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대담 (2)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것같이 위태위태한 분위기는 그 정적 사이로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이어질 상황이야 뻔하지.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수호령에게 미리 지시해 둔다.
‘두꺼운 거로 좀 부탁합니다!’
[뭐라?]
그리고 수호령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나도 곧바로 채비를 갖추었다.
성흔 발동, 강체술 발동, 궁사의 집중 발동.
“봄아.”
차단막 건너편에서 협회장이 윤봄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같이 수호령을 호출한다.
‘지금!’
그리고 내 앞쪽으로 두터운 막이 생겨나는 것과 동시에, 협회장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쟤 팔 한쪽만 썰어 줄래?”
“예.”
윤봄의 대답은 고저 없이 평탄했지만, 이어진 상황은 그런 느낌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위기 감지로 인해 시야가 붉어지고.
소리와 동작 아무것도 없이, 대응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 초신속의 참격이 날아왔다.
내가 미리 수호령에게 지시를 내려 두지 않았다면 그대로 당했을 것이다.
……!
두 마력적 기운이 폭발적으로 충돌했다.
차 안쪽에 있는 마감재들이 이 격돌의 여파로 모조리 너덜너덜해지는 것이 눈으로 관찰될 정도였다.
[무슨……!]
융단 폭격을 막아 낼 때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던 수호령님의 신음 섞인 경악성도 같이 들려왔다.
뭐, 그도 그럴 게.
상대방이 윤봄이다.
나 같은 흑성 랭크도 아무렇지도 않게 협박할 생각부터 하는 협회장이 호위 역으로 데리고 다니는 인간.
지금까지의 등장인물 중에서 종합 전투력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그럭저럭 최강 반열에 들어가지 않을까.
[매개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행한 마력의 운용만으로 이 정도 위력을 냈군. 내가 살았던 시대라면 달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경지다.]
걱정하지 마. 현대 기준으로도 쟤 따라갈 인간은 별로 없어.
하지만, 뭐.
중요한 것은 어찌 되었건 방금 공격을 막았다는 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수단을 총동원해서 상대방의 평타 한 대를 막은 격이지만.
당장 양자 간의 스펙 차이를 고려해 보면 오히려 내 쪽이 사기를 쳤다고 봐도 좋은 상황이겠지.
수호령님 만만세다.
“……!”
실제로 차단막 너머로 협회장과 윤봄 모두 놀란 기색이 전해져 온다.
둘 다 내가 이런 식으로 공격을 방어할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도 그 정도 실력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적당히 이죽거리기 좋은 타이밍이라는 의미다.
“너 말이야. 사람 이딴 식으로 다루면 언젠가는 큰코다친다?”
“…입은 살았군.”
여전히 험악한 기색으로 대답이 돌아오지만, 그 목소리에는 아까 전과 같은 여유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솔직히 윤봄이 진심으로 나를 썰어 버릴 생각을 한다면 이쪽도 대처할 방법이 없지만, 애초에 저 녀석도 나를 진심으로 죽일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거야.
“내가 너무 탐나서 침 발라 놓고 싶었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
앞뒤 다 자르고 직설적으로 꺼내든 말에 협회장이 잠시 침묵했다.
뭐.
정곡이거든.
사실 약간의 배경지식과 이 녀석의 성향만 알면 쉽게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다.
강력한 집단의 지도층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반드시 개판이 나게 되어 있다.
지금 협회 꼭대기는 아귀들의 각축장이라서 말이야.
협회의 수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 녀석이 가장 강력한 권력자인 것은 맞지만, 그걸 끌어내리기 위해 대립하는 세력도 만만찮다.
“그냥 시킬 일만 적당히 의뢰했으면 나도 들어줄 생각 있었는데? 애초에 그쪽은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입장 아니야?”
스테이지 1이 본래의 결과대로 흘러가서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다면 협회장의 입지가 많이 약화되었을 것이다.
반대 세력에게는 그것만큼 물어뜯기 좋은 구실이 없었을 테니 말이야.
그런데 내가 그걸 막았으니, 이 녀석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행운이 따로 없었겠지.
난데없이 튀어나온 헌터 한 놈이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 준 셈이다.
그것도 피해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기적 같은 결과로.
자.
아직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았지만, 실력은 확실하게 증명된 헌터가 있다.
언제나 자신을 물어뜯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녀석들이 널린 상황에서, 이런 인재에 눈독을 들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말이 많군, 송사리가.”
그런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성깔 부리기는.
뭐든 다른 사람한테 시키는 걸 훨씬 좋아하는 주제에, 직접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도 나한테 관심이 너무너무 많아서인 것이 분명한데 말이야.
“여기서 끝장 한번 볼까? 송사리인지 아닌지?”
그렇다면 배에 힘을 꽉 주고, 더욱 이빨을 열심히 까 줄 타이밍이다.
이 녀석 특성상 주도권을 뺏기면 앞으로도 계속 피곤해질 것이 분명하니까.
“…….”
거봐. 대놓고 세게 나가니까 저쪽도 조용해지잖아.
속으로 피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방금 윤봄의 일격을 막은 것이 굉장히 유효하게 먹히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이쪽은 방금 그게 있는 밑천을 전부 긁어낸 것이지만, 상대방이 그것까지 알 방법은 없으니까.
뭐, 하지만 너무 성질을 긁어 대도 좋지 않은 판단이다. 만약 너무 자극했다가 진짜로 윤봄한테 내 목을 날리라고 했다간 큰일 나거든.
슬슬 입질을 줄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내가 말하는 조건만 들어주면 그쪽이랑 일해 준다.”
“네까짓 게 조건을 제시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면, 여기까지만 얘기하자고. 나도 이것 하나 못 들어주는 인간들이랑은 같이 뭘 해 볼 생각 없어.”
“…….”
이가 으득, 하고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이상 뭔가를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이야기 자체야 들을 생각이 있는 모양이지.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협회장이 입을 열었다.
“…지껄여 봐.”
노기가 들끓는 목소리다.
그래도 얘기는 진척이 되는군.
나도 생각해 두었던 조건들을 제시한다.
이것만 들어주면 같이 일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애초에 스테이지 1을 깔끔하게 클리어한 목적 중에는 이 녀석의 입지를 지켜서 협회가 개판이 나지 않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물론 이 협회장이라는 놈도 성깔 끝내주기는 하는데, 그나마 손익 계산이라도 철저한 이 녀석과 달리 반反협회장파에 속하는 녀석들은 아예 대화도 안 통하는 미친놈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녀석은 필요악인 셈이지.
당장은 말이야.
나중 가면 결국 얘도 치워서 없애야겠지만.
“…….”
내 조건을 들은 협회장이 잠시 침묵했다.
어라. 그래도 여기서 뭔가 더 설전이 오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고분고분하다.
“너.”
이내 협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기색이 듬뿍 담겨 있었다.
“겨우 그것만 요구하는 거야?”
“…….”
아니,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빡빡하기 짝이 없는 것들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겨우 그것밖에 안 되냐고 돌려주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없어진다.
그래. 잘나셨어, 아주.
“됐어. 네가 이쪽에 협력한다면 그 정도는 별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한 협회장이 한숨을 내쉬며 윤봄에게 손짓했다.
차가 부드럽게 정차하고, 이내 운전석에서 내린 윤봄이 뒷좌석의 문을 바깥에서 열어 주었다.
“꺼져. 호출할 일이 있으면 내 쪽에서 연락하지.”
끝까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말투다.
아마 내 쪽에서 내건 제안을 바로 수락하는 것을 보면 저쪽도 어지간히 나를 붙잡는 것에 몸이 달아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래도 저 태도는 버리지를 못하는구먼.
“…….”
차에서 내리면서 윤봄과 눈을 마주친다.
여전히 감정 하나 읽기 힘들 정도로 평면적인 얼굴이다.
글쎄.
‘원래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안쓰러울 정도다.
“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윤봄을 쳐다보고 있자니, 상대방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이내 다시 조용해지긴 했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겨울이는 잘 지내요.”
그러니까 물어보려던 것을 내가 대신 대답해 준다.
협회장은 듣지 못하게.
그녀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만 바꿔서 알려 준다.
“…….”
눈을 동그랗게 뜬 윤봄이 한동안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내 은은한 미소가 녀석의 입가에 번져 나간다.
[‘윤봄’의 기적 포인트 수급량이 증가합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에 나도 피식 웃는다.
역시.
딱 생각하던 대로의 사람이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윤봄이, 나와 마찬가지로 입만 움직여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까는 미안해요. 정말로요.”
아.
팔 자르려고 했던 것 얘기하는 건가.
그런데 어차피 당신, 협회장이 자살하라고 하면 자기 목도 그어야 하는 사람이잖아.
애초에 진짜 죽일 생각도 없지 않았어?
다시 입만 뻥긋거려서 말을 전한다.
“괜찮아요.”
“…….”
아무렇지도 않게 사과를 받아 주는 내 모습에 윤봄이 다시 눈을 크게 떴다.
희미한 미소가 조금 더 확실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살펴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윤봄에게 마주 고개를 숙여 주며, 지나쳐 걸어간다.
그리고 내 뒤로 협회장이 윤봄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봄아.”
“예.”
“왜 저런 놈 하나 똑바로 처리 못 하는거야?
“죄송…….”
격렬하게 따귀를 올려붙이는 소리.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던 나도 움찔할 정도로 날카로운 타격음이다.
“내가 이러려고 너 데리고 다니는 것 아니잖아. 그치, 봄아.”
“죄송합…….”
다시 타격음.
그런 식으로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
그래, 뭐.
지금은 그렇게 살라고.
협회장님.
조만간 아주 지옥까지 끌어내려 줄 테니까.
윤봄 쪽을 슬쩍 돌아보며, 나는 자리를 벗어났다.
* * *
사실 SS급 던전이라고 해 봐야 메인이벤트 급으로 난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스테이지 중간중간에 쉬어 가는 사이드 퀘스트급이라고 생각하면 딱 알맞지.
아마 협회장이 나를 느닷없이 SS급 탐사대의 리더로 앉힌 것도, 현재 확실하게 관측된 사태 중에서 그나마 난도가 낮아서 그런 것일 테다.
여기서 잘하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불러서 일을 던져 댈 생각이겠고.
[그러면 더더욱 이 일을 맡을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그놈 성깔만 보면 그런데, 당장은 이해관계가 일치하거든.”
협회장은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최대한 얌전하고 효율적으로 잠재우길 원한다.
나는 뭐가 어찌 되었건 사람들을 구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지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난 협회장에게 흡족할 만한 수준의 결과를, 협회장은 나에게 그 결과를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
당장은 윈-윈이라 그거지.
머지 않아 내가 그놈 끌어내려서 나만 승자인 관계로 바꿔 놓겠지만.
아마 이번 던전 탐색 역시 그 과정의 일환이 될 것이다.
“거기에 그 자리를 넙죽 받은 건 다른 이유도 있고.”
[다른 이유?]
“연습해 보기 딱 좋아서.”
계속해서 스스로 주지시켜 온 사실이지만, 앞으로의 이벤트는 난도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아무리 효율성을 따져서 작업을 진행한다 해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달라붙지 않으면 이겨 내기가 힘들단 얘기지.
그런 면에서 내가 연습해 보려고 하는 건.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다대다 전투. 앞으로는 무조건 해야 하거든.”
물론 파티원들은 주인공 캐릭터들로 구성원을 짜야겠지.
당장 앞으로의 성장 퍼텐셜이 어마어마한 녀석들을 내버려 두고 다른 녀석들을 고를 이유가 없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제일 영입하기 쉬운 녀석은…….”
말을 멈추며 간판을 올려다본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을 것 같은 흔한 할인 마트다.
글쎄.
일단 협회 쪽에다가 현재 위치를 찾아 달라고 했는데, 하필이면 이런 곳이 나오네.
안쪽을 쓱 들여다보니 찾는 얼굴이 보인다.
윤겨울.
[저 처자가 가장 쉬울 거라고?]
“일단 언니 쪽 관련해서 살짝만 꼬셔도 넘어오기 쉬우니까. 거기에…….”
[거기에?]
“쟤 거지야. 돈 문제로 고생 심하게 할걸.”
[…그건 나름 확실한 이유군.]
실제로 먹고사는 문제 그 자체에 직면해 있는지, 지금도 식품 판매대에서 뭔가를 열심히 기웃거리고 있다.
[저 처자는 뭘 하고 있는 건가?]
“아마 인스턴트 도시락 찾는 중일걸.”
[인스턴트?]
“기계 안에 넣고 버튼 두 개만 눌러서 돌려 먹는 거 있어. 쟤가 할 줄 아는 요리는 그게 전부라서.”
[…….]
내가 꺼내 놓은 처참한 생활력의 편린에 수호령님이 입을 다문 사이, 근처를 열심히 뒤지고 다니던 윤겨울의 표정이 환해졌다.
유통기한이 끝나기 직전이라 반값 에누리 중인 도시락들을 찾은 것이다.
이내 턱에 손을 짚고 끙끙거리면서 고민한다. 이것저것 다 마음에 드는 메뉴라 결정을 하기 힘든 모양이다.
“잠시만요~.”
그 녀석이 그런 짓을 하는 사이 다른 손님이 윤겨울의 뒤에서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윤겨울의 몸이 반사적으로 옆으로 비켜 나갔다. 깜짝 놀라면서도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반응이었다.
“어, 혹시 이것들 사 가실 건가요?”
그 손님이 이어서 윤겨울이 방금 고르고 있던 도시락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순간적으로 윤겨울의 표정으로 격렬한 고민의 흔적이 지나갔다.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있을 생각들이야 뻔하다.
내가 미리 골라 둔 건데. 나 배도 많이 고픈데. 반값 세일하는 거 아니면 돈 없어서 한 개밖에 못 먹는데…….
하지만 바깥으로 튀어나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아, 아니에요. 가져가셔도 괜찮아요.”
“그래요?”
그 대답을 들은 손님은 곧바로 모든 도시락을 자신의 품에 안아 들었다.
지체 없이 계산대로 향하는 걸음걸이가 굉장히 경쾌하다.
“아, 저기…….”
그리고 그 모습에 윤겨울이 순식간에 쭈글쭈글해졌다.
애처롭게 그 손님의 뒤통수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그래도 몇 개 정도는 남겨 주지… 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다.
“…됐어. 하나만 먹지 뭐.”
그렇게 툴툴거리면서 몸을 돌리던 윤겨울이 마침내 뭔가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차마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광경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내 모습을.
“…….”
글쎄.
사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는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그걸 직접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너, 너, 거, 거기서, 뭐, ㅁ…….”
“밥 사 줄 테니까 따라와라.”
세상 사람들.
이런 애도 흑성 랭크인지 뭔지를 한답니다.
모두 희망을 잃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