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에 미친 무공천재 409화
170. 삼형제의 연회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
만월이 산등성이에 휘영청 걸려 있는 심야.
구화산 산기슭을 따라 누군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어깨에 술 한 동이를 멘 채 말이다.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기묘한 전포를 걸친 절세 미청년.
환신이다.
묵묵히 구화산을 오르는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구화산에서 을지효에게 주군으로 인정받았지.’
당시 환신과 을지효는 감정을 교류해 가며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던 중 녹혈루의 난이 발발하고 여러 인연이 중첩되며 진정으로 주종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을지효는 낭천의 좌군사로서 신묘한 책략으로 환신의 앞길을 밝혀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작금에 이르러 환신의 천하 경영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화산에서 을지효보다 더욱 중요한 만남이 있었지.’
바로 장강백마 철린과의 만남이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최초로 영자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피륙을 지닌 인간은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오직 원영신만이 진입할 수 있는 위대한 세계.
철린의 힘으로 환신과 을지효는 그 편린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기연이었다.
범인은 존재조차 모르는 위대한 세계에 우연찮게 발을 들인 것이 기연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기연이란 말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철린은 환신에게 의형제가 되자 제안했고 환신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 세계에 내동댕이쳐지고 얻은 또 한 명의 친인.
철린의 존재는 환신에게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천망의 한 수.
철린이 가볍게 내지른 일격을 받아내며 어마어마한 깨달음을 얻고 다시 한번 도약의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구화산은 환신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져다준 장소였다.
작금에 이르러 천하를 제압하고 무림 역사에 길이 빛난 위대한 비무행, 십전비무행에 매진하고 있었다.
환신의 일보 일보가 전설이요, 신화였다.
산기슭을 따라 한 봉우리에 다다랐다.
봉우리 위에 발을 내디디자 환신은 눈을 크게 떴다.
운무가 하염없이 흐르는 신비로운 계곡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봉우리는 형형색색의 비단으로 장식돼 있었다.
그뿐인가.
중원 제일의 가마터인 경덕진에서 생산된 도자기와 아름다운 산호, 고고한 선이 일품인 그림과 글씨가 쓰인 족자, 서역에서 넘어온 금은보화 등이 운치를 더했다.
봉우리 한쪽에 산해진미가 놓인 술상이 있었다.
술상 앞에 한 인물이 뒷짐을 진 채 운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길게 풀어 헤치고.
현대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검은 무복 위에 금실, 홍실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무늬를 수놓은 백색 전포를 걸친 남자.
린건신 삼형제 중 둘째.
등천수룡 구자건이 그곳에 있었다.
구자건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신아!”
“건 형님!”
환신은 술동이를 땅에 내려놓고 구자건을 향해 달려갔다.
둘은 서로 격하게 포옹했다.
“하하하핫! 신아! 오랜만이로구나!”
“그러게요. 그나저나 건 형님. 이게 다 뭐예요?”
“뭐긴 뭐야. 우형이 술상을 맡지 않았느냐. 제법 볼 만하지 않느냐?”
“그래도 이건 너무 으리으리한데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신이 너는 강호의 지위에 비해 너무 소박하다. 너는 천망의 초월자이자 천하 낭인의 주인인 낭천의 천주다. 작금에 이르러 제천내각조차 좌지우지하는 강호 최고의 권력자이며 제천맹의 후계를 이을 몸 아니냐. 이 정도는 충분히 즐겨도 괜찮느니라.”
“뭐, 그것도 그러네요.”
“술은 잘 챙겨왔겠지.”
“물론이죠.”
구자건이 술상을 보고, 환신이 술을 준비한다.
그런 약속이었다.
별거 아닌 약조였으나 그것이 합을 맞췄을 때 감동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환신과 구자건은 그렇게 해후의 기쁨을 즐겼다.
그때였다.
환신은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구자건 역시 환신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았다.
-챙그랑!
천공이 산산이 깨졌다.
깨진 곳에 검은 구멍이 생성되더니 입자가 쏟아졌다.
입자는 곧 무언가 형상을 갖추었으니.
-히히히히힝!
우렁찬 말 울음소리.
“하하하핫! 형제들이여! 내가 왔다!”
평범한 군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장대한 크기의 은백색 철갑마.
철갑마의 머리와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 상체가 철갑으로 뒤덮인 한 사내가 있었다.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자랑하는 은색 기병.
-차르륵!
말의 머리를 형상화한 투구를 이루는 철편이 목 아래로 내려가더니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쾌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환신과 구자건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린 형님!”
“하하하핫!”
-다그닥! 다그닥!
구마동신 철갑마왕이 허공을 밟으며 달리더니 봉우리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철린은 의형제들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그들의 어깨를 꽉 쥐었다.
“보고 싶었다! 형제들이여!”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하하하핫! 자,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구나! 바로 연회를 즐기자꾸나!”
“예!”
그렇게 린건신 삼형제는 술상으로 향했다.
구자건이 옥을 깎아 만든 잔을 내밀자 철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로 어느 세월에 목이나 축이겠느냐! 대접을 가져오너라!”
“하핫! 알겠습니다.”
구자건은 손을 씻을 때 사용하는 유기 대접을 가져왔다.
철린은 환신이 건넨 술동이를 들고 대접에 술을 콸콸 따랐다.
그는 대접을 들고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철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흠, 익숙한 맛인데.”
“……척 선배 그 양반. 묵시흔을 제압하고 고금제일의 자리에 오르면 마시겠다더니.”
“역시 척무상이 담근 죽엽청이군. 지난번 황산에서 회동했을 때 한 병 가져와 따라주더군. 제법 잘 익어서 기억에 남았느니라.”
“자기가 술 잘 잠근다고 자랑하고 싶어 아주 안달이 났네요.”
“척무상이 그러더군. 자신은 검을 잡지 않았다면 술도가를 세웠을 거라고. 고금제일의 자리에 오른 후 고향으로 돌아가 죽엽청이 아니라 아라키라는 고향의 술을 담글 것이라고 말이야.”
“으음.”
전대 맥골의 맥주인 신마검존 척준경의 후손다운 말이었다.
허나 문류후를 놔두고 고향으로 돌아갈까?
태산쟁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모를 일이다.
철린은 다시 한번 대접에 든 죽엽청을 시원하게 들이켠 후 입을 열었다.
“나 철린은 지금 참으로 기쁘다.”
환신과 구자건은 철린을 응시했다.
철린은 형제들의 눈빛을 느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고 복수행에 매진했다. 복수를 마무리 지은 후 태산쟁위만이 마음을 둘 유일한 것이었지. 허나 안식처는 될 수 없었다. 안식처란 친인의 존재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철린은 환하게 웃었다.
“나 철린에게 친인이란 오직 형제뿐이다. 형제만이 마음을 둘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내게 너희는 그런 의미다.”
“……린 형님.”
“자, 형제들이여. 술잔을 기울이자. 오늘 기울이는 이 술잔이 인생 마지막 잔인 것처럼. 술을 들이켜는 그 순간만큼은 강호의 덧없음조차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니.”
“좋습니다!”
환신과 철린, 구자건은 서로의 잔을 부딪쳤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동이를 절반 정도 비웠을 즈음 철린이 입을 열었다.
“신아.”
“예, 린 형님.”
“비무행은 어떻더냐.”
철린의 질문에 환신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뭐…… 할 만해요.”
“후훗, 장강을 달리는 와중에도 강호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건 아니다.”
-철컥! 철컥!
철갑마왕의 등 부분이 열렸다.
철린은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어? 그건?”
철린은 씨익 웃었다.
“왜. 우형은 제천순보 좀 읽으면 안 되냐? 나름 명가의 후예다.”
“그건 아니고요.”
“장강을 달리는 건 지루한 일이다. 시간 때우기엔 제천순보를 읽는 게 최고지. 여기에 너의 비무행이 자세히 나와 있더구나.”
“뭔가 부끄럽네요.”
“부끄러울 게 뭐 있느냐.”
철린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얼마나 힘든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아직 척무상, 문류후와의 싸움이 어땠는지는 알지 못하나 분명 만만치 않았겠지.”
“……린 형님.”
철린은 엄한 표정으로 환신을 보았다.
“허나 신아. 태산쟁위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흉험할 것이다.”
환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태산쟁위는 나 철린이 살면서 가장 뜨거운 순간이며, 또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아슬아슬한 순간이기도 했지. 신아. 너는 우형이 고금제일의 좌를 탐한다 생각하느냐?”
“……그럼 혹시?”
철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고금제일의 자리도 제법 끌리지만 그보다 태산쟁위 그 자체. 천간십존 사이에서 펼쳐지는 투쟁이 우형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다.”
환신은 지금이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낼 절호의 기회임을 깨달았다.
“린 형님. 그런 의미에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동맹에 관한 겁니다.”
“동맹이라…….”
철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는군. 지난 태산쟁위에서 검도창 삼두와 천절 땡중, 현월 말코가 손을 잡았지. 덕분에 우형을 비롯해 다른 자들 역시 불리한 싸움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지.”
“2대 우화접선이 제안하더군요. 삼두와 무림의 태산북두에 맞서 동맹을 맺자고요.”
철린은 피식 웃었다.
“후훗, 호선강이라. 제법이군. 신이 너를 통해 3각 동맹을 맺자는 것인가.”
“그런 거죠. 헌데 린 형님. 괜찮겠어요?”
“신아. 우린 의형제다. 애초에 우형은 적을 향해 무식하게 달려드는 것밖에 모르는 일개 기병에 불과하다. 허나 너는 다르다. 너는 군주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존귀한 위치까지 올라온 풍운아지. 우형은 신이 너의 결정은 그게 무엇이든 따를 각오다.”
“……감사합니다, 린 형님.”
“형제에게 감사하단 말 따위 할 필요 없다. 형제는 그저 형제를 도우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느냐, 건아.”
“물론입니다, 린 형님!”
이것이 진정한 형제였다.
아무 조건 없이 형제를 돕는다.
환신이 본래 살던 세계와는 달랐다.
눈앞의 형제야말로 진짜 형제요, 또 가족이다.
그때였다.
철린의 육신이 깜빡거리며 점멸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슬슬 시간이 다 되었군. 형제들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고 싶으나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구나.”
환신과 구자건은 안타까운 눈으로 철린을 바라보았다.
복수에 성공한 대가로 철린은 장강을 끝없이 달리며 미친 듯이 불어나는 내공을 소진해야 하는 천형을 앓고 있었다.
다시 달려야만 했다.
그도 아니면…… 동급의 강자와 격돌하든가.
철린은 환신을 보며 말했다.
“신아.”
“예, 린 형님.”
“우형과 손을 섞어보자꾸나.”
오늘 린건신 삼형제가 모인 이유가 그것이다.
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최대한 천천히 초수를 겨뤄보자.”
구자건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천망의 경지에 이른 두 의형제는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천령에 준하는 속도로 손을 섞을 것이다.
‘천하에 나와 같은 행운아가 또 있을까.’
형제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도달하고 말 것이다.
천망의 경지에 말이다.
환신과 철린은 천천히 봉우리 중앙으로 이동했다.
두 의형제는 서로를 응시했다.
“신아. 이곳에서 너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저도요.”
“그때 우형은 직감했다. 언젠가 우리 의형제가 이렇게 손을 섞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싫으세요?”
“그럴 리가.”
철린은 환하게 웃었다.
“복수를 완수한 이래 오늘보다 기쁜 날은 없을 것이다.”
-철컥! 철컥!
목 뒤에 있던 철편이 올라와 철린의 얼굴을 감싸며 투구로 화했다.
환신의 등 뒤로 흑염신화포에서 흑염군룡갑이 나오더니 환신의 육신을 뒤덮었다.
-철컥! 철컥!
철갑마왕의 양 옆구리에서 한 쌍의 철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린은 장대한 크기의 쌍극을 꽉 쥐었다.
환신 역시 일월쌍륜을 소환했다.
“자, 그럼 신아. 간다!”
“저도 갑니다! 린 형님!”
-히히히히힝!
철갑마왕이 크게 울었다.
환신과 철린은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그렇게 아홉 번째 비무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