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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속 구원자가 되었다-42화 (42/135)

42화 제압 (1)

동서고금을 다 털어 봐도 축제의 기본적인 골자는 비슷하다.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놀고, 먹고, 마시고.

내가 지금 ‘연출’해 놓은 잔치도 그런 상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뭐, 형식이란 게 중요하거든.

특히 맹세 같은 것에 매달리는 고리타분한 녀석이라면 특히 그렇다.

딱 봐도 상황에 녹아들지 못하는 중인 우중충한 녀석을 바라본다.

“표정이 왜 그래. 나도 나름 대접하려고 준비해 놓은 건데.”

앉아 있는 테이블이 삐걱거릴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가진 전사가 내 말에 피식 웃는다.

나와 독대하기 위해 주변에는 사람들을 싹 물려 놓은 상태다.

“나를 어떻게 죽일 생각이지?”

얼씨구.

앞뒤 다 자르고 바로 본론부터 꺼내 드는 것이 내가 딱 좋아하는 화법이다.

그러니까 나도 거기에 맞춰 준다.

“댁처럼 잘 싸우는 사람한테 괜히 이런저런 사람들 붙여서 피해를 늘릴 필요는 없잖아.”

멀리 앉아서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윤 자매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나하고, 저기 있는 녀석들 두 명. 그리고 당신. 3 대 1로 싸워서 끝.”

어차피 다른 녀석들은 키릴이 상대라면 일격에 몇 명씩 쓸려 나갈 것이 뻔하다.

괜한 인명 피해를 늘리느니, 이 녀석만 빼 온 김에 깔끔한 전투로 마무리하는 것이 낫다.

이에 키릴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겁한 수를 쓰길래 무엇을 준비하나 했더니, 생각보다는 당당하군?”

“…….”

3 대 1로 린치를 놓겠다는 말이 언제부터 정정당당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첫인상이 어느 수준으로 박혔는지는 대략 알 만했다.

“뭐, 사실 그것만 생각하고 당신을 끌고 나온 건 아닌데.”

물론 나와 윤 자매가 이 녀석을 편안히 두들길 환경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이 녀석을 이쪽으로 빼 온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도 있다.

“주변에 귀찮은 부하들도 없으니 툭 까놓고 말해 보자고.”

대표적으로, 이 녀석의 흉금을 털어놓게 하는 것.

“당신들, 언제까지 이런 짓으로 먹고살 생각인데?”

내가 꺼내 놓은 화제에 녀석의 눈매가 직선으로 가늘어졌다.

이 녀석의 고향. 설국이 지배하고 있는 땅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지구로 따지면 이미 중증의 빙하기로 접어든 상태라, 제대로 된 생물은 찾아보기도 힘든 극한 상황이겠지.

생존을 담보해 줄 유일한 열원은 이 녀석들의 무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대장간 중앙에 박혀 있는 거대한 용광로고.

문제라면 이제 거기에 집어넣을 연료조차 떨어져, 똑바로 태울 수 있는 재료는 ‘마력을 가진 사람’ 외에는 없는 상태다.

자국민을 태울 수는 없으니 다른 세계를 침략하는 것이고.

스테이지 2의 이름이 ‘별의 용광로’인 것도 그것에서 기인한다.

“부하들한테는 아직 괜찮다, 희망이 있다, 뭐 그런 식으로 둘러대고 있을 것 아니야.”

“…….”

키릴이 침묵한다.

딱히 내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모습을 보니, 현재 상황의 심각성은 본인도 통감하는 모양이지.

이세계에 침략하고 사람을 납치해서 그 안쪽에 쑤셔 넣는다 하더라도, 결국 임시방편이다.

그런 식으로 유지한다고 해 봐야 결국엔 자원의 소모가 가속될 뿐이고, 종국에 이르는 것은 멸망이다.

동토의 묵시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결말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거래하자.”

“거래?”

“그거.”

키릴이 착용하고 있는 푸른색 목걸이를 손으로 가리킨다.

파에톤의 전용 장비, ‘태양의 혼’.

원래대로라면 주인공 캐릭터가 단체로 달려들어서 키릴을 레이드 해야 입수할 수 있는 아이템이지만.

내가 바라는 건, 언제나 그랬듯이 손쉽고 빠르게 이걸 가져가는 것이다.

“당신이 그거 주면, 나도 좋은 것 하나 해 줄게.”

“…이건 위대한 전사에게만 전승되는 물건이다.”

키릴이 딱딱한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았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가 손에 쥐어 봐야 아무런 쓸모도 없지.”

“내가 쓸 건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고.”

애초에 그 녀석 전용 장비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그보다 선결해야 하는 건 말이야.

“다른 사람이 그걸 쓸 수 있으려면, 당신이 죽으면서 물건의 소유권을 포기해야 하잖아.”

그 과정이 없으면 저건 영영 못 쓰는 아이템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파에톤을 살리는 방법도 물 건너가는 거고.

원작에서는 파에톤과의 전투를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너라면 가치 있게 써 줄 거라며 물건을 양도하는 것이 순서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녀석이 없거든.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군, 너는.”

키릴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전사의 기개는 전혀 보이지 않아. 협잡꾼의 냄새만이 가득하다. 그런 녀석에게 이 물건을 양보할 수는 없지.”

음.

맞는 말이라 데미지는 전혀 없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녀석과 시선을 마주한다.

“협잡꾼도 맞는 말인데.”

확실히.

나는 뒤에서 이것저것 꾸며 대고, 남한테 피할 수 없는 외통수를 들이대면서 행동을 강제하는 일도 많이 하지만.

그 모든 일은 한 가지 목적으로 귀결된다.

“이왕이면 구원자라고 불러 주겠어?”

“…구원자?”

“말했잖아. 거래라고. 단순히 양보만 시키는 거였으면 그런 말도 안 했겠지?”

씩 웃으며 문장을 잇는다.

“귀한 물건에, 당신의 목숨값까지 쳐서, 아주 후하게 갚아드리려니까.”

그리고 구원자로서 할 일을 설명한다.

당면한 목적, 수립한 계획, 최종 목표.

키릴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

그러더니 잠시 침묵한다.

이어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내가 잘못 봤군. 사과하지.”

녀석이 이내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넌 협잡꾼이 아니다. ‘뛰는 자’에 가깝군.”

“뛰는 자?”

“고향에는 그런 관습이 있거든.”

약간 그립다는 어투로, 키릴이 말을 이어갔다.

“산꼭대기에서 지상까지 가장 빠르게 내려가는 자가 승리하는 시합이다. 아주 가파른 산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고, 그래서 내려오는 데 안전에 안전을 기하는 것이 보통이지.”

“오.”

“그런데 가끔, 다짜고짜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뛰어내리는 전사들도 있거든.”

그리고 그 말을 꺼낼 때만큼은.

“남들이 보기엔 그냥 미친 자들이고, 실제로 대부분은 그렇다. 하지만 가끔 그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는 자들이 있지.”

웃음이 싹 지워진 진지한 표정이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요소를 보고, 현명하게 계산하고, 그런 짓을 망설이지 않고 행할 담력과 기술이 모두 있는 자만이 그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는다.”

“응.”

“그리고 너는 지금, ‘뛰는 자’나 저지를법한 계획을 내게 늘어놓는군.”

키릴이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성공할 자신은 있나?”

“나 구원자라고, 병신아.”

씩 웃으며 받아친다.

“사람 살리는 일이라면 거짓말 안 해.”

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아까보다 길게, 오래.

폐부 안에 있는 공기가 모조리 흩날리는 것 같은 호쾌한 웃음이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는 와중에도, 키릴의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좋다! 그런 약속이라면, 내 목숨 따위는 몇 번이고 내주마!”

“그리고 그 목걸이도.”

“암! 전사는 두말하지 않는다!”

호탕한 목소리.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살벌한 기색을 담은 문장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충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나 정도도 넘지 못한다면, 네가 말한 계획은 어차피 의미 없는 것이겠지.”

“좋을 대로.”

그래.

계약 체결.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면, 일단 뭐라도 들고 계시라고.”

파티잖아.

메인이벤트 전에는 배를 채워 두는 게 약속된 일정이지.

“당신 같은 사람한테 어울릴 품격 있는 싸움을 준비해 놓을 테니까.”

키릴이 사나운 웃음으로 응수했다.

* * *

“우리 저 녀석 죽여도 되는 거 맞아?”

윤겨울이 일찌감치 기검을 뽑아 둔 상태로 그렇게 말했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까, 그냥 검으로 상대했다가는 제대로 버티지도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지.

“내가 언제 하지도 못하는 일 시키든?”

“아니, 네가 처음에 그랬잖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살려서 노예로 써먹는다고.”

“기억해 주고 있었구나…….”

“…너 대체 나를 얼마나 무시하는 거야?”

“맞아요! 겨울이를 무시하지 마세요!”

이를 악물고 말하는 윤겨울의 옆으로 윤봄이 한마디 거들었다.

윤겨울이 슬쩍 노려보자 곧바로 쪼그라들었지만.

“…….”

대체 누가 언니인지 모르겠다.

뭐, 그건 그렇고.

“너희 사이는 좀 괜찮아졌냐?”

“어?”

“여태까지는 너희끼리 투닥거려도 괜찮았는데.”

턱짓으로 눈앞에 있는 놈을 가리킨다.

“지금부터는 팀워크 안 맞으면 다 죽어.”

창을 든 거한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혼의 정수를 통해 마력의 감각이 확장된 덕분에 더욱 잘 보인다.

‘맹세’라는 절대적인 제약을 바치는 대가로, 여신은 자신의 전사들에게 인간의 틀을 아득히 웃돌게 만드는 은총을 내린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들이 전사장들이고.

키릴의 주변을 흐르고 있는 막대한 힘 때문에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진동하는 느낌을 줄 정도다.

“품격 있는 싸움이라고 했나?”

오죽하면 목소리도 에코 현상이 낀 것처럼 울릴까.

키릴이 옆에 끼고 있던 창을 빙빙 돌리며 이쪽을 향해 겨누었다.

“나쁘진 않겠군. 마지막인 걸 생각해도.”

그래, 칭찬 고맙다.

이쪽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쪽 보고만 있어도 치가 떨릴 정도인데 말이지.

다시 말하지만, 전사장 놈들은 하나같이 괴물이다.

정직하게 달려들었다간 이쪽도 몸 성하게 살아나가지 못할 정도로.

슬쩍 윤봄을 바라본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력은 이 여자지만, 얼마 전까지 골골대던 덕분에 평소의 날카로움을 온전히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윤겨울도 협회를 테러할 때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주긴 했지만, 아직 윤봄 정도의 전투력을 내주기에는 성장이 모자란 상태고.

이 조합으로 원래대로라면 주인공 캐릭터 전원을 끌고 와서 레이드 해야 하는 녀석을 잡아야 한다.

이 두 녀석을 붙여 놓으면 조금 특별한 ‘시너지’가 나긴 하지만, 그걸 보조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수가 더 필요하단 소리지.

어디 보자…….

“아, 잠깐만!”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키릴에게 목소리 높여 외친다.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늘어지는 목소리였다.

“…뭐냐?”

“잠깐만 기다려 줘! 한… 30초만!”

아니, 그러니까.

내 생각보다 이게 살짝 느려서 말이지.

상태창에 떠올라 있는 카운트다운을 슬쩍 살핀다.

하필이면 아직 쿨타임이 걸려 있어서.

“…….”

잠깐 키릴의 얼굴로 어이가 증발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래도 이 느닷없는 요청에도 녀석은 신사적으로 잘 기다려 주었다.

30초가 마저 다 지나고.

활성화된 항목을 연타한다.

[현재 포인트를 정산하실 경우 7일 동안 재정산이 불가능합니다. 현재까지 수급된 포인트를 정산하시겠습니까? Y/N]

당연히 정산하지.

씩 웃으며 Y자를 누르고.

기적 포인트가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다.

그동안 내가 쌓아올린 엄청난 인지도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양이.

[새 기적이 개방 가능합니다!]

그렇지.

미리 봐 두었던 아이콘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니, 자연스럽게 내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윤겨울이나 윤봄이나 초일류 검사이고, 그렇다는 건 비록 일격필살 위주로 수련한 검술이라도 지속적인 공방 정도야 무리 없이 수행해 낼 수 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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