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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속 구원자가 되었다-14화 (14/135)

14화 활약 (3)

[꽤 의외로군.]

“또 뭐가.”

허공에 떠올라 있는 상태창에 이것저것 정리하기 위해 글자를 휘갈겨 넣으며 답한다.

최근에 안 사실인데, 이거 메모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더라고.

적어 넣는 것은 지금 있는 파티 멤버들의 전체적인 직업과 기술들이다.

뭐, 솔직히 이미 머릿속으로 다 정리되어 있기는 한데. 그래도 한 번 적어 주면 정리가 더 잘되니까.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그대 같은 인간이 먼저 나서서 위험을 감수하자고 하는 건가.]

“아, 그거?”

위험… 하긴 하지.

겉으로만 본다면.

“대충 지금까지 진행하면서 그쪽 능력은 충분히 봤으니까, 일이 생기더라도 대처가 되겠다는 확신이 생겨서. 아까 보니까 내 지시 없어도 간단한 건 알아서 하시던데?”

[글쎄. 본인에 대한 신뢰가 생긴 것은 좋은 일이다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그렇겠지.

지금까지 쭉 실험을 진행해 본 결과, 수호령의 인지 범위는 내 인지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로 뭐든 자동으로 하게 내버려 두고 나는 가만히 있는 건데, 아쉽게 되었다.

일단은 내 목숨만 무조건 살릴 수 있으면 상관없지만.

“저, 오진환 헌터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김태화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접근했다.

“이제 곧 출발 시각입니다.”

“말씀드린 부분은 조율이 끝났나요?”

“네, 어떻게든 이야기가 잘 끝났습니다.”

여기 있는 인간들 전원을 살려서 나간다고 호언장담한 대신에, 김태화에게는 딱 한 가지만 약속받았다.

전원이 내가 말하는 대로 따라 줄 것.

뭐, 꽤 필수적인 부분이니까.

“…저, 출발하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쭈뼛거리면서 질문을 꺼내면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뭡니까?”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죠?”

“네?”

“확실히 제 입장에서는 이대로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편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오진환 헌터님께서 저를 도와주실 이유는…….”

음, 뭐.

다 떼어 놓고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지.

김태화는 내가 본인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다.

그러면 여기서 또 점수를 따기 괜찮은 포인트란 소리고.

“투자, 라고 하면 될까요.”

내가 꺼내 놓은 말에 김태화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대성 그룹의 후계자로 태어나셨으니, 적어도 김태화 씨가 배를 곯을 걱정은 없었을 텐데요.”

씩 웃으면서 말을 이어간다.

“그런 상황에서도 궂은일을 열심히 하시는 김태화 씨를 보니 조금 응원하고 싶어져서 말입니다. 개인적인 호의라고 생각해 주세요.”

“…….”

김태화의 표정이 조금 멍해졌다.

그러더니 곧바로 고개를 푹 숙인다.

뭐지.

내가 말한 것에서 이상한 부분이 있었나?

“저, 김태화 씨?”

“아니. 죄송해요. 별것 아닙니다.”

내 당황한 목소리에, 녀석이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눈가를 쓱쓱 문지르고 있다. 그쪽이 시큰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냥 누구한테서 이런 식으로 응원받는 것은 처음이라서요. 모두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걸 반대하기만 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민다.

이렇게 웃으니까 인제야 그 나이대의 소년처럼 보였다.

“고맙습니다.”

음.

내 말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감동을 너무 받은 모양이군.

뭐라고 대답해 줄 말도 없어서 그냥 얌전히 손을 맞잡고 흔들어 주자, 아까 전보다 쾌활해진 기색으로 헌터들에게 돌아갔다.

[그대, 이제는 저런 어린애한테도 사기를 치는 건가?]

“이번에는 딱히 사기 친 것 아닌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거든.”

저 녀석이 나중에 뿜어낼 포텐을 생각하면 오히려 헌터 일을 해 주지 않는 것이 더 곤란하다.

응원 정도야 백번이라도 해 주지.

[가치라. 그대는 그런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나.]

“어느 정도는 다 그러지 않나?”

내 대답에 수호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만은 딱히 없다만, 가끔은 구원자로서 그대의 자질이 의심되는 때가 오기는 하지.]

“걱정하지 마. 그쪽하고 한 약속은 제대로 지킬 테니까. 사람만 똑바로 구하면 되지?”

[그런 면에서 말이네, 정말로 자신 있는 건가? 저기 있는 자들을 전부 살려서 내보낸다고 하지 않았나.]

“수호령 씨, 전에 나한테 마력 하나 없는 쭉정이라 그랬었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랬었지.]

“그거 사실 반은 틀린 말이야.”

누누이 말해 왔지만, 난 이 초인들의 세계에서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이다.

특이점이라면 게임 폐인이었다는 것 정도.

그런데, 그럼 그 일반인을 굳이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라면서 납치해 버린 이 게임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이유가 있어서 그리했을 터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 보여 주기 좋은 상황 같거든.”

자.

내 마음대로 지휘할 수 있는 놈들이 생겼다. 게임 캐릭터처럼.

그리고 눈앞에는 클리어해야 할 던전이 있다. 게임 스테이지처럼.

이렇게 상황을 단순화해 내게 익숙한 환경으로 압축해 버리면.

거기서부터는 내 독무대다.

* * *

훌륭한 헌터라면 제법 보았다.

김태화 자신이 바로 내로라하는 부잣집의 아들이니, 자금력만 활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S급 헌터도 스승으로 초빙할 수 있던 덕분이었다.

확실한 점은,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어떤 헌터도 이런 식으로 던전을 공략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1번 뒤로 돌아. 거기서 5초 버티고 4번이랑 자리 교체.”

거대한 방패를 든 전위 계열 헌터 한 명이 오진환의 말에 맞춰 재빠르게 뒤로 빠져나갔다.

각종 술식을 통해 일행을 보조하던 지원 계열 헌터를 급습하려던 마수의 공격이 그에 가로막혔다.

그림자 속에서 뛰어오르던 동물 계열 마수의 표정에는 당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마치 눈앞에 느닷없이 방패가 솟아오른 것 같은 느낌이겠지.

그리고 지시대로 5초 동안 그 마수의 공격을 막아 낸 헌터는 다시 진형 안쪽으로 몸을 물렸다.

그와 동시에 성벽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창처럼, 재빠르게 그와 자리를 바꾼 다른 헌터가 곧바로 그 마수를 양단했다.

“3번, 좌측 30도로 블래스터 한 발. 2번하고 5번은 4초 동안 엄호.”

강력한 중화기로 무장한 원거리 계열 헌터가 그 지시에 따라 왼쪽에 유탄을 뿌렸다.

하마터면 전위 계열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수가 쌓일 뻔했던 마수의 무리가 일거에 저지되었다.

‘대단해……!’

김태화의 입에서 감탄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각각의 헌터에게 번호를 하나씩 붙여 자신의 지시에 따르게 만든 오진환의 지휘는 그야말로 물 샐 틈이 없었다.

자신은 전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주변을 잘 살필 수 있었기에 더욱 확실하게 나온 결론이다.

이 남자가 지금 하는 짓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이고 있어.’

그를 가르친 스승들이 모두 내로라하는 S급 헌터였기 때문에, 그는 ‘우수하다’라는 평가에 대한 기준을 확실하게 잡고 있었다.

우수한 현장 지휘관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전체적인 진형의 모양과 배치, 그리고 중요한 행동만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고작이다.

인간의 시야라는 것은 한계가 있고, 다수 대 다수로 붙는 싸움판에서 모든 정보의 흐름을 읽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헌터는 통신 채널을 통해 서로의 의사를 공유하고, 자신의 상황을 시시각각 보고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이 남자는 무엇인가.

초 단위로 상황을 분석해서 각각의 인원에게 개별적으로 떨어지는 지시는 마치 혼자서 이 공간 전체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지금 통신 채널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은 오진환의 목소리가 유일했다.

“전원 태세 정비. 사수는 무기 재장전. 서포터는 마력 흐름 점검해. 전위는 숨 좀 고르고.”

적당히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느끼자마자 칼같이 떨어지는 휴식 명령에 모든 헌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저 사기꾼이 지휘권을 잡는다는 사실에 모두가 불신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제 그를 돌아보는 눈빛에 섞여 있는 감정은 공포에 가까운 존경이었다.

반쯤 탈진 상태에 빠져 있던 헌터 몇 명만을 데리고, 고등급 마수 수십 마리가 득시글거리는 던전을 순식간에 답파해 버린 것이다.

“…저, 오진환 헌터님.”

일행 중 한 명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그에게 불만을 터트렸던 성질 급한 헌터였다.

호칭이 ‘새끼’에서 ‘헌터님’으로 바뀐 것만 보아도 얼마나 급격한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알 수 있겠지.

“그,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엉?”

그의 말에 고개를 쓱 돌린 오진환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 뭐가 미안한데?”

“헌터님이 이 정도로 능력이 있으신 분인 줄도 모르고, 제가 감히 함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실력이 있으신 분이 아무 의도도 없이 뒤에 물러나 계실 리가 없을 텐데…….”

“아니, 너희 말 맞아. 너희들 고생하는 동안 뒤에서 꿀이나 빨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숨이나 고르고 있어.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오진환의 대답에 헌터의 표정이 새파래졌다.

화가 나도 아주 단단히 나셨구나!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 것뿐이니 부디……!”

“아니, 왜 맞는 말에 수긍해 줘도…….”

탄식하는 오진환과 쩔쩔매면서 머리를 숙이는 헌터를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지만, 그 헌터가 말한 내용은 김태화로서도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짐작하건대, 흑성 랭크가 사기라는 것은 틀림없이 헛소문에 불과할 것이다.

이 지휘 실력은 현장에서 하루 이틀 굴러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생사의 갈림길 앞에 혹독하게 벼려진 헌터만이 내보일 수 있는 묘기겠지.

그렇다면 자신이 나서서 직접 정리할 수도 있을 터인데, 어째서 굳이 다른 사람을 지휘하는 모습만을 보여 주는 것일까?

‘…어라.’

가설이 제시되는 것은 빨랐고, 그것이 이해되는 과정은 훨씬 빨랐다.

부끄럽게도, 자신은 직접적인 전투의 재능은 거의 없는 사람이다.

집에서 자신의 헌터 활동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유도 그곳에서 파생된다.

유사시에 자기 몸을 지킬 수도 없는 실력으로 살수가 빗발치는 곳에 내보낼 수는 없다면서.

하지만 김태화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휘관으로나마 현장에 발을 붙이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왔다.

‘설마 나를 위해서……?’

아까 전에 저 남자는 자신을 응원한다고 했다.

전투에 아무런 재능이 없어서, 모든 길드에 거절당하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발품을 팔아 초빙해 온 스승들조차 부잣집 도련님의 별난 취미 생활 정도로 취급하던 유일한 꿈을.

‘직접, 보여 주시는 거구나.’

흑성 랭크씩이나 되는 헌터가 자신의 전투적 역량을 모를 리가 없다. 한눈에 파악하셨겠지.

그래서 그 대체안을 보여 주시는 거다.

마치 너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처럼.

이런 식이라면 너도 충분히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다는 목표를 그에게 심어 주듯이.

‘…아이, 참.’

조금 전에 응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울컥하는 감정이 다시 한번 솟구친다.

김태화는 이를 악물고 목구멍 아래에서 꿈틀대는 응어리를 집어넣었다.

이렇게나 고마우신 분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오진환 헌터님.’

이곳에서 나가면, 반드시 답례해야겠다.

김태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허공을 쏘아보고 있는 오진환에게 슬쩍 미소 지었다.

* * *

[그대여, 저 소년이 아까부터 그대를 쳐다보며 웃고 있다만.]

‘나도 알아. 무서워서 일부러 빡세게 다른 곳 쳐다보고 있어.’

뭐지?

쟨 아까부터 또 왜 저래?

혹시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 왜 진작 안 했냐고 눈치 주려고 하는건가?

원작에서의 김태화는 모두에게 냉정하고 침착한 표정만을 유지하는 인간이었다.

저렇게 히죽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솔직히 조금 소름이 돋는군.

[그나저나, 놀랍군.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대는 어떤 수행을 통해 이런 지휘 실력을 갖추게 된 거지?]

‘3만 시간의 플레이 타임.’

[…뭐라?]

‘그런 게 있어.’

설명하기도 힘든 내용이니 그대로 생략해 버린다.

그사이, 눈앞에는 던전의 출구가 거의 가까워져 있었다.

“지, 진짜 우리만으로 돌파해 낸 거야?”

“이게 무슨… 저희끼리 갔으면 B급 던전도 겨우 성공할 만한 수준 아닙니까? 방금 뚫은 코스는 암만 낮게 잡아도 A급 중에서도 상위인데?”

“이따 나가서 헌터님한테 사과 똑바로 해. 알았어?”

“아니, 욕은 형님도 같이해 놓으시고 그게 무슨…….”

신나서 자기들끼리 왁자지껄해지는 다른 헌터들과 달리,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뭐.

불행히도 아직 하나가 남아 있다.

제일 달갑지 않은 것이.

‘저, 수호령 꼰대님.’

[뭔가?]

‘제일 빡센 보호막 하나만 준비해 줄래?’

[이제 끝까지 와 놓고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니, 그러니까… 막 엄청나게 단단하지 않아도 되니까, 좀 멋있는 거로 준비해 줘. 연출이 중요하거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출구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제법 훌륭한 지휘 실력을 보여줬다고 자부한다. 좋은 인상 정도는 심어 줬겠지.

그러니까 여기서 쐐기를 박는다.

‘애 하나 제대로 후려 보자고.’

[…단어를 좀 골라 주게. 듣는 입장에서 거북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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