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별의 용광로 (2)
오락실에 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지러운 탄막들 사이로 현란하게 캐릭터를 움직여 모든 것을 피해 내는 고인물 플레이어를 구경한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재능의 산물이라고 흔히 생각하곤 한다.
틀린 생각이다.
물론 그런 선천적인 재능들이 아예 작용을 안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런 고인물을 만드는 데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은 오락실 기계에 그때까지 처박은 동전 뭉치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요컨대, 지독할 정도의 ‘학습’이 바로 고인물을 만들어 내는 최고의 재료란 소리다.
다른 사람은 꿈도 못 꾸는 플레이를 하는 사람의 대다수는 천재가 아니라 그냥 시간을 많이 쓴 일반인인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지.
그런 맥락으로, 난 이 게임의 고인물이라고 누구보다 자부할 수 있는 인간이다.
즉.
지금 내 스펙으로는 턱도 없는 대對용종이건 뭐건 간에.
내가 수도 없이 밟아 온, 익숙한 루틴으로 끌어들이기만 한다면.
그 뒤로는 일사천리다.
“……!”
상대방에 대한 경계심이 각인된 상태에서 용종이 취할 행동이라고 해 봐야 뻔하다.
일단 물러서서 수비적인 태세부터 갖추기.
에고가 충만하고 자기애가 강한 종족답게, 진지하게 싸움에 임한다면 가장 먼저 취할 것은 자신의 신변 보호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가 필요한 버프를 덕지덕지 바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설국의 무기고에서 챙겨 온 구슬 여러 개를 손아귀로 쥐어 깨트린다.
여신의 은총을 잠깐 빌릴 수 있는 강옥.
신체 능력을 폭발적으로 증폭해 주는 역할을 하며, 강체술과 중첩된 영혼의 정수까지 더하면 내가 지금부터 할 ‘플레이’의 요구 수준까지는 능력치를 끌어올릴 수 있다.
원래대로는 이런 짓을 할 틈새도 없이 자잘한 술식으로 수도 없이 견제를 당해야겠지만, 난 이미 인장으로 내가 용살자라는 사실을 저 녀석에게 각인시킨 상태다.
자잘한 견제 따위야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할 공산이 높단 소리지.
사실 전사왕에게도 밀리는 내 수준에서는 용종이 작정하고 딜레이 없이 공격 술식을 찔러 넣는다면 대처할 방법이 없는데 말이야.
심리전으로 가장 위협적인 수단을 봉쇄한 셈이다.
“꿰뚫려라-!”
스스로 충분한 방어력이 갖춰졌다고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공격 술식이 루드밀라 앞에서 작성되었다.
형태와 생성 시간만 보고 무슨 공격인지 바로 계산하여 산출해 낸다.
직선 범위를 관통하는 얼음의 창. 못해도 열댓 개 이상.
설정상 술식이라는 게 온갖 복잡한 과정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어 하나로 바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건 용종은 용종이다 싶지만.
“4초.”
중얼거리면서 옆으로 쭉 횡보를 딛는다.
하나, 둘, 셋, 넷.
우수수 날아오는 창들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비켜 지나갔다.
4초째에 패턴이 종료.
얼음의 창 투척 이후로 이어지는 패턴은 위에서 쏟아지는 요격.
“3초.”
하나, 둘, 셋.
그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앞으로 뛴다.
위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얼음덩어리들이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3초째에 패턴 종료.
다음 패턴은 회피 불가. 따라서 받아 낸다.
성흔 발동. 이어서 수호령님의 역장을 펼친다.
범위는 내 몸 전체. 전방 120도를 감싸는 형태로.
……!
앞에서 불어닥친 냉기의 폭풍이 곧장 역장에 가로막힌다.
열기로 가득 둘러싸인 용광로 안에서도 전혀 위력이 죽지 않은 강렬한 푸른색 기운이 역장과 부딪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말이 안 되는군. 그대, 정말 미래 예지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뭐가. 피하고 막기만 하고 있는데.”
[피하고 막는다는 것도 상대방의 공격을 예상해야 가능한 행동이라네. 저 용종은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이 정도 공격을 흩뿌리고 있지 않나. 그대 수준에서 이 정도 대응을 하는 것만 해도 기적이네.]
그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날아오는 공격을 회피한다.
마법 공격도 그렇고, 압도적인 신체를 이용한 육탄 공격도 그렇고.
일격, 일격이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릴 위력이지만.
뭐.
별로 어려운 것도 없다.
발동 시간, 나에게 도달하는 시간, 회피 방향과 내 가동 범위.
이런 재료들을 ‘요리’해서 최적의 결과를 산출해 내는 일은.
이미 수도 없는 반복을 통해 근육에 새겨져 있는 ‘작업’이다.
“네놈-! 도망만 잘 다닌다고 해결될 성싶으…….”
그렇게 분통을 터트리는 루드밀라의 턱밑을 내가 발동한 무명검이 파고 들어간다.
공격을 전부 회피하면서 야금야금 녀석에게 접근해서 내가, 어느새 이 녀석을 공격 범위 안쪽까지 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
검에 베인 녀석이, 잔뜩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본인이 얻어맞았다는 사실 자체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체급 차이가 압도적이라 커다란 데미지는 입히지 못했지만, 녀석의 비늘이 어느 정도 깨지기는 한 것을 확인한다.
뭐. 데미지 나오는 걸 보니까.
숟가락으로 잡았을 때보다는 빨리 잡겠네.
씩 웃으며 루드밀라를 올려다본다.
“다시 거리 벌려야지?”
“…….”
“안 그러면 한 대 더 맞는다.”
“이, 이익……!”
내 말에, 녀석이 이를 북북 갈면서도 다시 고속 이동 술식을 통해 거리를 벌렸다.
공격은 전부 회피해 버리는 내 움직임을 보고, 자신도 가까이에 있겠다가는 대처가 힘들겠다는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지.
“네놈, 움직임은 제법 쓸 만한 것 같다만, 방금 그게 내 전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분함이 잔뜩 담긴 목소리에, 마력을 회복시켜 주는 보주를 하나 깨트리면서 쓴웃음을 짓는다.
“어, 알아.”
알아도 ‘너무’ 잘 알지.
용종을 잡아 본 경험 중엔 당연히 루드밀라를 상대해 본 경우도 많고, 그걸 통해 나는 이 녀석에 대한 모든 정보에 통달한 상태다.
용종 공통 패턴 13가지. 그 외에 루드밀라 고유 패턴으로 이것저것 조합되는 경우의 수까지 따지면 몇백 개까지 늘어나는 공격의 루트를 전부 암기하고 있을 정도로.
본격적으로 루드밀라의 몸 근처를 회전하기 시작하는 무지막지한 마력을 보면서, 나도 씩 웃어 준다.
이제부터는 반복 작업이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패턴이냐.
뭐든 대처해 주마.
[그대, 설마.]
수호령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이 양반은 내 의식 전부를 읽진 못해도 대략적인 윤곽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내가 지금부터 어떻게 저 녀석을 잡겠다는 건지 대충 감을 잡은 모양이다.
[이런 짓을 반복할 생각인가? 저 용종이 쓰러질 때까지?]
“어.”
[전성기의 나였어도 용종과 이런 식으로 싸우진 못해. 이건, 마치…….]
피식 웃으며 수호령님이 흐린 말끝을 내가 채워 넣는다.
난 지금부터.
두려움과 강대함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종족을.
“가지고 놀 거야.”
내 스펙과 저 녀석의 스펙을 고려한다면, 모든 패턴 중 하나라도 직격당하면 즉사.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다.
반면 나는.
그 모든 것을 회피하고 저 녀석에게 접근해서 공격을 성공시키는 짓을 끝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
겉으로만 보면 불합리한 싸움 그 자체다.
실수 한 번만 해도 곧바로 내가 패배하는 거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데 말이야.
“숟가락으로도 죽여 봤다니까?”
고인물은 실수를 절대 하지 않으니까 고인물인 거다.
* * *
“주, 죽어!”
발작적으로 터져 나온 비명과 함께,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짜 올린 마력이 다시 한번 주변을 휩쓸었다.
하나하나가 재앙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은 위력을 자랑하는 공격 술식들이다.
이번에도 상대에게는 닿지 않는다.
마치 실체가 없는 신기루처럼.
한 끗 차이로, 한 뼘 차이로, 상대방은 그 모든 것을 피해 낸다.
완벽하게 사각으로 찔러 넣었다고 생각한 공격은 어느새 생겨난 투명한 막에 가로막힌다.
‘대체 뭐 하는 괴물이야?!’
상대방이 발하는 마력은 분명히 루드밀라 기준으로는 개미만도 못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지금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악!”
하지만 모든 공격을 회피한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이 공격만큼은 분명히 현실이었다.
물론 이런 것을 몇 대 얻어맞는다고 그녀에게 큰 타격이 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공격은 빗나가고, 상대방의 모든 공격은 정타로 자신에게 들어오는 일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아파…….’
울상을 지으면서 이제 완전히 깨져 가기 시작한 비늘을 내려다본다.
처음엔 조금 따끔거리는 정도에서 끝났지만, 이제는 피가 줄줄 날 만큼 깊이 패여 있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계속 맞다간.
“…….”
죽는다.
그 문장의 끝에 나온 결론에, 루드밀라의 정신이 잠깐 새하얗게 물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한 생각이었으니까.
죽어?
자신이?
“우, 웃기지 마!”
그런 생각을 일부러 떨쳐 내기 위해서라도, 이 상황은 빨리 끝내 버려야 한다.
저렇게 아예 쫄랑쫄랑 피해 다니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면, 범위 전체를 타격하는 공격을 사용하면 될 일이다.
“……!”
초저온의 마력 폭풍이 체내 기관부터 시작해 치솟아 오른다.
구강 안에서 형태를 갖춘 용의 숨결이 이내 아래로 뻗어져 나갔다.
“…죽었나?”
용의 숨결은 일반적으로 용종이 꺼내 들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아래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역시 그 인간도 이걸 버텨 낼 수는 없었…….
“아욱-!”
제대로 안심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깨진 비늘에 공격이 파고들었다.
“어, 어떻게……?”
이번에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인간이, 이제는 악마처럼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여전히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이쯤 되면 대체 무슨 방법을 썼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다,
“이쯤이면 슬슬 브레스 패턴이 나올 때가 되긴 했지.”
그리고.
“다른 건 없냐?”
“…….”
그 말이 들리자, 순식간에 여러 감정이 연이어 솟구쳐 올랐다.
저 인간의 말대로 다른 공격을 꺼내 보았자, 또 같은 일의 반복이다.
모든 대처를 비웃듯이 피하고, 천천히 다가와서, 한 대 툭 때리겠지.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지치지도 않고.
손아귀에 있는 사냥감을 말려 죽이듯이.
가지고 놀듯이.
“…….”
처음에 느낀 것은 이상함.
두 번째로 느껴진 것은 초조함.
그리고 그게 공포로 바뀌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루드밀라 자신도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위대한 용종인 자신이, 지금 눈앞의 인간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안하면, 그냥 때린다?”
남자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에게 뚜벅뚜벅 다가왔다.
분명히 크고 강한 건 자신이고, 작고 약한 건 저 인간인데.
루드밀라는 그 모습에 밀려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오, 오지 마!”
급하게 작성한 술식을 필사적으로 던져 넣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손쉽게 회피한 인간이, 다시 한번 자신에게 공격을 작렬시켰다.
꼴사나운 비명이 루드밀라의 성대에서 들끓었다.
“더 안 할 거야?”
마치 그 말이 신경 전체에 새겨 넣어지는 느낌이다.
천천히 죽던가, 지금 여기서 죽던가.
그런 선택지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루드밀라의 전신에 통제 불가능한 떨림이 찾아들었다.
* * *
보자.
이만큼 갈궜으면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루드밀라는 게임 안의 용종 안에서도 특히나 비중 있게 다뤄지는 녀석이라, 다른 녀석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도 몇 가지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는.
“자, 잘못했어요…….”
훌쩍거리면서 흘러나오는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 녀석.
멘탈이 어지간히 약하다.
“나쁜 짓 앞으로 안 할게요, 죽이지 말아 주세요…….”
그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오들오들 떨면서 가냘프게 말하는 것이 무슨 겁에 질린 어린애 꼴이다.
사실 고인물들 사이에서 루드밀라 상대로 ‘숟가락 챌린지’가 유행한 이유도 이런 모습에서 기인한다.
괴롭히는 맛이 있다나.
‘…생각해 보니까 실제로도 어린애 맞네.’
용종 기준으로, 이 녀석은 아슬아슬하게 성년이 아니다.
왠지 애들이나 패고 다니는 쓰레기가 된 느낌인데?
[일단 그대가 그런 인식이라도 가지게 된 것은 다행이네만, 애초에 상대는 제물로 바쳐진 인간을 마음대로 먹어 치운 녀석 아닌가?]
그게 말이야.
이 녀석은 딱히 그 인간들한테 아무 짓도 안 했을걸.
[뭐라?]
이 녀석은 그냥 인간을 잡아먹는 악룡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 있으면 좋은 것을 주겠다고 꾄 녀석은 따로 있거든.
전사왕에게 침략 전쟁을 시작하도록 꼬드긴 놈과 똑같은 녀석 말이지.
물론 그런 녀석에게 협력한 것 자체가 나쁜 일은 맞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당장 모가지를 날려 버리기엔 뒷맛이 찝찝한 것도 맞다.
“뚝 그쳐. 한 대 더 맞기 싫으면.”
“…….”
내 말에 루드밀라가 흡, 하면서 숨을 참았다.
흠.
지금까지 두들겨 팬 것 덕분에 교육이 어지간히도 잘 된 모양이군.
“내가 지금부터 하는 부탁만 들어주면 용서해 준다. 알아들어?”
위아래로 격렬하게 끄덕여지는 고개는.
글쎄.
당사자가 들으면 화내겠지만, 용보다는 말 잘 듣는 강아지에 훨씬 가까웠다.
그 문장의 대상은 인간 형태로 변해 있는 루드밀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