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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속 구원자가 되었다-56화 (56/135)

56화 이너 서클 (2)

“아서, 이 자는…….”

화면 너머로 보이는 장면을 본 ‘원탁’의 일원 한 명이 마른 침을 삼켰다.

갑옷을 입고 있는 소녀와 성인 남성 한 명.

“…….”

그리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원탁의 수장인 아서는, 방금 말한 인원이 흐린 말끝에 담겨 있는 의미를 곧장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갑옷을 입고 있는 소녀에게 박혀 있었으니까.

‘…란슬롯보다는 못하지만, 대단히 강력하군.’

지금은 이너 서클을 빠져나간 배신자. 하지만 역대 최강의 영능력자 중 한 명을 떠올린다.

그리고 지금 화면 너머에서 소녀가 부리는 힘은 그가 보았던 란슬롯의 힘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더 신경 쓰이는 건…….’

[스승님, 새 영혼은 언제쯤 볼 수 있어?]

[글쎄. 지금 여기 보고 있는 늙은이들이 언제 고집을 버리냐 문제이긴 한데.]

화면 너머의 소녀가 저 남자를 지칭하는 단어.

스승이라고 한다는 것은, 저 남자는 소녀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그렇게 칭하지는 않을 테니까.

‘만약 저 남자가 갑옷 속의 소녀 이상의 영능력자라면…….’

적으로 두는 것 자체가 재앙이다.

란슬롯이 그러했듯이.

아서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나마 그가 통제해야 할 사람들 앞이라 동요를 최저한도로 억누른 반응이었다.

“…아서, 하다못해 이야기 정도는 들어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마침내 일각에서 그런 얘기가 흘러나오자, 곧바로 다른 곳에서 성난 목소리가 대답으로 튀어나왔다.

“겁쟁이는 원탁에 필요 없어! 고작 저런 협박에 굴복할 거면 혼자 나가라지!”

얼간이 녀석.

아서는 입 안쪽으로 저도 모르게 이가 갈리려는 것을 간신히 자제했다.

상대방의 역량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입을 놀리는 꼴이라니.

란슬롯이 자신들에게서 돌아선 것도 결국 이런 무지함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트리스탄, 입을 조심하게.”

아서가 침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남자는 단신으로 우리 전원을 상대할 수도 있으니.“

자신들 하나하나가 S급 헌터 이상을 상회하는 강자들이지만.

만약 저 남자가 소녀 이상의 강력함을 가지고 있다면, 적으로 뒀을 때 이길 수 있는 이미지가 아예 떠오르지 않는다.

“하, 하지만 고작 한 명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두 번 말해야 하나?”

아서가 슬슬 노기를 피워 올리자, 계속해서 반대 의견을 피력하던 인원 역시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로 눈이 멀어 있다니.

아서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부터 이 지경은 아니었을 텐데…….’

비밀 결사의 형태로 너무 많은 힘을 축적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영능력자들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모인 자들의 집단은, 어느 순간부터 우월감과 배타적 성향을 지닌 선민사상을 가진 자들의 집단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명확한 사실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만큼.

‘…어쩌면 저 남자가 계기가 되어 줄지도 모르지.’

새로운 강자의 존재는 집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해 줄지도 모른다.

아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직접 나가겠다. 모두 대기하도록.”

* * *

“호수의 안개. 내놔.”

사람의 신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플로어에서 아서를 마주치자마자 내놓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아서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호수의 안개는 이너 서클에서도 제일 중요한 유물이니까. 다짜고짜 내놓으라고 이빨을 까면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다.

‘원래대로는 내가 이런 말을 대놓고 할 깜냥이 절대 아닌데 말이야…….’

이너 서클은 원래 게임 안에서 적대 세력으로 등장하는 집단이다.

스토리상 니샤와 미네르바가 분리되는 구간이 있는데 말이야. 그중 니샤가 새로운 파트너를 얻기 위한 과정으로서 싸우게 되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적으로 마주칠 경우 보통 귀찮은 녀석들이 아니다.

영능력자는 존재만으로도 온갖 유틸리티의 집합체다. 니샤만 봐도 알 수 있지.

물론 이 녀석 수준만은 못하다지만, 여러 명이 동시에 협공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피곤한 면도 더러 있다.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피곤한 게 싫으니까 지금 이렇게 블러핑을 해 두는 것 아니겠나.

아마 니샤의 능력만 보고도 잔뜩 쫄아 붙어서 나까지 과대평가되었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실제로 아서도 표정만 찌그러트리고 있지 대놓고 불만을 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란슬롯에, 호수의 안개까지 알고 있다니. 넌 대체 누구냐?”

“호수의 안개 내놓으라고.”

목 뒤쪽을 벅벅 긁으면서 그렇게만 대답해 둔다.

애초에 주도권은 이쪽에 있다. 저쪽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할 의무가 없단 소리지.

“…….”

아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지는 것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뭐, 이쯤 해서 슬슬 구실이나 만들어 줄까.

“어차피 그 물건, 주인 가리잖아. 그쪽 중 아무도 선택받은 인간은 없고.”

수호령님도 그렇고. 파에톤이 가진 태양의 혼도 그렇고.

주인공 전용 아이템은 항상 주인을 시험하는 장치가 하나씩 심겨 있다.

그건 니샤의 아이템인 호수의 안개도 마찬가지고.

“쓸 수 있는 인간 아무도 없으면 그냥 넘기지 그래? 그냥 썩히기도 아까운 물건일 텐데.”

내 입에서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오는 정보에 아서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아까 전까지는 그냥 느닷없는 요구에 불쾌해하는 모습이었다면, 지금 이 말에는 뭔가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그 정도까지 자세히 알고 있다면, 호수의 안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잘 알겠지.”

그럼.

호수의 안개에 선택받은 자는 그 내부에 있는 고결한 혼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완전무결한 인간이라는 것을 뜻하며, 곧 이너 서클 내부에서 ‘영적 지도자’로서 막대한 발언권을 가지게 된다.

주인공 아이템도 먹고, 이 녀석들도 내 아군으로 편입시키고.

일석이조라 그거지.

“…그대는 그것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리고 이 넌지시 떠보는 말투에서 알 수 있듯이.

아서는 내심 누군가가 차라리 그것을 가져가는 것을 바라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 녀석은 란슬롯, 즉 발카서스와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녀석이고.

그놈을 흑화하게 만든 이너 서클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설정이거든.

“당연히.”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자신 있게 확언하는 것이다.

“나, 그쪽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유능한 사람이거든?”

아서가 피식 웃었다.

뭐.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해 봐도 좋은 표정이었다.

* * *

“아서!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저런 외부인에게 호수의 안개를 맡기다니……!”

“물건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다. 트리스탄. 아까도 내게 이의를 달더니, 모든 최종 결정권은 내게 있다는 걸 까먹었나?”

“하지만……!”

아, 그것참.

말이 많네.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에서 거의 침까지 튀기며 화를 내는 노인 한 명을 바라본다.

아서가 내게 호수의 안개를 주는 것이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

너는 기억해 뒀다.

어디 두고 보자고.

안전 금고 안에 고이 보관된 회색의 반지를 노려본다.

호수의 안개. 내부에 고대의 영혼을 담고 있는 장신구.

원래는 이너 서클 전원과 전투를 치르고, 혹독한 시련 여러 개를 거쳐야 입수 가능한 물건이다.

뭐.

나는 날로 먹을 거지만.

[그대여.]

‘응?’

[음흉한 표정이 다 새어 나오고 있다네.]

어이쿠. 실수.

헛기침하면서 이너 서클의 일원들을 돌아본다.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비워 줄래?”

“…뭐라?”

“여기 있다간, 그쪽들 죽을 수도 있어. 호수의 안개가 내리는 시련은 그만큼 혹독하거든.”

진지하게 으름장을 놓자 녀석들이 움찔했다.

이중에서는 저 안쪽에 있는 영혼과 감응조차 성공한 녀석이 없을 테니 내 말의 사실 여부조차 가리지 못할 것이다.

“거, 거짓말이다! 네놈, 분명히 우리가 자리를 비우면 물건만 가지고 도망칠 생각…….”

“어이가 없네.”

따지고 드는 트리스탄 어쩌고 하는 늙은이에게, 코웃음을 쳐주며 말한다.

“그런 짓을 하느니, 그냥 너희 다 죽여 버리고 가져가는 게 빠르지 않을까? 난 할 수 있는데?”

“…….”

녀석이 당황하여 말을 멈추는 모습에 피식 웃어 주며 손을 휘휘 저어 준다.

“그니까 얼른 나가 있어. 주인 못 됐다고 어깃장 놓을 일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녀석들을 내보낸다.

대다수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내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인간으로 포장된 이상 이놈들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거든.

그리고 나와 니샤만 남은 안전 금고 안에서, 니샤에게 손짓한다.

“새 영혼이야. 와서 만져 봐.”

반색하며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니샤가 곧바로 반지를 손아귀에 쥐었다.

소중한 장난감이라도 선물받은 기색이었다.

“…스승님, 안쪽에서 아무도 안 느껴져.”

“말을 걸어 봐야지.”

내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니샤가, 이내 손아귀 안에 잡힌 반지에 신경을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지 안에서 광채와 함께 회색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의 모습으로 형태를 갖췄다.

‘재능이 미친 수준이긴 하단 말이야.’

이너 서클 안에 있는 놈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강력한 영능력자다.

그 안에 있는 놈들이 사활을 걸고 달라붙었음에도 단 한 놈도 성공하지 못한 감응을, 니샤는 고작 몇 분도 안 돼서 성공한 것이다.

“…어라?”

형태를 갖춘 영혼의 모습을 본 니샤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래.

아마 이 녀석에겐 그 갑옷의 모습이 엄청나게 익숙할 거다.

계속 자신이 입고 다니는 갑옷의 형태가, 지금 눈앞의 영혼과 똑 닮은 모습일 테니까.

[누가 나를 불렀느냐?]

호수의 안개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영혼이 의사를 발했다.

[고결한 성기사의 이름을 걸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자만이 나를 다룰 자격이 있을 것이다.]

흠.

확실히, 호수의 안개는 주인공 전용 아이템인 만큼 성능은 알아주지만 말이지.

다짜고짜 자의식이 과잉된 단어를 쏟아 내는 모습이 좀 아니꼽다.

“야.”

그러니까, 예의범절을 조금 주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야?]

“말을 좀 가려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니샤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쪽에 대단하신 분이 계시거든.”

영혼이 코웃음을 치며 내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신성한 의무에 모든 것을 바친 성기사에게 속세의 지위 따위는 아무 의미 없…….]

그리고 말이 중간에 뚝 끊겼다.

신성한 성기사에게 속세의 지위 따위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맞지.

하지만, 그런 성기사에게도 아주 무시무시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동종 업계 선배’다.

[어머.]

미네르바가 화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기사 몇 기 출신이에요?]

[…….]

영혼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뭐.

게임 안에서 니샤는 미네르바가 ‘없는’ 상태에서 이 녀석을 마주하기 때문에 원래대로는 시련을 모조리 다 돌파해야 하지만.

만약 지금처럼 미네르바가 있는 상태로 이 녀석을 마주하게 되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성기사는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서로 간의 위계질서가 강한 집단이거든.

[23기, 전투신전 출신… 이다.]

설정상 성기사라는 집단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집단이고, 그중에서 두 자리 기수라면 화석 취급을 받을 정도로 원로 수준이다.

미네르바의 질문에 바로 기수를 까는 걸 보니 자신도 꽤 자신이 있다는 것이겠지.

끝에 존댓말을 붙이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런데 말이야.

[23기? 경도 정말 오래전 사람이군요?]

내가 알기로, 미네르바는 진짜배기 화석이다.

[그런데 대신전 2기 출신한테 말이 좀 짧네요, 후배?]

미네르바의 목소리는 여전히 화사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 화사한 목소리 안쪽에 숨겨져 있는 압박감을.

[…….]

음.

꽤 놀랍군.

영혼도 식은땀을 흘릴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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