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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속 구원자가 되었다-79화 (79/135)

79화 이름 없는 골짜기 (1)

뭐, 스테이지 4에서 결정적인 활약은 키건에게 맡겨야 한다지만.

그렇다고 다른 녀석들을 안 키우는 것도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왕님이 초주검 직전의 상태로 완성한 낙일검을 윤겨울에게 전달해 준다.

“…이게 그거야?”

한창 훈련 중이었는지, 가벼운 차림으로 땀을 닦아 내던 윤겨울이 내가 건네준 검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면서 물어왔다.

…그런데.

좀 가리지. 노출된 면적이 너무 높은데.

이 녀석은 검에 신경을 쏟느라 그쪽은 제대로 알아차리지도 못한 모양새다.

“낙일검같이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길래, 딱 봐도 무시무시한 물건이 나올 줄 알았더니… 생긴 건 생각보다 평범한데?”

글쎄. 뽑아 보면 느낌이 또 다를걸.

태양도 떨구는 검이라는 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니거든.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다.

애초에 이 녀석한테는 이 무기에 익숙해질 시간을 줘야 하고, 여기에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으니까.

“…….”

근처에 있던 윤봄이 흠칫했다.

내 시선을 보자마자 뭔가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모양이지.

“잠깐 나갈까요?”

“…언니 데리고 뭐 하려고?”

곧바로 윤겨울한테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면서 입고 온 외투를 던져 준다.

“…뭐야?”

“다 비치니까 가리라고.”

“……!”

그제야 자신이 무슨 상태인지 깨달은 녀석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동안, 윤봄을 데리고 재빠르게 빠져나온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겨울이 몰래 이렇게 둘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무슨 밀회 같잖아요.”

“비슷하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며 짓궂게 웃는 모습을 보고 나도 마주 실소를 흘린다.

그래. 이런 모습이 원래 이 사람의 본 성격에 가깝다.

“예전보다 많이 밝아지셨네요.”

“덕분이죠.”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그동안 헛짓거리를 하지는 않았구나, 하는 묘한 감상이 떠오른다.

협회장한테 붙들려서 감정 표현도 희박했던 때랑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지.

그래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미안한데.

“저번에 했던 약속, 기억해요?”

윤 자매에게 쉬카펠이 검제를 보내기 전에 이 사람과 했던 말이 있었지.

내가 바라는 건 뭐든지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었다.

“어머. 대체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으시는 거예요?”

그렇게 장난스럽게 물어오는 말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용건을 말한다.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난잡하고… 미묘한 이야기다.

스테이지 4 진행 과정에서 꼭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을 이 사람에게 부탁하는 거니까.

아마 주로.

윤봄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던 미소는, 이야기를 끝낼 즈음에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진심이에요?”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것 본 적 있으십니까.”

“하지만, 그건…….”

윤봄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착한 사람에게 이런 부탁은 틀림없이 커다란 부담이 되겠지.

“저한테 무슨 일이든지 하신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럼에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딱 잘라서 말하자, 윤봄이 입을 딱 다물었다.

“…겨울이가 슬퍼할 거예요.”

“그러려나?”

“그럼요. 그러니까 약속해 줘요.”

윤봄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꼭 저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무슨 딸내미 시집보내는 어머니처럼 말씀하십니다?”

윤봄이 혀를 살짝 빼물었다.

“비슷하지 않나요?”

* * *

마력 각인을 새겨 넣는 것은 대단히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고급 각인 중 하나인 ‘인장’만 해도 그 공정은 거의 국가 단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수고가 들어가니까.

‘그러고 보니, 오진환도 하나 달고 있지 않았나?’

쉬카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왼팔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인장이 가진 의미는 자신의 이명이나 다름없는 ‘수집자’이다.

그에 반해, 그 남자의 것은 제법 흉흉한 의미를 지니는 인장이었지.

“와일드한 남자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자니, 옆에 있던 부하가 자신을 돌아보았다.

“시키실 것이 있으십니까?”

“유머 감각을 좀 가져 봐.”

“…죄송합니다. 하명하신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응. 그 모습만 봐도 실패네.”

쉬카펠은 피식거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여간, 자신 주변에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다 묵직하게 분위기 잡고 다니는 녀석투성이라서.

전투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옆에 두고 있으면 하품이 나올 만큼 따분한 녀석들뿐이다.

그녀가 자신의 ‘실험체’와 ‘수집품’을 구분하는 이유도 거기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가지고 싶은 것을 그녀가 직접 만들려고 해도, 이미 완성된 ‘수집품’에 비해 그녀의 ‘실험체’는 항상 빛이 바랬으니까.

그런 면에서.

‘당신은 진짜 완벽한 사람이란 말이야, 오진환.’

휴대용 수정구 안에서 비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쉬카펠의 눈이 거의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수집품’의 가치가 아직 모자라 보여 원석을 다듬듯이 이런저런 시련을 내리는 일은 그녀로서도 자주 하는 일이었지만.

이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완벽함 그 자체였다.

이 정도로 짧은 시간 만에 그녀를 매료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그리고 그렇게나 자신을 매료한 사람이니까.

이번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너무나 궁금한 것이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 그래?”

부하가 그렇게 알려오자, 그녀가 씩 웃으면서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마력 각인을 새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몸에 조그마한 각인을 새기는 것도 그런 판에.

지금 그녀가 하려는 것처럼 ‘땅’ 단위로 행하려면 어마어마한 대가가 요구되는 것은 틀림없겠지.

“흥.”

하지만, 그녀는 다차원 순례자 쉬카펠이다.

어마어마한 대가가 요구되었건 어찌 되었건 간에.

그녀가 원하면 그냥 할 뿐이다.

지팡이를 타고 어마어마한 마력이 공명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부하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진’에 따라 허공에 거대한 각인을 새겨 넣는다.

그리고 그에 따라.

각인에 담긴 의미에 따라 공명하던 지반 중 일부가 주변으로부터 도려내듯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정확한 크기는 그녀도 즉흥적으로 정한 것이지만.

못해도 섬 하나 크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

능히 하늘을 울리고, 지축을 뒤틀고, 바다조차 끓일 마력의 폭풍으로 지탱되는, 하늘을 떠다니는 골짜기.

공중에 떠오른, 입이 떡 벌어지는 크기의 땅덩어리가 주변에 드리우는 그림자만 봐도 장대할 지경이다.

“있잖아. 유머 감각을 좀 가져 보라 그랬잖아.”

그녀가 주변에 있던 부하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위업을 방금 이룬 사람치고는 대단히 가벼운 목소리였다.

“한번 훈련해 보자. 내가 이런 일을 왜 하는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부하가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오진환이라면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말이지.

* * *

“장로님, 사람이 피규어를 모으다 보면 제일 하고 싶어지는 게 뭔지 알아요?”

“피… 뭐라고?”

“엄청 비싼 진열장을 사는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이런 유머 감각 없는 사람 같으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뉴스에서 실시간으로 방송 중인 영상을 바라본다.

스테이지 4. 이름 없는 골짜기.

그 배경이 되는 ‘섬’ 그 자체가 바로 저것이다.

“…정말 오진환 헌터님 말대로네요.”

김태화 씨가 신음 비슷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사전에 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을 대피시켜 놓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못해도 수만 단위로 죽었겠죠.”

뭐, 내가 한 일은 협회 정보망을 풀로 가동해서 모은 데이터를 토대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의 주민들을 대피시킨 것뿐이다.

최근 내가 이상할 정도로 바쁜 이유도 다 이걸 하기 위해서였지.

“그래서, 그 진열장이라는 건 대체 무슨 소리지?”

“뭐, 간단하게 말해서. 자기 수집품을 엄청나게 돋보이게 할 만한 ‘장치’를 필요로 한다 그겁니다.”

“그래서. 그 마법사는 그런 장치를 만들기 위해 저런 짓을 했단 말인가?”

“아뇨. 저건 그냥 청소용.”

그렇게 말하며 주변에 내가 모아 둔 사람들을 하나하나 돌아본다.

엘프 여왕, 용족의 장로, 설국의 전사왕 그리고 협회 대변인으로 나와 있는 김태화 씨.

하나하나가 각 세력을 대표하는 인간들이다.

흡사 드림 팀이라도 꾸려 놓은 느낌이군.

지금은 내가 꺼내 놓은 말의 의미를 다들 파악하지 못한 눈치지만.

“쉬카펠은 좀 욕심이 많거든요. 만약 ‘진열장’이 가지고 싶었으면 저런 섬 크기로는 만족하기도 힘들 거라 그겁니다.”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을 이어 놓자, 가장 먼저 김태화 씨의 표정이 새파래졌다.

눈치도 좋으셔.

“…오진환 헌터님, 설마.”

차마 자기가 방금 떠올린 것을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김태화 씨를 대신해서.

모두에게 잘 보이도록 칠판을 하나 가져다 놓는다.

아래에 커다란 원 하나를 그려 놓는다.

그리고 그 위쪽에 조금 작은 원 하나.

작은 원에 골짜기-청소용이라 적어 넣고.

아래 작은 원에 땅-진열장이라 써넣는다.

그리고.

“쾅.”

작은 원에서 큰 원으로 이어지는 화살표를 긋는다.

충돌한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이런저런 특수 효과들도 그려 넣는다.

그때쯤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한 덕분인지, 내가 효과 하나를 그려 넣을 때마다 모두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미쳤군.”

장로에게서 그런 감상이 흘러나왔다.

“단순히 몇 명이 죽는다는 걸 걱정할 처지가 아니야. 저만한 질량의 물체를 아래쪽으로 단번에 충돌시킨다면…….”

“대륙 하나 정도는 통째로 작살 날 수도 있겠죠?”

“…그리고 그런 짓을, 무엇 때문에 한다고?”

“진열장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가 지금까지 모은 ‘수집품’을 적당히 어디 한군데에 몰아넣고 꾸미고 싶은데. 그냥 마침 거기에 있는 인간들이 방해된다 그거죠.”

심드렁하게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쾅. 청소해 버리자. 그런 겁니다.”

침묵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유일하게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나뿐이다.

뭐, 쉬카펠이 좀 미친년이기는 하지.

피식 웃으며 박수를 몇 번 친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함이다.

“다들 그렇게 너무 축 늘어져 있지 말고요.”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눈을 맞춰 주며 그렇게 말한다.

아니, 어디에 내놔도 꿀릴 것 없는 양반들이 뭐가 문제라고 그런 반응들이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제가 여러분들을 이렇게 불러 모은 거잖아요?”

“나, 나는 이 정도로 큰일이 있다는 말은 처음부터 못 들었는데…….”

소심한 목소리로 그렇게 반박하려는 엘프 여왕님의 말은 그대로 묵살한다.

“…하지만, 저걸 어떻게 막는다는 거지? 저 섬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마법사 본인이 발생시키고 있는 마력 폭풍 같은데. 술자 본인을 처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나.”

전사왕이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박한다.

“사실 술자 본인을 처리하는 방법도 꽤 문제가 되죠. 이미 저렇게 공중에 떠올라 버린 이상.”

만약 그냥 쉬카펠을 죽여 버린다고 하더라도, 골짜기가 그대로 떨어져서 지면과 충돌할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안 된다는 거지.

“그보다는 저 ‘섬’ 자체를 어떻게 하는 편이 훨씬 더 좋아요.

다행히.

이 자리에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발휘할 수 있는 인력들은 전부 모여 있는 상태다.

마법의 달인, 전투의 달인, 게으름의 달인.

“…당신, 나 싫어하지!”

울음기 섞어 외치는 엘프 여왕님은 일단 무시하고.

내 ‘계획’을 이래저래 설명해 준다.

뭐.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지.

장로는 박장대소하고, 전사왕은 남자답다며 만족했으며, 여왕님은 당신들 모두 미쳤다며 안 그래도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한층 더 절절해졌다.

“뭐, 익숙해지면 괜찮아요…….”

“이딴 걸 어떻게 익숙해져!”

“오진환 헌터님 옆에 한 달만 붙어 있으면 누구나 그렇게 될걸요…….”

여왕님의 말 위에 곁들여지는 김태화 씨의 충고 아닌 충고도 일품이었다.

해발고도 수 km까지 올라와서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겨우 전체의 윤곽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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