“유럽, 그러니까 그쪽에서 서역이라 부르는 유럽 대륙은 수많은 국가가 난립하는 열국이라 할 수 있소. 이 국가 중 에스파냐 국왕과 그 후계자가 대대로 남해 무역의 독점권을 갖는 것이오.”
주세페는 선창에 은이 가득 실린 카락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매번 저 정도 규모의 은을 포르모사에 가져오겠소. 그 은으로 사치품을 교역하고 싶소.”
“흠.”
제갈노아는 눈을 감은 채 턱을 쓰다듬으며 섭선을 부쳤다.
무언가 계산하는 눈치였다.
곧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광동 세족이 조금 고생하겠으나 얼추 서역과 왜국이 원하는 물량을 맞출 수 있겠구려.”
제갈노아의 말에 도진풍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반아가 왜국으로 갈 사치품 물량을 중간에서 빼돌리면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모시는 영주의 체면이 떨어져 배를 갈라 사죄해야 할 수도 있었다.
제갈노아는 주세페를 보며 말했다.
“서반아 국왕에게 남해 교역의 서역 독점권을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오. 어차피 교역은 주로 이곳 오행도에서 이루어질 테니까. 이곳 항구에 대한 출입과 독점적인 교역권을 주면 충분하겠지.”
“다행이구려.”
주세페의 말에 제갈노아는 표정을 굳혔다.
“허나 이를 위해서 서반아가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소.”
“무엇이오.”
“남해로 오는 모든 서역 국가에 대한 통제요.”
제갈노아는 섭선을 부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비율빈(필리핀) 이남 해역에 대한 통제를 서반아가 맡아줘야겠소.”
“음.”
주세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는 에스파냐 국왕의 전권 대사로서 이번 건에 한해 광범위한 협상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협상 결과를 지켜야 하는 건 필리핀 총독이다.
무리한 협상을 할 순 없었으나 제갈노아의 요구는 그의 전권 내였다.
주세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신 그쪽에서도 해줘야 할 일이 있소.”
“무엇이오.”
주세페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홀란드와 잉글랜드. 두 국가의 항구 출입을 금해주시오.”
“화란과 잉…… 영길리라. 화란이라면 이미 왜국과도 교역하고 있는 걸로 아오만.”
“지팡구의 물건이 귀하긴 하나 카타이(이 시기 유럽이 중원을 일컫는 말) 사치품에 비할 바는 아니오. 에스파냐는 카타이 사치품을 독점하면 충분하오.”
“그렇군. 헌데 왜 화란과 영길리의 항구 출입을 금해달라는 것이오.”
주세페는 이를 갈며 말했다.
“홀란드와 잉글랜드는 감히 성모교회와 로마 교황을 부정하는 이단의 무리이기 때문이오.”
“이단?”
“그렇소. 일루미나티의 마법사들이 이들 홀란드와 잉글랜드의 편을 들고 우리 익스터미나투스와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소. 이들은 에스파냐에 대항하기 위한 군자금을 마련코자 남해 무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또 해적질에 몰두하고 있소이다. 실로 무도한 자들이오.”
“…….”
장내의 모두 짜게 식은 눈으로 주세페를 보았다.
본인들도 남해에서 해적질한 주제에 남을 욕할 일인가?
그때 주세페는 힐끔 누각 구석 기둥에 등을 대고 서 있는 작고 못생긴 서역 노인을 노려봤다.
서역 노인은 움찔하더니 모른 척 눈을 돌렸다.
환신은 그 광경을 모두 보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저 노인은 누구지?’
궁금했지만 일단 회담 중이니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제갈노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듣고 보니 실로 패악무도하구려. 천주께 반하는 이단이 설치다니.”
“바로 그렇소.”
“뭐, 좋소. 화란과 영길리의 출입을 막는 것이 우리의 이익에 부합되니 그리하도록 하지. 허나 기억해 두시구려.”
제갈노아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눈동자로 주세페를 응시하며 말했다.
“서반아 국왕의 독점권은 어디까지나 그대들이 비율빈 이남 해역에 대한 패권을 유지하는 동안 주어지는 것이오. 그대들이 화란과 영길리에게 바다를 빼앗기면 독점권은 자연히 소멸하게 될 것이오.”
“흥!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장담하오!”
그렇게 광동십삼행, 절광성, 도진씨, 오행마궁, 서반아를 아우르는 남해 교역 집단.
남해 동맹이 탄생했다.
대회동이 성황리에 끝나고 모두 행복한 결과를 얻게 되자 환신이 입을 열었다.
“오행마궁에서 연회를 준비했다고 하니 연회를 즐기며 친분을 쌓도록 하지. 남해 무역에 관해 좋은 소식이 있으니 그에 대한 이야기도 해줄 생각이고. 어때?”
누구의 말이라고 감히 거역하겠는가.
모두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광영입니다, 낭왕이시여!”
바로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던 환신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어이, 거기. 슬슬 모습을 드러내지?”
장내의 모두 환신의 시선을 따라 한 인물을 보았다.
바로 도진풍구였다.
도진풍구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 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