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집결
쉬카펠은 분위기와 치장에 꽤 많은 신경을 들이는 사람이었다.
수상쩍은 마녀의 포지션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역시 눌러쓴 후드와 수정 구슬 정도는 준비해 놔야 어울린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 중 하나일 정도니까.
그런 면에서.
최근 자신이 이 남자에게 쏟고 있는 관심은 이상하리만치 비틀린 것이 분명했다.
수정구 너머로 보이는 오진환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달뜬 한숨이 흘러나왔다.
“인간들, 용족, 그리고 엘프들…….”
기나긴 세월을 거쳐 온 그녀의 입장에선 한 줌으로도 치기 힘든 시간 만에 이 모든 세력을 규합한 것이다.
자신도 이 남자보다 짧은 기간 안에 이 세력들을 포섭할 방법을 떠올리라면 아마 막막해지겠지.
“하아아…….”
이제는 거의 위험한 수준의 열기가 느껴지는 한숨이 다시 한번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의 몸에 집어넣은 수많은 마력 각인 때문에 이제는 뛰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운 심장 고동이 들려오는 느낌이다.
이 남자.
최고다.
평생 남에게 이 정도의 흥미를 느껴본 적은, 그녀로서도 기억나는 대상이 없을 정도다.
“…부탁하신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주변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쉬카펠은 수정구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손만 휘휘 저어 주었다.
그 근처에 대충 늘어놓으라는 소리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이렇게 자신한테 직접적으로 가져왔다고 보고가 들어올 정도면 틀림없이 그녀로서도 어느 정도 흥미를 느낄 만큼 귀중한 물건임이 틀림없을 텐데.
지금은 그냥 다른 것보다도 이 남자를 보고 있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
하지만, 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잠깐 그녀의 신경을 돌려놓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감히’ 그녀의 앞에서 그런 티를 낼 만큼 간이 큰 녀석이 있다는 점이 흥미를 끈 것이다.
‘아, 이 녀석이었나.’
그녀 취향대로 개조한 ‘실험체’ 중 하나.
나름 자기 차원에서는 전설이라고 불릴 만큼의 위업을 쌓은 녀석이었지만, 그녀가 장난삼아 조금 어루만져 주니 자신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이다.
“왜? 용건이 더 있어?”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그녀의 신경은 온통 이 수정구 너머의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당장 이 녀석은 그냥 귀찮은 방해물에 불과했으니, 짜증이 잔뜩 난 어투로 말이 튀어 나가는 것도 불가항력일 것이다.
“…아닙니다.”
“그럼 빨리 나가.”
이 남자를 쳐다보고 있는 시간의 1분 1초가 귀중한데, 이런 녀석한테 정신을 돌릴 시간조차 아깝다.
쉬카펠의 어투에는 그런 감정이 듬뿍 묻어 나오고 있었다.
“…….”
그래서 그녀는.
상대방이 대단히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수정구 너머의 오진환을 응시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이름: 오진환
(스탬피드의 심장 효과 적용 중!)
직업: 수호자 (예비), 구원자
스킬: <강체술> <궁사의 집중> <성흔> <무명검> <영체화>
특성: <위기 감지> <영매>
특이사항 - 영혼의 정수 습득(54 중첩)
화산의 가호 습득]
그렇지.
맨 마지막 줄에 추가된 문장을 보고 싱긋 웃는다.
화산의 가호라고 함은 수르트의 조각을 가공하여 섭취함으로써 얻어 낸 능력이다.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효과야 간단하게 마력 운용에 보너스를 주는 것이 전부지만.
어마어마한 수준의 ‘화염 저항력’을 준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뭐, 딱 봐도 한정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능력이라 대다수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이용하기는 힘들지.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취할 행동에서만큼은 없어선 안 될 핵심 요소다.
[그대, 몸에 불이라도 붙일 일이 있는 건가?]
‘아마 곧 많이 생길걸.’
특히 스테이지 4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처리해야 할 선결 과제에서, 화염 저항력은 없으면 안 되는 수준의 필수 스텟이다.
스테이지 4. 이름 없는 골짜기.
쉬카펠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스테이지이자, 대처 난이도가 본격적으로 훌쩍 올라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아예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초전박살을 냈던 스테이지 3와는 다르게, 이쪽은 쉬카펠이 자기 휘하에 있는 놈들을 굴려서 조직적으로 일으키는 사태거든.
그걸 위해서 나도 내 세력이라고 부를만한 녀석들을 포섭해 둔 거지.
일단 지금 내가 모아 둔 정도만 되어도, 내가 원작 게임을 진행하면서는 이렇게 잘 풀린 적이 없을 정도로 태세가 잘 갖춰진 느낌이다.
‘그 녀석에게 해 둔 약속도 있고…….’
쉬카펠에게 일전에 말해 둔 내 ‘목적’을 생각한다면, 그 녀석도 당분간 나한테 간섭을 일절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재미있는 걸 보여 준다고 하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달라붙을 녀석이거든.
내가 세력을 엄청난 속도로 불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위기감은커녕 잘한다고 손뼉을 칠 녀석이지.
“자네 제정신인가?”
그런 면에서.
김진성 씨가 그런 쉬카펠의 태도를 조금만 본받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김태화 씨의 아버님이자, 대성 그룹의 회장님인 사람 말이지.
오랜만에 직접 얼굴을 보러 와서 필요한 것 좀 해 달라고 들이밀었더니, 미친놈 취급을 너무 적나라하게 당하고 있다.
“왜 그러십니까. 솔직히 이 정도 지출이야 감당할 수 있으시면서.”
내가 말한 내용이 엄청난 지출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이쪽도 용의 장로한테서 받아온 금은보화를 추가로 지불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상태다.
그거 처분만 해도 솔직히 이 정도는 여유일 텐데 말이야.
“할 수야 있지. 하지만 사업가라면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만 돈을 쓰는데 말이야.”
“뭐, 그거라면 확실하게 있죠.”
피식 웃으며 당장 김진성 씨 뒤편에 걸려 있는 게시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김태화와 관련된 모든 기사나 자료가 정성스럽게 손질되어 걸려 있었다.
이걸 누구나 볼 수 있는 위치에 떡하니 걸어 둔 것 자체가 이 양반이 얼마나 팔불출인지 보여 주는 느낌이지.
“요즘은 또 김태화 씨가 대세 아닙니까. 방송도 타고, 온갖 단체에서 이런저런 섭외도 들어오고. 인지도만 보면 대성 그룹 간판으로 써도 될 만한 수준이던데요?”
물론 그렇게 이 사람이 유명해진 이유야 간단하다.
런던의 영능력자 사태를 효과적으로 종식한 녀석은 나지만, 내가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바쁜 사이 내 대변인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바로 저 사람인데.
그 동안 금방 인지도가 껑충 오른 거지.
“…….”
그리고 거기까지만 말했는데도, 김진성 씨는 내 문장의 맥락을 대충 파악한 모양이었다.
물론 김태화 씨가 런던에서 보여 준 활약이 보통은 아니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지금의 인지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차원종’과 최초로 협력하여 사태를 종식했다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전까지는 무조건 적으로만 여겨지던 놈들의 지휘관으로 앉아서 사람들을 구해 냈으니, 평등과 조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때.”
김진성 씨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저만큼 성공적인 ‘선례’를 만들어 뒀다면, 거기서 추가적인 확장을 꾀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자네 성격에.”
“그럼요.”
김태화 씨가 저렇게 좋은 이미지를 많이 구축해 뒀으니.
이런저런 차원종들을 본격적으로 이쪽 세계에 끌어들여 굴리기 위한 선결 조건은 완료된 셈이다.
내가 김진성 씨에게 말한 내용도 그런 쪽이고.
내가 제출한 ‘제안서’가 한숨과 함께 다시 이쪽으로 넘어왔다.
“문서 양식은 개판이군. 나중에 따로 배우던가 하게.”
“…제가 가방끈이 좀 짧아서.”
“아이러니하군.”
실소와 함께 제안서의 첫 장을 가리킨 김진성 씨가 그렇게 말했다.
“양식과는 별개로, 이런 발상은 어지간히 담이 크지 않고서야 못 하는데 말이야.”
척 보기에도 눈이 돌아갈 만한 숫자들의 향연들은 모두 한 가지 내용으로 축약되어 있었다.
땅과 물건을 산다.
종류와 가짓수는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 의미는 모두 한 가지로 축약된다.
내가 지금까지 규합한 세력들을.
한 가지 목적 아래에서 굴린다.
“자네, 자기 나라라도 세울 생각인가?”
“설마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냥. 손봐 줘야 할 녀석이 있거든요.”
* * *
“보통 이런 라인업을 세워 놓고 사람을 손봐 준다고 하나, 대장?”
키건이 손안에 있는 서류를 팔락팔락 넘기면서 그렇게 물어왔다.
내가 이쪽에 불러 모아 둘 면면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런던에서 그런 깽판이 일어날 때도 어떻게든 최소 인원으로 상황을 끝낼 생각하던 인간이, 이번에는 대체 무슨 일이 터지길래 이 수준까지 인력을 끌어 모으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키건 앞으로 다른 서류도 툭 던져 준다.
해당 서류에는 내가 여왕과 상의해서 부를 수 있는 ‘엘프’ 인력들을 정리해둔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 녀석은 이걸 말하려고 불렀으니까.
“아마, 네가 그 사람들 앞에서 활을 좀 잡아야 할걸.”
녀석의 표정이 굳었다가.
이내 늘어졌다가.
이어서 싹 사라졌다.
“하.”
항상 넉살 좋게 싱글싱글 웃고 다니는 녀석치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릿한 미소가 이내 그 공백을 가득 메웠다.
“또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 대장.”
“천천히 생각해 봐.”
나도 당장 이 녀석한테 그런 내용을 강제로 밀어붙일 생각은 없다.
본인은 그 사실에 아주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다른 녀석들은 일단 다음 스테이지에서 먹힐 만큼 키워 뒀으니까…….’
파에톤은 엘프의 숲에서 연이어 거친 전투를 통해 재형성에 거의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아마 스테이지 4가 시작할 때쯤엔 무리 없이 그 과정을 마치겠지.
윤겨울의 무기는 엘프 여왕님이 심신을 갈아 넣으면서 제작 중일 거고.
니샤는 아서와 함께 이런저런 수업을 거쳐 원래보다 훨씬 강력한 영능력자가 될 것이다.
“…….”
그런 면에서, 이 녀석은.
그렇게 이것저것 신경 써 줘서 다른 녀석들을 강화한 것에 비해서, 그냥 ‘활을 잡는다’라는 액션 하나만으로 그 모든 간극을 따라잡는 것이 가능하다.
인게임에서도 이 녀석이 활을 잡았을 때와 잡지 않았을 때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하늘땅 차이였으니까.
스테이지 4의 난이도를 생각한다면 억지로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바람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숙소 전체가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진다.
처음에는 그냥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 뒀는데, 계속 커지기만 하고 음량이 줄어들 생각을 안 한다.
“왜 이렇게 시끄럽냐?”
“…아, 그거?”
키건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 용 아가씨가 왔었거든.”
“아, 그래?”
난 여기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키건을 호출하느라고 몰랐었는데, 루드밀라가 이쪽에 방문한 모양이다.
갑작스럽게 용종이 숙소 안으로 쳐들어왔으니 이런저런 소란이 일어날 법하지.
“왜 왔는지는 혹시 알아?”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했어.”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
내가 만져 두고 온 알들이 슬슬 부화하기 시작했다는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
그거 좋군. 장로가 이쪽을 우호적으로 대할 이유가 늘어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등골을 타고 미끄러졌다.
“…혹시 걔 지금 누구랑 같이 있냐?”
“그… 윤겨울 아가씨가 끌고 가는 것 같…….”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재빠르게 복도를 박차고 뛰어나간다.
지금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최악의 상황이 절찬리에 펼쳐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최악의 상황?]
그게 말이야.
까딱 잘못하면, 내가 윤겨울한테 죽을 수도 있거든.
[…뭐라?]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오진화아아아아아안! 당장 안 튀어와-!”
포효에 가까운 외침이 숙소 안쪽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인간, 그래서 나는 왜 부른 거야? 나는 오진환한테 볼일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