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전직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곡선들로 이루어진 도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공동 안에 모셔져 있는 완갑 앞에 도달한다.
자신에게 기합을 불어넣기 위해 양 볼을 텅텅 두들기고 손을 뻗었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완갑을 들어 올려 눈앞에 둔다.
“…….”
주인공 캐릭터들에게 주어지는 유물들은 모두 안쪽에 의사를 담은 영혼들이 담겨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런 녀석들과 일종의 ‘계약’을 통해 힘을 물려받는 것이 주인공 캐릭터라면 한 번씩들 겪는 과정이지.
내가 지금 하려는 일도 그런 것이다.
문장으로만 늘어놓으면 별것 아니지만, 그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따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한다.
혼을 담을 그릇인 육신이 없어도 의식을 유지 가능한 녀석들은, 죽으면 끝이라는 기본적인 법칙조차 어그러트릴 정도로 미치도록 강한 놈들이었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동서고금을 통틀어 따라올 녀석이 없을 만큼 대단하신 녀석들이 평생을 다해 매달려도 이루지 못한 ‘숙원’이 있으면, 그 의식의 파편이 그자가 사용하던 물건에 담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설정이지.
이걸 조금 다르게 해석하면, 그 정도로 능력이 출중한데도 이루지 못한 것이 있어서 이승에 미련이 철철 남아 있는 놈들하고 영적으로 접촉하는 거거든.
개중에서 ‘차라리 이 녀석의 몸을 빼앗으면 내 숙원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같은 고약한 생각을 하는 놈들이 생기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른 직업 관련 물건과 다르게 이 녀석은 더미 데이터였던 덕분에 어떤 성향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낙관은 금물이다.
“…해 볼까.”
어쨌든 말이야.
딱히 스스로가 목숨도 초개처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어차피 내가 세워 놓은 계획에서 벗어난다면, 앞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급락한다.
눈앞이 핑핑 돌아가는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결론 덕분이었다.
심호흡하며 완갑을 팔에 착용한다.
“오?”
착용하자마자 겉 부분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이어서 완갑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빛이 가느다란 실처럼 가닥가닥 나뉘어서 몸 안쪽으로 파고들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야에 벼락이 달렸다.
“……!”
벌린 입에서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의 격통이 팔에서부터 시작해 전신을 치달린다.
살면서 정말 지랄 맞게 아파 본 적은 몇 번 있었다.
계단에서 굴러 전신 골절을 당했을 때라거나,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발에 철근 박혔을 때라거나.
나름 어렸을 때부터 험한 일은 이것저것 당해 봐서 고통엔 내성이 어느 정도 길러졌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건 진짜로 존나게 아팠다.
“……!”
의식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 사이로도 정신 안쪽에 끼어든 이물감이 느껴진다.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감각이었지만 그래도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지금 내 인격을 통째로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뽑기 운 한번 지랄 같네……!”
하필이면 문답 무용으로 사람 몸을 빼앗으려 드는 성격 파탄자가 걸릴 줄이야.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들어 올린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미리 점 찍어 두었던 스킬을 구매하기 위해 포인트 상점 창으로 들어온다.
[특성: 영매 (초급) / 가격 : 400p
영능력에 대한 제반 능력을 깨우칩니다.
※ 현재 보유 포인트: 501p]
니샤의 스킬 트리 쪽에 붙어 있는 하위 특성.
사실 내가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 특성 구매를 꺼린 이유는, 니샤의 스킬은 몇 가지를 제외하면 범용성이 극단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쪽에서는 기술을 구매하기 싫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일단은 지금 내 팔에 달라붙어서 거머리처럼 내 정신을 빨아먹으려 하는 이놈부터 제압하는 게 우선이다.
이를 득득 갈면서 그대로 구매 버튼을 주먹으로 후려친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구매한 영매 특성 덕분인지 완갑 안쪽에 있는 놈이 발하는 의사가 내 쪽으로 전달되었다.
몸을 넘기라고 말하고 있다.
위대한 대업을 이루기 위한 작은 희생으로서 내 몸을 징수해 간다, 어쩐다고 하면서.
“좆 까.”
그쪽이 뒤지고 나서도 의식이 남아 있을 만큼 대단한 양반인 건 잘 알겠는데 말이야.
내 몸에 기생하시겠다는 걸 뭘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실까.
전세라도 내셨어?
이를 득득 갈면서 몸 안을 잠식하는 하얀 빛을 몰아낸다.
영매 특성 덕분인지 이제 제대로 저항할 수 있게 된 느낌이다.
“이런 곳에서 너 같은 새끼한테 죽을 것 같냐.”
아무리 그래도 난 아직 젊어 빠진 나이다.
자기 조금 잘났다고 다짜고짜 신체 강탈하려 드는 꼰대 새끼에게 양보하기는 너무 파릇파릇한 몸 아니겠나.
반드시 살아남아서, 이 세계를 구원한 대가인지 뭔지로 평온하고 안락한 인생을 손에 넣을 테다.
그런 생각에 반응하여 다시 완갑 안쪽에서 의사가 전달됐다.
그렇게 자신만을 위한 마음가짐으로는 사람들을 지킬 수 없다는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려온다.
오직 나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 섞인 오만함도 같이.
응.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랄…….”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몸을 침식하고 있는 빛과 줄다리기를 계속한다.
이미 유물 안쪽에 남겨져 있는 의사의 파편이라는 결과가 알려 주는 사실이지만, 이 녀석은 이미 자기가 이루려던 것을 한 번 실패한 녀석이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 녀석의 숙원은 ‘누군가를 지킨다’는 명제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오히려 너니까 실패하지.”
니가 뭔데 나를 마음대로 평가하나.
뭐, 무조건 이타적으로 남을 위해 희생하는 성인군자여야지만 좋은 일을 할 수 있나?
나는 내가 평화롭고 느긋한 인생을 즐기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구할 거다.
‘좋은 사람’이라는 절대적 도덕 우위에 서서, 다른 사람한테 칭찬받으면서.
누구한테나 떳떳하게 가슴 펴고,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있도록.
가끔 속물 같은 짓을 해도 ‘저 사람이라면 고생했으니까…….’ 하는 시선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위치를 점하면 얼마나 인생이 편하게 풀릴까.
그런 면에서.
내 안락하고 평온한 미래를 위해서 이 세계를 위협하는 재앙을 치워 두는 것 정도야 해 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애초에 나 말고는 할 사람도 없을 것 같고.
세상이 망하면 인생을 즐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
요컨대, 나는 인생 날로 먹고 싶으니까.
후딱 세상 구하고 느긋하게 살 거다. 유명해져서 돈 많이 벌고 편하게 살 거다.
그러니까 이미 한 번 실패한 꼰대 새끼는 찌그러져 있으라고.
“…….”
이번에는 완갑 안에서 별다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팔에서 전해져 오는 끔찍한 통증도 살짝 약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하도 당당하게 개소리를 지껄이는 내 모습에 약간 당황한 느낌이다.
“엇챠.”
그 틈을 타서, 재빠르게 주도권을 잡아챈다.
팔을 뻗어 어깨까지 타고 올라오던 하얀 광채를 팔 끝자락으로 몰아낸다.
“…….”
고통 때문에 뚝뚝 떨어지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영매 능력… 급한 대로나마 사 두길 잘했다.
아니면 진짜로 여기서 죽었겠는데.
‘그래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네…….’
팔 끝에 복잡한 문신처럼 남아 있는 하얀색 선들을 보니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까처럼 번쩍거리지 않는 것을 보니 기세가 죽은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튼 이건 이거고.
중요한 것부터 확인해 보자.
전직이 됐는지 안 됐는지부터 봐야겠군.
[이름: 오진환
직업: 수호자 (예비)
스킬: <강체술> <궁사의 집중>
특성: <위기 감지> <영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이상한 단어가 붙어 있다.
예비?
된 거면 된 거고 안 된 거면 안 된 거지 예비는 또 뭐야?
황당함에 한동안 눈을 끔뻑거렸지만, 가만히 서서 그것에 대해 고민해 볼 여유는 없었다.
아이템의 ‘습득’ 판정을 받은 덕분에 던전이 다시 우릉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단 나가서 생각해 볼까.”
* * *
그리고 바깥에 나가 보니, 파에톤이 전력을 다해서 무너져 내린 던전의 입구를 파헤치고 있었다.
들고 있던 대검을 바닥에 푹 박아서 퍼 올리니 무슨 포클레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흙과 돌무더기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
쟨 뭐하고 있다냐?
“어이.”
“아, 몇 번을 말해! 이 안에 사람 있으니까 말리는 것 좀 그만하라고! 그럴 시간에 빨리 가서 다른 사람이나 불러……!”
“아니, 그 안에 있던 사람이 지금 너한테 말하는 건데.”
내 말에 동작을 우뚝 멈춘 파에톤이, 오랫동안 기름칠하지 않은 기계 관절을 가진 사람처럼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오진환 씨?”
“그래, 오진환 씨다.”
“…….”
담담한 내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듯한 파에톤이 잠시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이내 허탈한 웃음을 입에서 흘려보냈다.
“…어떻게 나왔어?”
“할 일을 하다 보니까 어떻게든?”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수는 없으니 그렇게 둘러대자 녀석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이 나를 쏘아보았다.
“당신… 진짜로 걱정해 주는 보람이 없는 사람이네.”
다행히 더 깊이 파고들 생각은 없었는지, 녀석이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은은한 호감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
음.
난 이 녀석한테 쌀쌀맞게 대한 것밖에 없을 텐데, 뭣 때문에 이런 눈을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뭐… 일단 나한테는 이득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굳이 더 자세하게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겠지만…….
“응?”
내가 살짝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파에톤이 뭔가를 발견해 낸 듯이 내게 접근했다.
“이거, 원래 있었던가?”
그렇게 말한 녀석이 내 팔 끄트머리에 새겨져 있는 새하얀 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아차. 이건 생각을 못 했네.
“…옛날에 한 거야. 신경 꺼.”
그렇게 말하면서 소매를 죽 내려 그 문신들을 가린다.
뭐, 아무래도 떳떳하게 밝혀 주기는 뭐하니까 이 부분은 피해 가는 편이 좋겠지.
일단 이것보다 발견되면 훨씬 곤란한 물건인 완갑은 외투로 가려 둔 상태다.
아예 해체하는 게 좋지만, 마치 내 몸에 뿌리라도 박은 것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 해서 임시방편으로 내린 조치였다.
그나마 생긴 게 얇아서 겉으로 티는 잘 안 나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겠지.
“그냥 신기해서. 당신 생긴 건 완전히 방구석 폐인처럼 생겼는데. 문신 같은걸 다 하나 싶어서 말이지.”
“…….”
이 녀석, 은근히 말에 뼈가 그득 담겨 있다.
“옛날에 한 거라… 옛날에… 흐음…….”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말 때문에.
나는 그때 녀석이 흥미가 그득그득 생긴다는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