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엘븐 포레스트 (1)
“열심히 훈련했으니까, 보상으로 숲에 캠핑하러 가는 거라며…….”
울분이 잔뜩 응축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캠핑, 하러, 가는 거라며어어어-!”
물론, 캠핑하는 장소가 여느 장소에 비해 조금 많이 험악하긴 하다.
아마 이 녀석들도 행선지를 들은 용의 장로가 미친놈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말렸을 때 뜨악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키릴에게 업혀 운반당하는 도중에 뒤를 흘끔 돌아본다.
사람보다도 더 커다란 벌 떼가 바짝 따라와 여길 쫓아오고 있었다. 하늘이 아예 저 녀석들로 가려질 만큼 무시무시한 숫자다.
거기에 문제가 뭐냐면.
저거 한 놈 한 놈이 헌터 협회의 등급 분류로 따지자면 S급 마수에 들어가는 놈들이지.
도시 하나도 괴멸시킬 수 있는 전력이 지금 나, 키릴, 윤겨울, 파에톤, 이렇게 4명에게 달라붙어 쫓아오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뛰고 있는 윤겨울이 귀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죽여 버린다, 오진환. 이놈 언젠가는 내 손으로 죽여 버린다, 꼭 내가 언젠가는…….”
“겨울아, 그럴 기력 있으면 좀 더 빨리 뛰어!”
그런 아수라장이 한참이나 이어진 뒤.
간신히 벌 떼를 뿌리치고는 거의 탈진한 녀석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피식 웃으며 바라본다.
이야, 그래도 저거에서 벗어나는 걸 보니까 훈련을 그렇게 한 것이 허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여긴… 지옥이야… 하나만 만나도 재앙인 녀석들이 무더기로 널려 있어…….”
윤겨울이 숨을 헐떡거리며 내놓는 한탄을 무시하며, 장로에게 받아 온 마력 지도를 연다.
흠.
그래서 앞으로 일정이…….
“…오진환 씨, 설마 여길 계속 돌아다닐 예정?”
“일단은 그런데.”
“내가 웬만해서는 이런 말 안 하겠는데. 여기서 1시간만 더 있다가는 우리 전부 전멸하겠어. 지나가다가 마주치는 적 하나하나가 고등급 게이트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차원종들이라고.”
사실 말에 어폐가 좀 있는데.
여기 있는 놈들은 게이트의 마력에 영향을 받아 ‘변이’된 차원종이 아니라.
그냥 여기 토착 생물들이다.
진짜 무시무시한 놈들은 아직 만나보지도 않았다고.
물론 거기까지 말했다간 이 녀석들의 의지가 아예 꺾여 버릴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그보다.”
파에톤이 쥐고 있는 별철 무기를 턱짓으로 가리킨다.
“느낌은 좀 어때. 색깔 벗겨지고 나서 뭔가 달라진 게 느껴져?”
내 말에 옆에서 애꿎은 윤겨울이 움찔했다.
파에톤은 성공한 탈피 작업을 이 녀석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이내 괜히 찔리는 눈치로 나와 파에톤을 번갈아 바라본다.
“…열심히 한 거 아니까 너무 그러지 말고.”
“누, 누가 뭐래!”
괜히 그러고 있는 게 안쓰러워서 한 마디 얹어 줬는데, 역으로 잔뜩 성이 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귀까지 붉어진 녀석이 나한테서 고개를 휙 돌렸다.
“뭐.”
파에톤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 말을 받았다.
“내가 말하면서도 이상한 소리지만… 무기가 나와 교감하면서 함께 커 간다는 느낌? 예전에도 잘 듣는 좋은 무기였지만. 지금은 꼭 내 신체 부위의 하나처럼 느껴질 정도야.”
오.
‘핵심을 잘 짚었군.’
사실 그래서 여기에 온 것이다.
별철의 ‘탈피’ 작업이 끝난 이후로 필요한 것은 사용자들의 정신과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넣을 정도로 혹독한 전투의 반복이거든.
그 과정에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무기와 ‘일체화’가 이루어져, 나중에 가서는 본인이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이루는 것이 바로 별철의 재형성 과정이다.
“…그런데 그거랑은 별개로, 오진환 씨 말대로 여길 계속 탐험하는 것은 무리야. 이미 모두 체력이 고갈 상태인걸.”
“괜찮아. 슬슬 거의 다 왔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마력 지도를 접는다.
“다 와? 어딜?”
“…키릴이 아주 좋아할 만한 곳.”
다행히 여기는 게임 안에서 자체적으로 배치한 ‘도우미 NPC’가 있는 곳이거든.
* * *
엘프라는 종족이 있다.
판타지 세계관이면 항상 등장하는 그 약방의 감초 같은 종족 말이지.
구성원의 대다수는 미남 미녀에, 귀가 뾰족하고, 활을 잘 다루는 정도가 공통으로 그려지는 특성이고.
작품에 따라서는 평화와 숲을 사랑하고 자연의 친구이며 무분별한 파괴를 일삼는 인간을 증오하는 정도의 속성이 추가로 붙기도 한다.
구원자의 길에서 등장하는 엘프도 몇 가지 특성을 공유하기는 한다.
귀가 뾰족하고, 대다수가 미인이며, 활을 잘 다루는 것 정도까지.
그 외에는.
“웬 놈들이냐.”
눈앞에서 볼 수 있다시피, 그런 말랑말랑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놈들이다.
적어도 키가 2m는 넘는 것이 분명한 엘프 경비병을 보고 있으니 없던 예절도 주입될 것 같은 느낌이다.
얼굴을 포함한 전신에는 얼마나 살벌한 전장을 거쳐 왔는지 대번에 알려 주는 흉터들로 가득했다.
[…미남이긴 하군. 확실히.]
그러니까, 미남이긴 한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숲에서 작은 동물들과 하하 호호 하기보단 쌍수 도끼로 곰의 모가지를 날리고 있는 것이 훨씬 어울릴 외양이다.
“남자가 이래야지.”
옆에서 키릴이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두통이 지끈거릴 정도다.
하여간, 끼리끼리 논다고.
“…용족 장로의 소개로 왔습니다. 잠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장로가 쥐여 준 ‘우호의 증표’를 내민다.
말이 우호의 증표지, 기괴한 형태의 뼈를 짐승의 혈관으로 감싼 물건이다. 생긴 것만 보면 무슨 악마 숭배 집단의 상징 같은 물건인데.
그걸 받아든 엘프 경비병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이 부적은 훌륭한 사냥꾼의 증표야.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닌 모양이네.”
“그렇습니까?”
“그래. 생긴 것도 괜찮은데? 집에 있는 마누라한테 가져다 주면 좋아할 것 같아.”
“…….”
등 뒤에서 파에톤과 윤겨울의 뜨악한 시선이 느껴진다.
대체 자신들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냐는 의문이 그득하게 담긴 것이 분명했다.
“주인, 왜 여기에 좀 더 빨리 오지 않은 거야?”
마치 휴양지에라도 온 것 같은 표정의 키릴은 잠시 내버려 두고.
* * *
엘프들의 거주지 내부 시설은, 뭐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석조로 만들어진 건물이 여러 개 보였던 설국과는 달리, 이쪽은 진짜로 ‘야만’이라는 게 뭔지 대놓고 보여 주는 느낌이다.
풀과 나무로 엮어서 만든 움막이 대다수에, 내부를 치장하고 있는 것은 사냥의 전리품인 것이 분명한 짐승들의 뼈들.
“훌륭한데.”
파에톤이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이거, 대충 만든 것처럼 보여도 전부 다 특별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자재들로 건축한 시설들이야. 보통 기술이 아닌걸.”
“그렇겠지.”
그런 기술이 없으면 살아남기도 힘든 곳이니까.
“이 사람들은 굳이 이런 장소에서 살고 있단 말이야? 대체 왜?”
“오히려 여길 벗어날 이유라도 있나? 나 같아도 여기 살 것 같은데.”
“…뭐?”
“이 정도로 훌륭한 주둔지가 있으면 매일매일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전투를 할 수 있겠는데…….”
잔뜩 신이 난 키릴의 말에 윤겨울이 할 말을 잃어버린 모습에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우리와는 생각하는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문득 생각난 어구를 곱씹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엘프들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지정된 이 사이드 스테이지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꽤 호불호가 갈리는 곳이다.
싫어하는 쪽의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사이드 스테이지 치고는 너무 높은 난도를 이유로 꼽는다.
당장 여기서 만날 수 있는 몇몇 이벤트 보스의 경우엔 메인 스테이지의 보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전투 난이도를 자랑하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여길 좋아하는 쪽의 이유 역시 명확하다.
만약 자신의 실력에 자신만 있다면.
단기간에 가장 많은 보상을 챙겨갈 수 있는 스테이지 중 하나가 바로 여기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뒤숭숭한데?”
키릴이 볼을 긁적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다들 분위기가 좀… 날카로운걸. 비상사태라도 되는 것 같아.”
실제로 키릴의 말대로, 주변을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엘프들의 모습은 흡사 전쟁 직전의 상태를 방불케 했다.
뭐.
내가 암기하고 있는 게임 안에서의 타임 라인에 따르면, 마침 딱 ‘사고’가 터질 시기에 맞춰서 온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니까 가야 할 곳도 정해져 있다.
재빠르게 걸음을 재촉하여, 마을 정중앙에 박혀 있는 거대한 나무 앞에 당도한다.
줄기를 따라 조그마한 건물들이 덩굴로 묶여 있는 모습은 마을 회관같이 소박하고 목가적인 외관이다.
근처를 지키고 있는 것은 맨손으로 그 나무를 통째로 뽑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기골이 장대한 녀석들뿐이었지만.
“…….”
성큼성큼 다가오는 나를 보고 눈가를 좁히는 녀석들에게, 일단 용의 장로가 쥐여 준 우호의 증표를 들이민다.
“안녕하세요, 큰 나무 마을의 엘프 여러분.”
내 말을 들은 엘프 전사들이 흠칫했다.
이 녀석들에게 마을 이름은 일종의 암구호 비슷한 거라서.
아무리 우호의 증표를 들고 있다 해도 나 같은 이방인이 다짜고짜 입에 담을 만한 것이 못 되거든.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이런 말을 해도 공격당하지 않을 이유 정도는 성립된단 의미이다.
“여왕님께서 납치당한 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왔습니다.”
* * *
사이드 스테이지인 엘프의 숲에서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이 ‘여왕 납치’ 이벤트다.
내용은 어느 날 갑자기 혼자 사냥을 나가서 행방불명되어 버린 여왕을 되찾아 오는 것이 골자인데.
이런 흔해 빠진 내용의 퀘스트가 가장 유명한 이유는 간단하다.
두 줄로 요약해서.
지랄 맞은 난이도.
눈이 돌아가는 보상.
사실상 이 스테이지의 정체성을 담당하고 있는 이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결국 내가 엘프들에게 약속한 것은 ‘여기 있는 인원만으로’ 여왕을 되찾아 오겠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안쪽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필요한 보급품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시 숲으로 나온 참이고.
“…우리한테 조금만 상의해 주고 일을 저지르면 안 될까?”
윤겨울이 10년 정도는 늙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분명히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지만 어째 아까 전보다 더 피곤이 켜켜이 쌓인 것 같은 모습이다.
“조금 전까지 살아남는 것도 겨우 했는데, 우리끼리만 그 여왕인지 뭔지를 어떻게 찾아오라고…….”
글쎄.
걱정은 이해하지만.
다행히 우리의 진짜 목적은 여왕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 퀘스트를 ‘원래대로’ 해결한다면 그냥 이런저런 보상을 받는 것으로 끝나겠지.
물론 난이도가 난이도이니만큼 정상적으로 받는 보상도 탁월하지만.
내 생각대로라면,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가져갈 수 있다.
세상은 뭐든 효율이잖아.
쉽게 풀어서 최대한 많이 뽑아먹을 생각부터 해야지.
“겨울아, 오진환 씨가 또 나쁜 생각을 하는 것 같지?”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그냥 쟤가 저런 표정 짓고 있으면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
이것들이 아주 그냥.
[그런데, 그래서 그대가 말한 진짜 목적이 무엇인가?]
뭐.
일단 이 숲에 온 근본적인 이유인 윤겨울이랑 파에톤의 경험치 쌓아 주기는 당연하고.
그건 지금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계획표를 충실히만 따라가도 충족될 목적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노리는 두 번째 목적은.
‘수호령님, 수호령님이 보기에도 저 엘프들 보통내기가 아니지?’
[그렇… 네만? 애초에 이런 장소에 군락을 만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보통은 아니지.]
‘그럼 있잖아.’
씩 웃는다.
‘내가 저 사람들을 손짓 발짓으로 부릴 수 있는 위치가 되면, 참 좋은 일이겠지?’
[…뭐라?]
바닥에 퍼져서 축 늘어져 있는 윤겨울과 파에톤을 본 키릴의 입가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