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제압 (2)
최상위권의 경지에 이른 전위끼리의 싸움은 여러 가지 의미로 눈에 자극적이다.
숨 쉴 틈도 없이 교환되는 공격과 수비, 곡예에 가까운 화려한 동작, 그 와중에 이루어지는 치밀한 수 싸움.
다만, 이번에는 상대방이 조금 나쁘다.
“흡!”
키릴이 기합성과 함께 창을 원형으로 붕 휘둘렀다.
주변을 전부 휩쓰는 것 같은 창격에 윤 자매가 동시에 나가떨어진다.
내가 타이밍에 맞춰서 세워 준 방벽이 아니었다면 아마 동시에 상처를 입었겠지.
영혼의 정수를 먹어 마력을 열어 둔 덕분에, 이전이라면 하나만 가능했던 방벽도 동시에 두 개까지 세우는 것이 가능했다.
“…어렵네.”
윤겨울이 이를 악물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자존심 강한 녀석이 인정할 정도로, 키릴이 일신으로 발휘하고 있는 무력은 환장할 정도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윤 자매의 연계가 매끄럽지 않다는 사실 역시 눈에 밟힌다.
이래서야 내가 아무리 열심히 몸을 비틀어도, 공격력이 모자라서 클리어할 수 없는데.
게임 안에서 윤봄을 살려서 동료로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면, 윤겨울과 추가로 붙였을 때 공격력 시너지가 발생하는 효과가 있었다.
대신 윤겨울이 핵심 스킬 중 하나인 무명검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는 결점이 있지만, 지금 저 녀석은 내 기술을 보고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한 상태다.
그럼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키릴이라고 해도 지금쯤 유효한 타격을 입었어야 정상인 상태인데…….
‘아직도 어색하구만, 얘네…….’
한숨이 자동으로 푹 나왔다.
내가 일부러 화해시키려고 이런저런 액션을 취해 줬는데도 아직 앙금이 풀리지 않았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뭐, 생각해 본다면.
윤봄이 윤겨울의 기억을 조작한 뒤 일방적으로 떠나 버리고 쌓인 세월만 지금까지 십수 년이다.
아무리 내가 등을 떠밀어도 단기간에 어색함이 사라지기는 쉽지 않은, 감정이 쌓일 정도의 기간이지.
그럼 내가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다.
‘보자…….’
키릴의 보스전 패턴을 상기해 보자면, 전투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스텟이 올라가는 버프기가 있더랬다.
그리고 새 중첩이 쌓일 타이밍도 이제 곧이고.
그럼 내가 상정한 ‘위기’가 올 타이밍 역시 가깝단 소리지.
난 미리 개방해 둔 기적의 효과를 살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윤겨울이 느끼기에, 이제는 오진환이라는 남자의 표정만 봐도 어느 정도 생각하는 내용을 식별 가능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저거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네.’
적어도 이 정도는 금방 파악이 가능할 정도로 학습이 됐으니까.
물론 그런 상황에 집중할 여유는 없었다.
지금 그녀와 대치하고 있는 이 이계의 전사는, 지금까지 검을 맞대 본 상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량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아빠보다는 아래… 언니보다는 위?’
그렇게 기억을 반추하는 사이, 윤봄이 위협적으로 방금 자신이 있던 곳을 휩쓸고 지나가는 창날의 옆으로 몸을 뒤틀었다.
창은 공격의 간격이 긴 대신에 저런 식으로 거리를 좁혀 버리면 일반적으로 검 쪽이 훨씬 유리하다.
그래, 일반적으로는.
“……!”
윤봄이 급하게 동작에 제동을 걸었다.
한 발자국만 더 파고들어 갔으면 그대로 머리통이 터져 나갔을 만한 기세의 주먹이 바로 윤봄의 앞 지점을 가르고 지나갔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민한 대응이다.
물론 한 대상에게 수를 두 가지나 부었으니 빈틈은 무조건 생기기 마련이고, 원래 그것을 파고드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다.
하지만.
“…….”
확연하게 느껴지는 머뭇거림이 검을 잡은 손아귀에 깃든다.
아까부터 계속 이런 식이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검술을 수련해 온 사이기 때문에, 저 여자가 자신에게 무슨 동작을 유도하기 위해서 저런 행동을 취했는지는 순식간에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위험한 일은 자신이 대신 전부 할 테니, 자신은 숟가락만 얹으라는 헌신적인 태도다.
기억 속의 언니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모습이 지금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때는 대체 왜 떠난 거야?’
아빠도, 언니도, 어느 한순간에 사라진 그날.
마치 누군가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 그 단 하루.
그 단 하루가,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 나머지를 잡고 뒤흔들고 있는 느낌이다.
‘이번에도, 날 다시 버리고 갈 거야?’
생각은 감정을 낳고, 감정은 곧바로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현격히 무뎌진 속도다.
템포가 살짝 느려진 키릴이 손쉽게 대응하고 반격까지 모색할 만큼.
“윽!”
윤봄 쪽으로 날카롭게 들어간 밀어 차기가 그대로 그녀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빈 공기가 입에서 토해지고, 윤봄의 몸이 뒤로 죽 밀려 나갔다.
그리고 한 곳을 잠깐 무력화하자, 곧바로 키릴이 자신의 태세를 정비한다.
기껏해야 초 단위의 여유지만, 상대방은 그 정도의 여유만 있어도 능히 필살의 일격을 빚어 낼 수 있는 대상이다.
공간을 찢어 놓는 것 같은 기세의 창날이 윤겨울에게 쇄도했다.
“…칫!”
원래대로라면 자신도 몸을 쭉 뒤로 빼서 태세를 정비해야 하지만, 윤겨울은 이를 악물고 제자리에서 창의 경로를 훑었다.
어차피 이 상황이라면 오진환에게서 서포트가 들어올 타이밍이니까, 차라리 한 호흡 더 버텨서 그 빈틈을 파고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의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어?’
살짝 반응할 순간을 놓친다.
콤마 단위 이하의 찰나지만, 이 정도 수준의 싸움에서 그 정도면 사실상의 사형 선고다.
멍하니 자신을 향해 들어오는 창끝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얼굴에 뜨거운 피가 흩뿌려졌지만.
응당 거기에 따라올 격통은 따라오지 않았다.
“…….”
머리가 새하얘지는 감각이 정신을 지배했다.
언니가 자신의 앞에서 대신 창에 꿰뚫려 있었으니까.
* * *
성흔 발동, 정화자의 의지 발동, 불의 심판 발동.
잠깐이라도 키릴을 밀쳐 낼 수 있는 스킬 콤보를 작성하여 녀석을 뒤로 물린다.
유효한 타격을 입히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잠깐 무력화할 정도는 된다.
“왜… 왜?”
윤겨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윤봄을 부축한다.
일반인인 내가 봐도 치명상이다. 숙련된 무인의 눈으로 봤을 때는 더욱 절망적이겠지.
내가 한 방에는 안 죽도록 앞에 역장을 좀 펼쳐 주긴 했다만.
“다친, 곳은, 없어……?”
새하얘진 얼굴로도 윤봄이 그렇게 말하자, 윤겨울이 말문이 턱 막힌 표정으로 윤봄을 내려다보았다.
“…안, 다쳤으면, 다행이다.”
“언니… 언니, 아, 마, 말하지 마. 피, 피 더 나와…….”
목이 잔뜩 멘 상태로 윤겨울이 단어를 떠듬떠듬 조합한다.
본인이 생각해도 의미 없는 말이지만,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은 목소리였다.
“왜, 내가, 내가 잘못했어, 언니, 언니, 나, 나만 두고 떠나지 마…….”
이어서 훌쩍거리는 소리까지 겹친다.
뭐.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응, 잠깐만.”
느닷없이 끼어든 내 심드렁한 목소리에 윤겨울이 고개를 돌렸다.
심드렁한 몸짓으로 녀석이 품 안에 안고 있는 윤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호잇.”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픽, 하고 가느다란 빛이 발사되었다.
이 기적 스킬 아이콘에 이렇게 그려져 있어서 진짜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건가 했는데, 진짜 이런 식으로 나가네.
그리고 김이 죽 빠져 버리는 초라함과는 별개로, 효과는 굉장했다.
배에 구멍이 뚫려 있던 윤봄의 상처가 전부 아물고, 혈색까지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몇 초에 불과했으니까.
역시 기적이야. 성능 확실하구만.
“…….”
“…….”
동시에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윤 자매는 내버려 두고, 눈앞에 떠올라 있는 기적의 정보를 훑는다.
[기적: 라자루스 (초급)
대상에게 강력한 소생 효과를 부여합니다. 같은 대상에겐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길게 적용됩니다.
소모 기적 포인트: 2,000p]
흠.
불의 심판의 4배에 달하는 포인트를 잡아먹고, 재사용 대기 시간까지 길게 적용된다는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치유 계열 능력이 극단적으로 제한되는 이 게임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직 얼이 빠져 있는 윤 자매 쪽으로 고래를 돌린다.
“그래서.”
윤겨울이 멍하니 나를 돌아본다.
…얘 그 짧은 순간 사이에 눈물 콧물을 이 정도까지 뽑았네.
“이제 서로 좀 솔직해진 것 같은데?”
“…어?”
“언니 너무 좋아서 못 죽겠다고 방금 대놓고 인증했잖아, 너.”
제대로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와중에도, 윤겨울이 내가 내놓은 말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다음번에 또 실수하면 나도 못 살려.”
이어서 내가 꺼내 놓은 말에 표정이 바로 진지해지긴 했지만.
“일단, 자세한 건 끝내 놓고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말하며 다시 불의 심판을 수습하고 다가오는 키릴을 바라본다.
“너도 좋아하는 언니한테 다시 이런 일 시킬 수는 없을 것 아니야?”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부루퉁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아까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기세로 윤겨울이 검을 잡았다.
윤봄도 배를 몇 번 만져 보더니, 이내 상태가 괜찮다는 것을 깨닫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이 정도면 되겠지.
서로 교환하는 눈빛만 봐도 조금 전에 느껴졌던 어색함은 이미 많이 걷어 내진 상태다.
이 녀석들한테 필요한 것은, 그저 서로 솔직해질 만한 계기가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시너지가 제대로 발휘된 윤 자매의 위력은, 적어도 단일 대상 인간형 보스를 상대로는 최강에 가까운 위력을 자랑한다.
괜히 다른 놈들 두고 이놈들을 추려 온 게 아니라고.
“그럼.”
피식 웃으면서 나도 마력을 정비한다.
“어디, 너희들 얼마나 유능한지 한번 볼까.”
* * *
바닥에 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는 키릴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내 손에는 태양의 혼이 쥐어져 있었다.
방금 이 녀석에게서 소유권 포기를 선언 받은 참이다.
“…멋진 싸움이었다.”
녀석이 쿨럭거리며 그런 말을 꺼내 놓았다.
“저 검사들의 기교도 대단했지만… 네놈, 놀라울 정도의 역량이구나. 마치 내 움직임을 전부 읽히는 느낌이었어.”
“칭찬 고맙다.”
볼을 긁적거리며 평탄하게 대답한다.
뭐.
이 녀석의 말대로, 사실 내가 방금 거의 다 했다.
아무리 윤겨울과 윤봄의 시너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단순 스펙으로만 보면 키릴을 상대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이 녀석의 보스전 패턴 파훼법으로 1시간짜리 강의 영상도 만들 수 있는 고인물이 지휘봉을 잡고 있지만 않았어도 말이지.
“이 정도로 대단한 능력은 왕에게서도 보지 못했지. 아마 내 창을 여신에게 바치기 전에 널 만났다면… 네 지휘를 따랐을지도 모르겠군.”
오.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내가 이 녀석한테서 이런 말 뽑아내려고 준비해 온 회화 패턴이 못해도 10개는 넘어가는데, 알아서 이런 말을 꺼내 주다니.
“그럼, 만약 다음 생에서 나를 만나면 어떻게 할 건데?”
현재 삶에서는 무리다. 이 녀석은 이미 여신과 은총-맹세의 계약으로 속박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뭐.
다음 삶이라면 좀 이야기가 다르지.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나?”
“아니, 그냥. 재미 삼아서 한번 가정해 보자고.”……
그 말을 꺼내자마자, 결코 재미로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윤겨울의 얼굴에 섬뜩함을 느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 나라는 인간을 충분히 학습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키릴은 그만 거기에 순순히 응하고 말았다.
“핫, 재미라. 좋아. 새로 태어나서 너를 마주한다면, 내 창을 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유능한 자를 위해 무기를 쓰는 것은 전사에게 있어서도 영예다.”
“와, 그거 맹세야?”
“그럼. 전사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무명검無名劍]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릴의 가슴팍을 내 공격이 관통했다.
“…….”
“…….”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짚고 있는 윤겨울과,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윤봄은 내버려 두고.
키릴의 심장이 완전히 멎은 것을 확인하며, 품에서 준비해 온 것을 꺼내 든다.
앨릭서Elixir.
일전에 내가 섭취하고 남은 스템피드의 심장을 베이스로 만들어 낸 영약이다.
진짜로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물건이지.
지랄 같게도 게임 시스템상 특정 캐릭터한테는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키릴은 그 리스트에 들어가는 인간은 아니다.
휘파람을 불며 완전히 멎은 키릴의 심장에 엘릭서를 부어 넣는다.
앗싸.
이제 이 녀석이 눈을 뜨기만 하면, 그대로 초강력 노예 하나 입수다.
[그대, 그날 채워야 하는 쓰레기 짓 할당량이라도 있는 건가?]
수호령님의 핀잔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체구가 하도 거대해서 좌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얌전히 앉아 있어 준 덕분에 괜한 혼란이 일어나지는 않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