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구원자가 되었다-60화 (60/135)

60화 망자의 도시 (3)

게임 설정상 성기사단의 최초 발원지는 영국이고, 이는 영국이 협회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초인 집단인 기사단을 발족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그 기사단이 철석같이 떠받드는 존재가 있는데, 그건 바로 ‘성녀’의 존재다.

도움을 주는 범위는 굉장히 다양하지만, 성녀가 등장할 때마다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예를 들어서.

성당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 니샤가 단순히 영능력을 활용해서 주변을 뒤덮은 발카서스의 검은 안개를 걷어 낸다고 하자.

원래대로라면 영능력자를 박해하는 이 나라의 특성상 아무리 도움을 줬다지만 최소 경계는 해야 정상이다. 지금 자기들이 적대하고 있는 대상도 대상이니까.

하지만 만약 여기에다가 말이야.

[기적: 라자루스를 지정한 대상들에게 사용하시겠습니까? Y/N]

느닷없이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환자들을 치유해 주고.

‘수호령님, 부탁한 것 좀.’

[알았다.]

공중에서 투명한 방벽이 나타나 사람들을 지켜 주며.

[후예들은 들으라! 영광스러운 승리가 눈앞에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호수의 영혼이 자신을 형상화한 모습인, 누가 봐도 고대의 성기사가 분명한 영혼이 나타나 사기를 고양하고 있다면야.

그건 그냥 성녀다.

갑옷 안쪽에 있는 놈이 영능력자건 뭐든 간에.

“서, 성녀다! 고서에서 말하던 모습과 똑같아!”

“내가 살아생전에 성녀가 강림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응.

잔존 기사단원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무릎을 꿇는 놈은 기본이고, 어찌나 감동을 하였는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녀석도 뜨문뜨문 보였다.

[그러고 보니, 사이비 종교를 주창한 놈들은 대부분이 자신을 구원자라고 지칭하지 않던가?]

“뭐?”

[그냥, 그대가 그런 작자들과 다른 게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는 소리네.]

‘…….’

날카로운 지적이긴 했지만, 아무튼 내가 모습을 감춘 상태에서 지금 공을 들인 ‘연출’ 덕분에 기사단이 전의를 되찾은 것은 분명했다.

개개인의 전투력은 애초에 출중한 녀석들이다. 니샤가 안개를 걷어 내기만 해도 제 할 몫은 충분히 해 줄 녀석들이지.

[…정작 저 아이는 혼란스러워 보인다만.]

실제로 내 지시에 따라 그냥 안개를 걷어 내기만 했을 뿐인 니샤는, 자신을 보자마자 기사가 아니라 광신도처럼 돌변한 주변의 분위기를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애타게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숨어서 기적을 날려 대고 있는 내 쪽을 발견하고는 시선이 고정된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분명한 시선이 이쪽으로 발사되었지만.

“…….”

엄지를 척 들어주고 고개만 끄덕여 준다.

좋아. 잘하고 있어.

[아니, 가서 도와주는 게 맞지 않겠는가.]

도와줄 거야.

조금만 더 우려먹고.

[…….]

* * *

“당신, 망자들의 왕이라고 하지 않았어?”

비웃는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가 귓전을 두들겼다.

발카서스의 검은자위 없는 눈동자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자가 입가를 비틀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호칭이 거창한 것 치고는 능력이 너무 부족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앞으로는 런던 전체의 상황이 홀로그램화 되어 떠올라 있었다.

발카서스에게 세뇌된 인간들은 붉은색으로, 그리고 그들과 싸우고 있는 적대 세력은 푸른색으로.

숫자는 압도적으로 붉은색 점들이 많았지만, 홀로그램 상에서 푸른색 점들은 도저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수적 열세를 뒤집고 기세를 올리고 있기까지 했다.

“…곧 사그라들 저항에 불과해. 나는 이 나라를 넘어서 곧 대륙 전체에 내 군대를 풀 것이다.”

“으음… 그래?”

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마 네 상상 속에서만 그렇겠지만.

쉬카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홀로그램을 두어 번 건드렸다.

푸른색 점과 붉은색 점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있는 장면이 확대되면서, 발카서스에게 세뇌당한 인간들과 런던의 기사단이 맞붙고 있는 모습이 영상으로 떠올랐다.

“성녀님이! 성녀님이 나를 보우하신다!”

“나를 보셨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셨어!”

쉬카펠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기사단이라기보다는 거의 광전사라고 하는 편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평소에 그렇게 점잔 빼는 녀석들이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든 모습이다.

“…….”

그리고 고작 약간의 ‘연출’만으로 이 인간들을 여기까지 만들어 놓은 남자 쪽으로 화면을 돌린다.

몸을 숨긴 상태에서 이런저런 기술을 사용하면서 전투 중인 인원을 보조하고 있는 인간.

기술 자체의 위력은 그녀 기준으로 별것 아니었지만, 그것 하나하나가 짚어 내고 있는 전투의 흐름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단신으로 전장 전체를 조율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의 솜씨.

‘오진환…….’

설국 때도 마찬가지였고, 이번에도 그렇다.

작은 거짓말, 얕은 속임수.

그리고 아주 약간의 임기응변.

하지만 그것을 통해 이 남자가 일궈 낸 결과는 항상 완벽하게 핵심을 관통한다.

‘마음에 들어.’

이 남자는 틀림없이.

재미있다.

비록 자신을 대놓고 도발하는 꼴에는 울컥 화가 치솟아 오르긴 했으나, 하는 행동 하나하나마다 자신을 빠지게 만드는 매력을 철철 흘리는 남자였다.

여러 차원을 유랑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수집’해 온 그녀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을 가질 정도로 흥미롭다.

가슴께 근처가 쿵쾅거리는 것이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느낌이다.

다음에는 어떤 행동을 보여 줄지, 어떻게 자신을 놀라게 할지. 매 순간순간이 기대된다.

“마법사, 너는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건가.”

‘…적어도 이 재미없는 녀석보다는 훨씬 낫지.’

그녀는 싸늘한 시선을 발카서스 쪽으로 돌렸다.

제법 강력한 영능력자라서 나름 쓸 만한가 싶어서 죽어 가는 것을 살려 줬더니, 자신이 이미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오진환이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자마자 또 밀려 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재미가 없어졌다’라는 것은, 이용 가치가 떨어졌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아, 네네. 뭐라도 좀 도와드려야지~.”

그렇게 말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아공간을 연다.

말은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진짜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적당히 발버둥 치다가 알아서 오진환한테 처리당하라지.

‘이번엔 얼마나 빨리 끝낼 거야?’

그녀는 기대에 찬 눈으로 영상 너머의 오진환을 바라보았다.

설국에서도 그랬듯이, 이 남자는 뜸을 들인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이다.

그녀의 예상으로는.

발카서스가 이 남자에게 처리당하는 것은, 결코 오늘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 * *

“성녀님의 상태는 어떠십니까?”

자신을 에밀리아라고 소개한 기사 한 명이 열정적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눈 안쪽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신앙심 비슷한 것이 무서울 정도다.

아마 이 잔존 세력의 지휘관쯤 되는 사람인가 본데, 이런 사람부터가 반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방금 ‘성녀’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성녀님께서는 항상 우리들 곁에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언제라도 강림하시어 저희를 도와주실 겁니다.”

[이젠 아주 물 흐르듯 사기를 치는군…….]

짐짓 경건하게 꾸며 낸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내 옆으로 수호령님의 핀잔이 들려왔다.

뭐, 사람이 하다 보면 뭐든지 느는 법이지.

실제로 내 연기도 제법 물이 올랐는지, 성녀님의 소통 창구의 일종인 ‘계시자’라는 설정으로 입을 털고 있음에도 제법 잘 먹혀들어 가는 모양새다.

“그리고 성녀님께서 복음을 내리고 가셨으니, 모두 귀를 열고 경청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오…….”

마치 종교적 지도자라도 된 것처럼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주변에서 탄식과도 같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 악몽과도 같은 사태에 휩쓸린 무고한 시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약해서.

각자 몇 명 단위로 조를 나눠 내가 미리 빼돌려 놓은 이너 서클의 영능력자들과 합류해서, 그 녀석들과 협동할 것.

그리고 그렇게 유격대 형식으로 같이 움직임으로서, 내가 찍어 놓은 위치에 있는 ‘시설’을 모두 파괴할 것.

“…….”

일단 영능력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제법 뜨악한 표정을 짓는 녀석들이 몇 명 있었지만, 이 또한 성녀의 뜻이라고 말하자마자 곧바로 수긍해 버렸다.

뿌리 깊이 들어차 있는 사상조차 단번에 포기하는 모습이 실로 무서울 정도다.

[…니샤, 그 아이 말일세. 이 사태 끝나고 과연 수습이 가능하겠나? 이 정도로 사람들이 열렬하게 따르는데.]

‘그건 그때 가서 또 어떻게든 해야지…….’

[…….]

수호령님이 입을 다문 사이, 기사단 중 한 놈이 손을 번쩍 들며 질문했다.

“계시자님, 말씀하신 시설들은 대체 무엇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대충 내가 아는 거창한 어휘들을 총동원하여 아무튼 사특하고 불길하며 최대한 빨리 부숴야 할 것들이라고 설명한다.

뭐, 간단하게 줄이면 그냥 ‘망자 생성 장치’지만.

[망자 생성 장치?]

‘그놈 이명이 망자의 왕 뭐시기잖아. 그런데 지금까지 망자는 단 한 놈도 나온 적이 없지?’

[그것도 그렇군.]

그건 아직 이 사태가 본격적으로 시동도 걸리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이 녀석이 굳이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로 세뇌하는 것은 그냥 준비 단계거든.

일단 당장 사상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보통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으니까, 그 점을 노린 거지.

그리고 그렇게 세뇌된 충분한 숫자가 모였다고 판단한다면, 발카서스가 스테이지 시작 전에 런던 곳곳에 박아 둔 이 망자 생성 장치 근처로 다가가서.

일종의 ‘의식’을 치른다.

[의식?]

‘뭐, 간단하게 말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망자로 바꿔 버리는 거야.’

[맙소사. 그렇다는 건…….]

경악하는 수호령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지금 세뇌당한 수많은 사람을 전부 ‘재료’로 쓴다는 소리지. 런던은 한 방에 죽음의 도시가 될 거라고.’

거기에 한 가지 더.

지금도 세뇌당한 사람들은 비약적으로 스펙이 강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죽고 살아나서 ‘망자’ 판정을 받는다면 적어도 지금의 몇십 배 이상으로 위험해질 것이다.

발카서스는 망자의 왕이란 이명대로 그런 객체를 보조할 수단을 수도 없이 가지고 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그렇게나 위험한 망자 군단을 영국 곳곳에서 생성해 낸 발카서스가 유럽을 침략하는 것이 스테이지의 시작이지만.

‘그러면 할 일도 간단하지.’

이런 스테이지는 애초에 시작하는 것 자체가 지뢰다.

나름 구원자 타이틀을 달고 있는 입장에서 불쾌하기 짝이 없달까.

그러니까.

‘시작도 못 하게 조지는 거야.’

나름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다른 세계를 침략한 데다가, 신사적이고 이성적인 설국 사람들은 꽤 시간을 들여서라도 내 편으로 끌어들였지만.

“…….”

시계를 확인한다.

슬슬 자정을 지나는 시각이다.

일출까지는 몇 시간 정도 남았으려나.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놈은 못 보겠지.‘

그 전에 내가 죽일 거니까.

다짜고짜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 인형으로 부리려는 음습한 놈은.

봐줄 필요도 없다.

‘옆에서 조금만 알려 줄 사람이 있으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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