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전달
“생각보다 별로 불만 없어 보이는데?”
윤겨울이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같은 차에 탑승해 있던 키릴이다.
내가 ‘가만히 있어’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만이 있을 이유가 없지.”
키릴이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고작 그 정도 동작만으로도 차체가 요동쳤다. 함께 타고 있던 윤 자매에게서 미약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방법이 간악하긴 했지만, 내가 했던 말 자체는 진심이었으니.”
“…이 사람 진짜 착하다. 어디 사는 누구 씨랑은 다르게.”
다 들린다.
“그나저나, 이 세계는 참으로 풍족하군.”
키릴이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훑어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시야 끝에 걸린 산천초목은 본인의 세계에서는 태어났을 때부터 구경도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주인이 했던 말을 지킬 수만 있다면, 정말 기쁘겠어.”
“…주인?”
참으로 서열 정리가 빠른 호칭이라며 윤겨울이 감탄하는 사이, 윤봄은 다른 사실이 더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진환 씨, 이분하고 뭔가 약속을 하셨죠?”
“그렇지. 주인을 따르는 이유의 대부분은 그것 때문이다.”
“대체 무슨 말을 들으셨길래……?”
“응. 뭐, 이상한 건 아니야.”
운전대를 잡은 상태에서 하품하며 말한다.
요즘 계속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까 좀 졸리네.
“요약해서, 저 녀석들 전부 내가 책임지고 살릴 거야.”
“…엥?”
윤겨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들이라니?”
“설국에서 넘어온 인간들을 구해 준다고. 이런 다차원 인신매매단 짓은 그만두도록.”
하품을 쩍쩍 갈기면서 대수롭잖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간다.
실제로 내가 실행할 일이니까.
별로 힘줘서 말할 것도 없다.
“어떻… 게요?”
윤봄이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말로만 들어도 단신으로 이룰 만한 목적은 아니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키릴로부터 ‘고향’의 상황을 대충 전해 들은 덕분에, 그쪽이 어떤 아포칼립스 상태인지 파악하고 있는 상태니까.
하지만 윤겨울은 나랑 그럭저럭 붙어 있던 덕분에 더욱 적절한 반응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냥 둬, 언니.”
“어, 어?”
“쟤 지금까지 한다고 해 놓고 말을 못 지킨 건 없거든.”
방법을 안 가려서 문제지만.
문장 뒤에 그런 사족이 따라붙었지만, 그 정도야 피식 웃으며 흘려 넘긴다.
뭐, 설국의 전사들은 은혜를 입혀 둘 수 있다면 차후 스테이지에서 아주 요긴하게 쓰일 세력이다.
그걸 위해서는… 이놈들 ‘뒤에’ 있는 녀석까지 사후 처리를 좀 해 줘야 하지만.
어차피 그건 거쳐 가야 할 이벤트고.
눈앞으로 창을 띄워 올리며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한다.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역시 파에톤의 사망 이벤트를 해결하는 것이다.
녀석의 사망 이벤트는 사실, 이 게임을 어느 정도 접한 고인물 사이에서는 제대로 된 지뢰 취급도 못 받는 수준의 난이도다.
대놓고 다루기 쉬운 뉴비 친화적 캐릭터를 표방한 것과 어울리게, 어떤 루트를 타건 살려서 데려갈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거든.
‘살려도 뒷맛이 찝찝하니까 문제지…….’
그리고 그 반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녀석을 살릴 수는 있어도, 녀석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은 무조건 죽는다.
어떤 루트에서도 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들.
원래대로 진행된다면, 그 이후로 파에톤은 완전히 성격이 변해 버리고 만다.
우중충한 복수귀로 말이지.
그리고 나는 녀석을 그런 꼴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그 인간들까지 살린다.’
품 안쪽에 들어가 있는 태양의 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일단 이것만 제대로 전해 줘도 한시름은 놓는단 말이지.
윤봄을 살려 두고, 그 페널티로 윤겨울의 스펙이 낮아지는 것도 해결해 둔 덕분에, 키릴 쪽을 처리하는 것을 예상했던 것만큼 빠르게 당겨올 수 있었다.
그럼 남은 것은 빈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완벽한 결과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로키도 그걸 위해 데려다 둔 것이고.
“다 왔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눈앞으로 드러나는 스트롬블라드 저택을 바라보며, 나는 차를 세웠다.
* * *
“방문을 환영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나를 맞이하는 노년의 집사와 눈을 마주친다.
분명히 이름이…….
“그라함 씨?”
눈이 동그래지는 것을 보니 맞는 모양이다.
이내 곧바로 표정을 수습하며 예의 바르게 웃긴 했지만.
“젊은 나이부터 대단한 활약을 하시는 분은 역시 남다르시군요. 저 같은 노구의 이름도 알고 계시다니요.”
“파에톤이 몇 번 얘기해 줬거든요.”
사실 그런 쪽으로는 한 번도 대화해 본 적 없지만, 이 사람이 바로 이번 이벤트에서 ‘필연적’으로 죽어 나가는 인간들의 대표 격인 사람이라서.
기억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라함의 미소가 묘한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역시 아가씨께서 마음을 많이 터놓으신 모양이군요. 남한테 그런 이야기는 정말 안 하시는 분인데.”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야말로 오진환 님의 이야기를 아가씨께 자주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요?”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을 정도죠.”
“…….”
그 녀석, 나 없는 데서 내 뒷담화라도 하고 다녔나?
그럴 성격은 분명히 아닌데…….
“이런. 잡담이 길었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라함이 그렇게 말하며 저택 안쪽으로 먼저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한 번 따라가 본 적이 있는 저택 안의 산책로지만, 그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이전에는 이런저런 사용인들로 복작거리는 느낌이었으면, 지금은 그야말로 황량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인적이 드물다.
“긴급 상황이니까요.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피신시켰습니다.”
내 시선을 눈치챈 모양인지, 그라함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게이트 관측 지점이 여기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죠?”
“탁 트인 곳으로 간다면 눈으로도 관찰이 가능한 거리입니다.”
“…그 정도면 아직 사람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데요.”
“자기들이 죽는 것보다 이곳이 손상되는 걸 싫어할 바보들이라서 그렇습니다.”
말이야 가볍게 나왔지만, 그런 인간들이 한 무더기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 가문이 어느 정도의 인망을 가졌는지 짐작게 한다.
뭐.
지금부터 펼쳐질 이벤트의 엿같음 역시 그런 충직함 때문에 더욱 증폭되긴 하지만.
만약 내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이 모두 파에톤이 보는 앞에서 하나씩 차례대로 ‘처형’당할 것이다.
“어? 뭐야? 오진환 씨?”
그라함의 안내를 받아 본 저로 들어가자, 마침 메인 홀에서 찻잔을 들고 있는 파에톤‘들’이 고개를 돌렸다.
도플갱어라도 되는 것처럼 똑같은 모습이다.
“…….”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둘 중 하나는 로키겠지.
“어, 마침 잘됐네. 누가 진짜인지 맞혀 볼…….”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이마에 곧바로 딱밤을 놓는다.
고개가 뒤로 휙 젖혀지자 녀석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든다.
“…엥?”
“이쪽이 로키지?”
“어?”
“파에톤은 얼그레이 말고 다른 차 안 마셔.”
“…….”
찻잔에 담긴 내용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두 녀석의 표정이 동시에 묘해졌다.
“오진환 씨, 대체 내 기호품 취향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진짜 파에톤에게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오자, 심드렁하게 말을 받는다.
“그냥 보면 아는 거지, 그런 건.”
“…평소에도 엄청 자세히 봤나 보네.”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녀석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자, 나도 어깨만 으쓱하고는 근처 의자에 걸터앉는다.
애초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동안 별일 없었지?”
“뭐, 오진환 씨가 별일 있어도 무조건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그래, 잘됐네. 난 이것만 전해 주러 왔으니까, 앞으로도 가만히 있어.”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태양의 혼을 꺼내 든다.
“어? 목걸이?”
“그냥 목걸이보다는 훨씬 더 좋은 물건이지.”
그렇게 말하며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파에톤에게 채워 준다.
생각해 보니까, 나 은근 이 녀석에게는 이런 식으로 손이 자주 간단 말이지.
생긴 것도 취향이고, 게임 안에서 자주 다뤄서 그런가.
다른 놈들보다는 훨씬 살갑게 행동이 나가는 경우가 잦다.
[이성으로서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에이. 관심은 무슨. 얘 수준을 생각해 봐라. 나 같은 남자한테 관심이나 가지겠어?’
[못 가질 것도 없지 않나? 그대도 지금까지 보여 준 능력만 생각한다면 굉장한 수준인데.]
‘내가 지금까지 저지른 또라이 짓을 보고도?’
[…….]
‘왜?’
[아니, 말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말만 보면?’
[남녀 관계만큼 이성적으로 안 굴러가는 것도 별로 없으니까 말일세.]
쓸데없이 의미심장한 울림으로 말하는 수호령님에게 속으로 코웃음을 쳐준다.
그럴 일 없어요, 아저씨.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 낭비다.
“좋아. 잘 어울리네.”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털고 물러선다.
아닌 게 아니라, 푸른색의 목걸이는 이 녀석의 온통 붉은색인 외모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말을 내뱉자, 눈을 게슴츠레 뜬 파에톤이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노려봤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당신?”
“뭐가?”
“…….”
말이 안 통한다는 듯한 한숨과 함께, 파에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됐고, 여기 찾아온 용건이나 말씀하셔.”
“방금 끝났는데?”
“…….”
다시 말문이 막힌 표정의 파에톤에게 피식 웃어 주며, 채워 준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거 절대 벗지 마. 중요한 물건이니까.”
“…이거 하나 주려고 그 먼 길을 오셨다는데 어련할까.”
사실 직접 전달해 준 건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긴 하지만 말이야.
피식 웃으며 다시 말한다.
“농담 아니야. 절대, 절대로 벗지 마. 안 그러면 너 죽어.”
그렇게 신신당부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차피 이걸로 이 녀석한테는 당분간 신경을 꺼 둬도 되니까.
* * *
파에톤은 거의 헛웃음을 흘리며 신속하게 저택을 나가는 오진환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그야말로 짐작도 가지 않을 수준의 기행이었다.
“보통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려 홀짝인다.
건너편에 있던 로키도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따라 했다.
마치 거울처럼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또 묘한 느낌이다.
“신기한 것 하나 알려 줄까.”
“응?”
“내가 상대방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면, 정신 상태도 거의 흡사하게 바뀌어. 대충 나는 지금 생각하는 것도 너랑 비슷하다는 의미거든?”
“…그래서?”
“나는 지금 왜 심박수가 올라 있을까?”
능글맞은 어투로 전해져 오는 문장에, 파에톤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 아니야.”
“정말? 솔직히 저쪽은 대놓고 호감이 있어 보이는데? 정말 싫었으면 너도 거절했을 것 아니야?”
“…….”
볼까지 씰룩거리기 시작한 파에톤이 대답하지 않고 찻잔을 다시 기울였다.
“알아, 알아. 너도 연애 한번 안 해 본 사람이라는 거. 그러니까 괜히 이성 관계에 관심도 생기고.”
“…….”
“명문가 독녀에, 흑성에, 인지도도 웬만한 연예인급. 아마 어지간한 남자는 네 배경만 봐도 기겁하면서 도망칠 테고, 너랑 급을 맞춰 갈 수 있는 도련님들은 대부분 네가 마음에 안 들 테고. 나름 괜찮아 보이는 남자가 이렇게 들이대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지?”
“…….”
“오진환 씨가 겉만 보면 미친놈 같기는 한데, 또 능력 하나는 확실하잖아? 맨날 사람 구하겠다고 빨빨거리면서 뭘 하는 걸 보니까 나쁜 사람도 아니고.”
“…….”
“아아, 파에톤은 생각합니다. 자신은 모태 솔로라서 연애는 좀 부담스럽습니다. 오진환 씨도 아직은 완전히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대방이 다가올 때마다 점점 마음의 거리감이 좁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
“그런 거.”
파에톤이 붙잡고 있는 찻잔이 으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아니라고.”
얼굴 전체에 경련을 일으키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어지간히 화가 뻗쳐오른 모양새다.
“팩트로 맞으니까 아무 말도 못 하죠?”
하지만 건너편에서 혀를 샐쭉 내미는 로키를 보고 있자니, 딱히 그걸 폭발시킬 생각은 그녀로서도 들지 않았다.
이 여자는 그냥 진짜로 ‘맞고’ 싶어서 이렇게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그냥.
자신에게 되뇌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기로 했다.
물론 나도 그 반응은 전적으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