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구원자가 되었다-22화 (22/135)

22화 대담 (1)

“살기 싫다.”

스테이지 1을 클리어한 다음 날.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입에서 곧바로 흘러나온 첫마디였다.

퀭한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고 있자니, 어느샌가 다시 퐁! 하고 모습을 드러낸 수호령님이 머리맡에서 말을 걸어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즐거워하더니. 그대, 정신에 질환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내가 어제 자면서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비척거리는 몸짓으로 일어나며 답한다.

“다음부터는 이렇게까지 날로 먹기 힘들 것 같아서.”

[…그게 그렇게나 우울한가?]

“토할 것 같아.”

[…….]

할 말을 잃어버린 수호령님은 잠깐 내버려 두고, 상태창부터 확인한다.

[이름: 오진환

직업: 수호자 (예비), ???

스킬: <강체술> <궁사의 집중> <성흔>

특성: <위기 감지> <영매>]

일단, 이 정도만 되어도 당분간은 느닷없이 객사할 걱정이야 접어놔도 좋은 구성이다.

수호령님도 있고, 나 자체의 생존력을 도모하기 위한 기술들 위주로 사 둔 덕분에 글자만 보고 있어도 국밥 같은 든든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든든하기만 해서는 또 안 된다.

다음 스테이지부터는 국밥 뚝배기를 휘둘러서라도 싸워야 할 일이 생길 거거든.

물론 힘든 일은 다른 놈 시키고 나는 되도록 날로 먹는다는 베이스야 유지할 생각이지만, 슬슬 나까지 전투 인원으로 달라붙어야 할 만큼 난이도가 팍 뛸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미뤄 놓았던 내 스펙업을 고려해 볼 시기다.

“강해질 방법을 찾아야겠네…….”

정확히는, 공격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

[드디어 건설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가?]

“안 죽으려면 그래야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메모장을 눈앞에 가져다 둔다.

“수호령님. 우리 솔직해져 보자.”

[무슨 소리인가?]

“아무리 이름이 ‘수호자’라도 공격하는 기술이 하나도 없을 것 같지는 않거든.”

하물며 인장 보유자였다면야 남한테 피해를 줄 방법이 아예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그런 화제를 꺼내자마자 수호령님이 곧바로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지내 온 경험에서 판단하건대, 이 영혼은 남을 때리는 것 자체를 기피하려는 느낌이 강하니까.

“뭐, 내가 당장 수호령님한테 뭔가를 죽이라는 소리는 안 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어간다.

“그래도 비껴갈 수 없는 마찰이야 무조건 오니까. 거기에 대한 대비는 해 둬야지.”

[생각해 보니 이쪽에서는 할 말이 없군.]

수호령님이 씁쓸하게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다짜고짜 그대의 몸을 빼앗으려 했는데 말일세. 이제 와서는 누군가를 해치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꼴 아닌가.]

“어. 알면 됐어.”

[…….]

“그래도 지금 당장 나한테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그쪽은 별로 신경 안 써.”

[그대는 정말 실질적인 가치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군. 보고 있으면 가끔 경탄스러울 정도다.]

“이제 와서 수호령님이 언제 내 뒤통수를 갈길까 전전긍긍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거든.”

내 머릿속까지 파고들 수 있는 영혼이랑 척을 지는 것도 곤란하고.

그러니까 해 줄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똑바로 해 주면 별 불만은 없다.

대충 그런 의도를 담아 뱉은 말이었고, 수호령님도 알아들었는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내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이런 것들은 가능하네.]

그렇게 수호령님이 제시해 준 능력들을 메모장에 정리해 둔다.

1. 방어력을 공격력으로 일시적으로 치환 가능.

2. 공격을 반사하는 보호막 생성 가능.

3. 파티 구성원에게 공격력 버프 가능.

“괜찮은데?”

수호자의 본업이 자신과 남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당장 공격 관련으로 이 정도 유틸리티만 발휘할 수 있어도 만족스러운 정도다.

방어적인 성능이야 당장 스테이지 1을 클리어하면서 몸으로 직접 체감했으니까 굳이 뭔가를 더 들을 필요는 없겠고.

그 정도면 앞으로의 스테이지에서도 웬만한 공격은 전부 다 막아 낼 수 있을 수준이니까.

‘…생각해 보니까 밸런스 붕괴 아니야?’

통상적인 공격 수단을 희생하는 대가로 얻은 징그러운 수준의 방어력과, 일발 역전을 노릴 수 있는 화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평소에는 마냥 맞아야 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 방어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녀석은 제풀에 죽어 나가게 만들 공방일체의 특성도 있고.

아군을 도와줄 수 있는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버프기도 있다.

‘그냥 올라운더네.’

물론 단순히 적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나보다 다른 주인공 캐릭터들이 훨씬 좋겠지.

하지만 그놈들은 단독으로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든.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직업의 강점이 바로 정리된다.

압도적인 생존력을 기반으로 갖춰지는 범용성.

솔로 플레이도 가능하고. 다른 캐릭터와 엮여서 보조해 줄 수도 있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모든 상황에 녹아들어 1인분 이상을 항상 보장해 준다.

언제 돌발적인 위협이 닥칠지 모르는 이 게임 속 세계에서 가지기에는 최고의 직업이지.

‘거기에…….’

지금 나한테는 수호자 외에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까.

상태창의 직업란에 떠 있는 ???라는 글자를 쳐다본다.

[새 직업을 개방하려면 기적 포인트 100,000P가 필요합니다!]

일단, 이 직업부터 개방해서 무슨 능력이 있는지 확인해야 저번에 얻은 구원 포인트로 무슨 기술을 살지도 가닥이 잡힐 텐데.

최적의 효율을 뽑아내려면 각 포인트를 잘 배분해서 기술을 조합해야 하니까.

“보자…….”

기적 포인트는 아무래도 여기저기에 얼굴이 팔릴수록 벌 기회가 많아진다.

현재의 수급 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그래도 10만이 모일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도 힘들다.

이 쓰레기 게임은 기본적으로 지뢰밭이라 언제 어디서 위기 상황이 훅 들어올지 모르거든.

마침 저번 게이트 사태에서 그럭저럭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 줬으니, 그걸 바탕으로 뭔가 행동할 여지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좀 물어봐야겠네.”

그리고 마침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이미지를 뿌리는 일이라면 정통한 녀석이 주변에 있다.

파에톤의 연락처를 찾기 위해 핸드폰을 꺼낸다.

[진환이 친누나♡]

“…….”

난 이딴 이름으로 저장한 적 없는데.

언제 장난질을 쳤는지 모르겠군.

정상적으로 수정해 둔 다음에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파에톤의 쾌활한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오진환 씨? 무슨 일이야? 일단 축하해!]

“…뭘 축하해?”

느닷없이 그런 소리를 해 봐야 불안해지기만 하는데.

[어? 시치미 떼는 거야?]

“그러니까 무슨 얘기 하냐고.”

[헌터넷에도 뜨고 각 길드 소식통에도 다 퍼졌어. 지금 난리도 아닌데.]

헌터넷이라고 한다면… 협회에서 제공하는 헌터 전용 네트워크를 말하는 거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컴퓨터에 전원을 넣는다.

“왜? 뭐가 퍼졌는데?”

[…슬슬 좀 이상한데. 오진환 씨, 협회에서 아무런 말도 못 들었어?]

아니, 설명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러니까 대체 뭔 얘기…….”

그리고 헌터넷에 접속하자마자, 나는 설명을 요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내 사진이 있었으니까.

[흑성 랭크 헌터 오진환, 최초로 발견된 SS급 던전의 탐사대 리더로서 발탁!]

그런 문구가 아래에 붙어 있는 상태로.

* * *

긍정적인 부분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기적 포인트 수급원을 만들어 낼 수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있다.

당장 이 돌발 뉴스 덕분에 안 그래도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던 내 이름은 그야말로 모르는 게 간첩 수준이 됐으니까.

이 이목을 좋은 쪽으로 돌릴 수만 있으면 폭발적인 포인트로 그대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부정적인 부분을 생각해 보면.

“협박당하고 있는 거야.”

집 앞 벤치에 앉아 대로변을 쏘아보며 그렇게 말한다.

[협박?]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그런 자리에 앉혀 버리는 지랄도 지랄인데.”

핸드폰을 꺼내 뉴스란을 죽 스크롤 하면서 내려간다.

최초로 발견된 SS급 던전에 내가 발탁되었다는 소식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문제는, 그 모든 기사 중 나에게 우호적인 논조로 작성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저번 EX급 게이트 사태에서 내가 활약한 건 아예 언급도 안 되고 있어.”

말할 것도 없이, 이건 협회 측에서 주도하고 있는 정보 통제다.

자기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내 목줄을 틀어쥘 수 있는 집단이라고 과시하는 셈이다.

“인장만 보러오기는 개뿔…….”

어제 키건이 방문했던 것을 떠올린다.

분명히 협회 수뇌부 쪽에서 뭔가 언질이 있었으니 내 쪽을 한번 살피러 찾아온 것일 테다.

[대체 그런 짓을 왜 하는 것이더냐?]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안 보는 놈이라서.”

대로변 너머에서 검은 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몇 명을 제외하고는 다 짐승 새끼들 취급이라, 그런 놈들은 약점을 잡아야지만 이야기가 통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거든.”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라는 놈은 항상 그런 놈이었다.

독선적이고, 오만하고, 자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간을 장기짝으로 취급하는 놈. 뱀과 같은 인간.

“더 짜증 나는 건, 그런데도 그놈한테 대들 수 있는 인간이 얼마 없어.”

헌터 협회라는 세계구급 집단의 정점이라는 것은, 대놓고 패악질을 저질러도 밤길을 조심하지 않아도 될 만한 유수의 권력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런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다.

“…….”

내 앞에 부드럽게 주차하는 차를 노려본다.

이내 운전석이 열리더니 안쪽에서 장신의 여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색 장갑과 짝을 갖춰 입은 고급 수트와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혹시 오진환 씨 되십니까?”

흑발, 적안, 허리춤에 꽂혀 있는 세검.

내 주변에 있는 누군가와 아주 닮은 특징들이다.

피식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윤봄 씨.”

그래.

이 사람이 윤겨울의 언니 되는 사람이다.

당장은 협회장의 호위역… 정도로 일하고 있지. 사정이 있어서.

상대방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 그녀에게 고개만 까닥여서 인사해 주고, 망설임 없이 뒷좌석에 탑승한다.

앞좌석과 뒷좌석은 차단막으로 인해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지만, 적어도 건너편에 누가 있다는 실루엣 정도는 확인 가능했다.

“계속 궁금했는데.”

앞좌석에서 웃음기 섞인 문장이 들려왔다.

“너 혹시 미래라도 볼 수 있는 거야?”

심하게 변조되어 성별이나 나이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뒤틀린 목소리다.

편집증 환자 아니랄까 봐, 별의별 조치를 다 해 놓는군.

그래.

만나서 반가워요, 협회장님.

솔직히 그렇게 반갑지는 않지만.

“…….”

침묵을 지키는 사이, 정신을 차린 윤봄이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운전석의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한다.

“나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마치 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마중을 나와 있고. 우리 봄이 이름도 알고 있고.”

“…….”

“당신, 정체가 뭐야?”

“…….”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팔다리 하나씩 자른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눈앞이 붉게 물든다.

위기 감지 특성이 발동된 것이다.

내가 계속 조용히 있으면 진심으로 말한 것을 실천할 생각이다.

하여간.

게임 안에서 내내 구경했던 지랄병은 직접 보니까 두 배로 더 짜증 나는군.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이 녀석 기준으로는 꽤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겠지.

원래대로면 저렇게 경고하기 전에 이미 잘라 놓고 대화를 이어갈 녀석이거든.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한다.

“야.”

“…야?”

헛웃음이 섞인 대답이 차단막 너머에서 돌아왔다.

“한 번은 봐줄게. 모를 수도 있으니까. 다음번에도 그딴 식으로 부르면, 당신 죽일 거야.”

스산한 기운이 담긴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돌아왔지만.

“야.”

무시한다. 알 바도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한테 다짜고짜 협박하면서 접근하는 놈한테 유하게 대해 줄 이유가 없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현재 상황과 내가 알고 있는 원작의 지식을 결합한다면, 아주 간단한 결론이 도출된다.

“사람한테 부탁하는 태도가 글러 먹었잖아, 병신 꼰대 새끼야.”

상대가 협회장이건 뭐건 간에.

내가 숙이고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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