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계획
[EX급 게이트 사태의 영웅, 오진환 단독 보도!]
[모두에게 멸시당했지만, 모두를 구한 남자, 그는 누구인가?]
“…두 번째 기사 쓴 놈은 무슨 술 빨고 새벽에 썼나?”
각 소식지에 박혀 있는 헤드라인들을 쭉 훑어 내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물어뜯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언론들이, 이제는 거의 호들갑에 가까운 단어들을 남발하며 내 이름을 띄워 주고 있었다.
이것도 협회장과 거래를 하면서 내건 조건 중 하나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싹 걷어 낼 이미지 메이킹.
생업으로 펜대를 굴리는 놈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적으로 돌렸을 때 엄청나게 짜증 나는 놈들이다. 아군일 때는 반대급부로 엄청나게 유용하고.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태도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거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느낌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흠.”
그리고 세상에는 이렇게 뻔한 언론 플레이에도 생각보다 잘 속아 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실제로 부풀려서 포장할 만한 실적이 있기도 하니까 이런 짓도 가능한 거지만.
기적 포인트 수급량 확인을 위해 열어 본 상태창에서는 그 결과가 직관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메인 캐릭터 외에 이름도 모를 엑스트라들의 호의가 쌓이고 쌓여서 모인 포인트의 양이 꽤 어마어마하다.
뭐, 일단은 이 정도면 새 직업을 열기에 충분하다.
[현재 포인트를 정산하실 경우 7일 동안 재정산이 불가능합니다. 현재까지 수급된 포인트를 정산하시겠습니까? Y/N]
망설임 없이 Y를 누르고, 내 상태창으로 돌아온다.
[새 직업을 개방 가능합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Y/N]
여기서도 곧바로 Y를 터치.
이내 창이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더니 내 직업란에 새로운 글자를 새겨 넣었다.
[새 직업 ‘구원자’가 개방되었습니다!]
“…….”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은근히 작명을 대충한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생기는 불만 속에서,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창을 조작한다.
이 ‘구원자’라는 직업은 지금까지 내가 마주쳐 온 것 중 유일하게 티끌만큼도 정보가 없는 요소거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눈앞에 늘어지는 정보들을 읽어 내린다.
[직업 ‘구원자’는 특성과 스킬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적 포인트를 통해 ‘기적’을 구매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일회성으로 사용 가능한 대신 강력한 효과를 자랑합니다!]
아하.
일정 기간마다 포인트를 계속해서 수급 가능한 페널티로 능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모양이다.
대신 대놓고 ‘강력한 효과’라고 적혀 있는 것은 눈에 띄는군.
구원자의 길 고인물로서 말하는 건데, 이 게임에서 ‘강력하다’라는 말로 수식되는 기술은 그리 흔하지 않거든.
강력하다는 건, 진짜로 다른 기술에 비해 환장할 정도로 세다는 소리다.
‘그래서 그런가, 개수도 얼마 없고.’
초급, 중급, 고급으로 간단히 분류된 기적의 목록을 쭉 훑는다.
아무래도 막 기술을 해금해서 그런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초급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중급과 고급은 더 많은 기적 포인트를 쏟아부어서 해금하란 소리겠지.
지금 남아 있는 포인트로 사용할 수 있는 건…….
‘불의 심판?’
기적이라며.
이름이 제법 흉흉하다.
기술 아이콘에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쏟아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니,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기는 하네.
“마음에 드네.”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는 직접 시험해 봐야겠지만.
시스템에서 대놓고 강력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절대 못 써먹을 수준은 아닐 거고.
쓸 때마다 기적 포인트를 잡아먹는다는 제한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수호자 직업 덕분에 우월한 생존력을 가진 내게 주도적으로 적을 때릴 수 있는 공격기가 생겼다는 것만 해도 큰 수확이다.
“흐음…….”
일단 공격기가 생겼으니까, 구원 포인트는 조금 아껴 둘까.
20만씩이나 있으니, 다른 캐릭터의 고급 기술 2~3개를 상황에 맞춰 유동적으로 찍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사람이 보험 하나 정도는 항상 들고 있어야지.
-♬
그리고 계속해서 창을 조작하며 계획을 세우는 동안,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에서 착신음이 울려 퍼졌다.
파에톤이군.
“여보세요?”
[어, 오진환 씨? 일단 말한 곳으로 전부 모이긴 했는데?]
오.
그래도 어떻게 다들 순탄하게 모이긴 했나 보군.
하나같이 자기 색이 강렬한 놈들이라, 한 번에 제대로 모일지 걱정이었는데.
“알았어. 나도 금방 갈게.”
* * *
헌터의 랭크는 등급이 높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그 등용문이 좁아진다.
사실상 헌터 지망생이나 다름없는 C급이나 D급은 그렇다 치지만.
헌터 중 한 사람 몫으로 취급받는 B급 이상부터야 어떤 자리에 나가도 눈에 못 띌 일은 없을 만한 희소성을 가진다.
A급이나 S급부터는 거의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구름 위의 인간 취급이겠지.
그렇다면.
흑성급 5명이 조그마한 강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사태는, 그야말로 희귀함 그 자체일 것이다.
강당 안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한 놈 한 놈을 시선에 담아둔다.
키건, 니샤, 파에톤, 윤겨울.
그리고 나.
로키가 없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그 녀석 성격을 고려하면 지금 같은 자리에선 빼는 편이 낫다.
언젠가는 마주치게 되겠지만.
“…….”
그러고 보니 맨 처음 헌터 협회에서 이 녀석들을 한꺼번에 봤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그때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 A 정도의 인식이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아- 그러니까.”
그도 그럴 게.
“일단 이번 SS급 던전 탐사대 OT에 참석하신 여러분들. 모두 반갑습니다.”
난 지금 이 녀석들을 ‘지휘’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으니까.
내가 헛기침을 하면서 그렇게 말을 꺼내 놓자, 파에톤이 피식 웃으면서 딴지를 걸었다.
“뭐야. 오진환 씨, 이제 와서 격식 차리는 거야?”
“…….”
그래.
내가 언제부터 이런 일에 신경 썼다고 존댓말이냐.
머리를 벅벅 긁으며 천장에 붙어 있는 빔 프로젝터를 작동시킨다.
등 뒤쪽으로 내가 작성해 온 PPT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말을 이어 간다.
“단 이 자리에 모였다는 건, 다들 참여할 생각이 있다는 거로 간주해도 되겠지?”
사전에 포섭해 둔 윤겨울은 그렇다 치고, 혹시라도 다른 놈들이 나중에 가서 딴소리하면 곤란하니까 미리 확인해 둔다.
특히 저놈은 말이야.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키건을 슬쩍 바라본다.
협회장한테 내건 또 다른 조건 중 하나다.
이번 탐사대에 무조건 키건을 참여시켜 줄 것.
일단 이 녀석, 협회장이랑 계약으로 묶인 관계라서 그런 식으로라도 참여시키는 게 가능하긴 하다.
“나는 불만 없어~.”
[이 아이도 알겠다고 하네요.]
각각 파에톤과 미네르바로부터 돌아온 대답이다.
윤겨울은 어차피 올 것 확실하니까 생략.
“…….
하지만 키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미묘한 미소만 짓고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쪽은?”
일부러 콕 집어서 질문까지 던졌는데도 어깨만 으쓱하고 만다.
“다 듣고 나서 생각해도 되나?”
“…….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상관은 없는데.”
한 틈을 끊어 두고 강조하듯이 문장을 이어 준다.
“다 듣고 나면 어차피 거절 못 할걸.”
내 말을 들은 키건의 입꼬리도 위로 말려 올라갔다.
“꽤 재미있는 내용을 준비했나 봐?”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 정도지.”
“좋아. 일단 보여 달라고.”
그럼 분부대로.
미리 가져온 레이저 포인터로 PPT의 슬라이드를 넘긴다.
심플하기 짝이 없는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내용물이 쓱 튀어나왔다.
“…오진환 씨, 직접 만든 거야?”
“직접 만든 건데.”
“으응… 그렇구나… 어…….”
파에톤이 표정을 씰룩거리면서 볼을 긁적거렸다.
분명히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입 바깥으로 꺼내 놓기는 곤란한 기색이다.
직접적인 반응은 윤겨울한테서 튀어나왔다.
“진짜 쓰레기같이 못 만들었다…….”
“…….”
그래.
나 학교도 못 다녀본 인간이라 이런 거 만져 볼 기회도 없었다.
잘 나셨어요, 아주.
속으로 툴툴거리면서 입을 연다.
“일단 일정부터 고지하자면, 이번에 진행될 프로젝트는 총 4일에 걸쳐 이루어질 예정이야.”
“어? 4일?”
파에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던전 탐사라고 하면… 진입 전에 안쪽 구조 분석하고, 근처에 간이 숙영지 만들고, 물자 징발하고 별의별 것 다 해야 하잖아? 그걸 4일 만에 하겠다고?”
새로 발견된 던전은 기본적으로 안쪽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이 녀석이 말하는 과정을 전부 거쳐 안전하게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처음으로 들어가는 놈들이 ‘토벌대’가 아니라 ‘탐사대’라고 명명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지.
안에 있는 것들을 청소하는 게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니까 말이야.
“일반적인 탐사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그딴 짓을 할 이유가 없다.
“일단 지휘관이 나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같이 들어가는 멤버가 너희들이면.”
앞에 있는 놈들을 쭉 한 놈씩 짚어 준다.
“탐사가 아니라 아예 단번에 토벌해도 문제가 없지. 안 그러냐?”
“…….”
잠깐 정적이 돌았다.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파에톤이 입을 다시 열었다.
“오진환 씨, 혹시 무슨 자살 충동 같은 거 평소에 느끼거나, 막 그래?”
“너무하네 진짜.”
뭐.
사실 미친 소리가 맞긴 하지만.
단순 탐사가 아니라 토벌이라고 한다면 안쪽에 있는 것들을 싹 쓸어 놓는 것을 말하는 거니까.
SS급 던전을 토벌한다고 하면 숫자를 천 단위로 세야 하는 인력이 우르르 달라붙어야 할 대형 사업이다.
아무리 흑성이라지만 기껏해야 5명으로 할 만한 일은 아니라 그거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누구?
“나 EX급 게이트도 혼자 처리한 인간인데?”
“…….”
과연 이 말에는 반박할 수가 없었는지, 파에톤도 입을 다물었다.
게이트는 던전에 비해 동 등급이라도 실제 토벌 난이도가 더 높거든.
차원종은 던전 속의 마수보다 일반적으로 더 강력한 편이니까.
그리고 EX급 게이트를 거의 혼자서 정리하다시피 한 내가 SS급 던전 토벌에 애를 먹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론상으로는.
“그때는 화력을 마음대로 끌어다 쓸 수 있으니까 가능한 것 아니었어?”
키건이 손을 쓱 들면서 그렇게 질문했다.
정론이지만, 그렇다고 정답은 아니다.
“던전 토벌에는 그때처럼 무지막지한 화력이 필요하진 않아.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의 능력만 효율적으로 적재적소에 꽂아 넣을 수만 있으면 되지.”
“뭐, 그래. 다 그렇다 치는데. 그래도 4일 만에 SS급 던전을 전부 청소할 수 있다고?”
“무슨 소리야. 토벌 자체는 3일 안에 끝낼 건데.”
“…….”
이번에는 키건도 할 말을 잃어버린 표정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니샤가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그래, 니샤. 질문 있어?”
“그럼… 나머지 하루는, 뭐, 하는 거야?”
3일 만에 토벌하는 것 자체보다는 하루가 빈다는 사실이 더 궁금한 모양이다.
어린애답다면 어린애다운 엉뚱한 포인트군.
“그래, 오진환 씨. 설마 뒤풀이하자고 하루 더 끼워 넣은 건 아닐 것 아니야.”
파에톤이 이젠 거의 체념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첨언했다.
글쎄.
“사실 마지막 날이 본게임이야. 앞에 3일 동안의 던전 토벌은 그냥 우리끼리 합 맞추는 거 연습이고.”
“…연습? 대체 마지막 날에 뭘 하는데?”
윤겨울의 질문을 들으며 키건을 쓱 쳐다본다.
음.
여기서부터가 아까 말한 재미있는 부분이다.
슬라이드를 다음 장으로 넘긴다.
건물 사진과 조직도가 화면에 떠올랐다.
“응?”
윤겨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터 협회 서울 지부잖아?”
“그렇지. 오른쪽에 나와 있는 건 협회 간부들 조직도야.”
말하기 전에 씩 웃으면서 눈앞의 녀석들을 한 명씩 훑어본다.
계획도 머릿속으로 다시 재점검한다.
뭐.
좋아.
지르자고.
“대충 우리가 던전 토벌을 끝내고 나올 때쯤이면.”
왼쪽에 나와 있는 건물 사진을 포인터로 가리킨다.
“이쪽에서 중요한 컨퍼런스가 개최될 예정이거든. 여기 나와 있는 협회 간부들 전원이 이쪽에 모이겠지.”
협회장과 같이 허구한 날 서로 물어뜯는 새끼들 전원을 포함해서 말이지.
자.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청소의 과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편리함과 효율의 신봉자로서, 나 역시 그 간단한 루틴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먼저 쓰레기를 한곳에 모은다. 그 조건이 방금 충족됐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
“우리는 3일 동안 던전을 조지고 다니면서 합을 제대로 맞춰 본 다음에.”
깔끔하고, 신속하게.
“여길 테러한다.”
싸그리 다 치워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