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사망 (3)
쉬카펠이 알기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격체들은 공통으로 무슨 일에든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오래 살았다’라고 한다면, 최소 그녀 단위로 수백 년 이상을 살아온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 정도로 살았다면 무슨 일이든 어떻게 굴러갈지 꿰뚫어 보고 있으니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건 반대로 말하면.
흥미가 가는 일이라면 무엇보다도 크게 집착하게 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일생일대의 흥밋거리가 날아가게 생긴 상황이었다.
“…….”
수정 구슬 너머로 ‘오진환의 시체’로 추정되는 육편 덩어리를 보면서, 쉬카펠이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들겼다.
“아니, 오진환 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뻔한 속임수 아닌가.
오히려 이런 것에 자신이 넘어올 거라 생각하는 게 화가 날 정도다.
뭐, 자신이 만들어 낸 이 요새는 저 오진환 씨조차 저런 방법을 사용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내부 구조를 자랑하기는 한다.
저기 있는 전력만 사용한다면 무슨 짓을 해도 여기까지 돌파할 수 없을 정도지.
‘그래서 무슨 방법을 쓸까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쉬카펠이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짜증스럽게 긁적거렸다.
자신이 띄워 올린 부유섬을 사용하여 이쪽으로 오히려 쳐들어온 것은 환상적인 결정이었다.
쉬카펠 본인도 그 결정에는 손뼉을 치면서 환호했을 정도였으니까.
역시 오진환이다. 역시 자신이 찾아낸 최고로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과연 저런 전력으로 어떤 방법을 써서 여기까지 돌파할까. 생일 선물을 받는 어린아이 같은 느낌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런 삼류 속임수는 아니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애초에 그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 저런 기초적인 함정에 넘어가 죽을 리가 없지 않은가.
쉬카펠은 그렇게 생각하며 수정 구슬 너머로 일어나고 있는 대혼란을 바라보았다.
대략적인 결론은 ‘일단 죽은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당분간은 오진환의 지휘를 기대할 수 없다’ 쪽으로 가닥이 추려지는 모양이다.
죽은 것이 확실하지 않다니, 무슨 헛소리람.
‘멍청이들…….’
그런 보석 같은 사람을 저렇게 평가 절하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화가 나기 이전에 그냥 한심하다.
무조건 살아 있는데, 그 사람은.
쉬카펠이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거렸다.
그 ‘가짜 시체’의 팔에 박혀 있는 ‘마력 패턴’을 보기 전까지는.
“…어라?”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마력 패턴은 분명히, 오진환의 팔에 박혀 있던 ‘인장’과 대단히 흡사한 모습이다.
그녀의 안목으로 봤을 때는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수준이었다.
“…….”
아니.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설마 진짜로 그 남자가 죽었겠어.
오히려 그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니까, 저런 마력 패턴을 남김으로써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인장이 그 정도로 만들기 쉬운 물건이던가?’
적어도 자신이 보기에도 완전히 똑같을 만한 물건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용의 장로까지 곁에 있다지만.
그런 생각이 마음속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자.
설마, 설마 싶으면서도.
한 가지 믿고 싶지 않은 가설이 마음 한쪽에 자리 잡는다.
‘…진짜로? 진짜 죽었다고?’
아니, 그럴 리가.
저 남자는 앞으로 자신에게 보여 줄 것이 수도 없이 남아 있을 텐데.
오히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저런 것까지 준비해 둔 것일 확률이 높을 텐데.
“…….”
하지만.
그 ‘혹시’라는 조그마한 감정이 생기자마자.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이성적으로는 저게 사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저 남자가 진짜로 죽었다면?
“…싫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여태 자신이 저 남자를 향해 걸던 기대는 어떻게 되는 거지?
환희에 가득 차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그 모든 기간은?
이 남자만큼은 자신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싫다고, 진짜.”
앞으로는, 지금까지 겪었던 그런 감정들을 절대 겪을 수 없다는 건가?
“…….”
그녀가 깨달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이건 삼류나 쓸 법한 그런 속임수가 아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남자가 살아 있을 것이 백번 맞겠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그 남자가 죽었다고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이 있다.
이건 알고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함정 아닌가.
“당신이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잖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우발적인 사고로 죽어서는 될 사람이 아니다.
죽는다면 자신의 앞에서 최고로 찬란하게, 가장 환하게 빛나면서 죽어야지.
이런 보석의 최후가 이렇게 보잘것없어서는 안 된다.
“…하.”
쉬카펠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당신 진짜 짜증 나는 인간이야. 알아?”
물론 그렇게 짜증 나는 인간한테 죽도록 집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지만.
아무래도.
자신은 이 남자에게 제대로 코가 꿰인 것 같다.
* * *
“솔직히 나도 대장이 진짜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는데 말이야.”
키건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았어?”
“…시끄러워.”
역시 게릴라전의 대가인 엘프답게 무시무시한 은밀함을 자랑했는지, 아직 이 녀석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마 이 녀석이 여기까지 같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나밖에 없을걸.
그러니까 이쪽에 와서 당당하게 정체를 밝혀도 이상이 없는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은밀하게 숨어 있었다면, 아무리 쉬카펠이라도 이 녀석의 존재만큼은 지금 계산 바깥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거기에서 찌르고 들어갈 수 있는 사각이 생겨나고.
내가 아득바득 쉬카펠을 바깥으로 불러내는 것도 그걸 위해서다.
“그래서, 이렇게 정성껏 준비한 사기극을 나한테 와서 털어 놓은 이유가 뭐야? 대장 성격이라면 분명히 뭔가를 의도했을 텐데.”
그래. 말 잘했다.
대답 대신 길쭉한 꾸러미를 하나 내민다.
“…….”
키건의 표정이 싹 굳었다.
그 길이만 보고도 이게 무슨 물건인지 깨달은 모양이다.
곡궁.
엘프 여왕님을 갈아 넣어서 얼마 전에 받아 낸 바로 그 물건이다.
“…저번에 나한테 충분히 생각해 보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렇게 말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의 눈에는 강한 불만이 깃들어 있었다.
웬만해서는 바깥으로 진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녀석치고는 이례적으로 강렬한 표현이다.
“내가 예전에 너한테 약속했던 것 기억나냐? 분명히 너한테 활을 다시 잡게 해 준다고 했었지.”
“…그래, 그건 기억나.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안다면 이런 식으로 내미는 게 실례라는 것도 잘 알 것 아니야?”
녀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대장한테 알아서 말했을 거야. 이런 식으로 강요하는 건 엄청나게 화난다고. 개인적인 문제잖아.”
엘프가 ‘활을 든다’는 것은 대단히 많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충성, 사랑, 우의 또는 신뢰. 개인마다 천차만별이지.
하지만 어느 쪽이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친다는 ‘맹세’라는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여왕님도 활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진지하게 반응한 것이고, 이 녀석도 이만큼이나 민감한 것이다.
그리고 게임 안에서 드러나는 키건의 동기를 생각한다면, 이런 식으로 화를 내는 것도 이해는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살짝 물러난다.
“잘 생각해 보라고 한 것 있잖아.”
머리를 긁적거리며 문장을 툭 얹는다.
“아직 유효해.”
“…무슨 말이야?”
“그걸 네가 쏜다는 전제하에 계획을 짜긴 했지만, 너한테 그걸 강요하진 않을 거야. 네 말대로 개인적인 문제니까.”
“…….”
키건이 나를 노려보았다.
“말장난할 기분은 아닌데, 대장.”
“나도 말장난 아닌데.”
녀석의 시선을 똑바로 맞춰 주면서 대답한다.
“정말 하기 싫으면 너는 그냥 사람들을 버리고 가면 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키건의 몸이 움찔했다.
“선택은 자유야. 네가 알아서 고르라고.”
그런 말만 툭 던져 두고 등을 돌린다.
그리고 내가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
키건은 말없이 내 뒷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 * *
그래서.
여기까지가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끝까지 싫어하는 눈치였네만.]
‘괜찮아.’
대수롭잖은 목소리로 수호령님에게 답한다.
‘저 녀석은 무조건 쏴. 무조건.’
[…뭐, 그대가 그렇게 확신했던 일 치고 여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없었으니. 일단 믿어 보겠네.]
그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요새 바깥쪽으로 마력이 폭풍처럼 치솟는 것을 바라본다.
이내 무지막지한 기세로 공간이 쭉 찢어지면서, 그 안쪽에서 쉬카펠이 득달같이 튀어나왔다.
“비켜!”
느닷없이 적 세력의 수장이 튀어나오자 잔뜩 당황한 인원들 사이로 녀석이 난입했다.
개중에는 무기를 들어 공격하려는 녀석도 있었지만, 용의 장로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무슨 피해를 볼지 모르는 역량의 소유자니까. 현명한 반응이다.
“…마법사, 무슨 의도로 여기까지 나온 거지.”
“비키라고 했잖아. 볼일은 저쪽에 있어.”
쉬카펠이 그렇게 말하며 내가 만들어 놓은 가짜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볼일이라고?”
“그쪽 같은 엑스트라에는 관심 없다고, 주제도 모르는 거대 파충류 아저씨! 당장 내 진환 씨가 저 모양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되살려야지!”
“…….”
어이가 없다는 분위기가 근처로 묵직하게 뒤덮였다.
“…우리가 여기에 뭐 하러 왔는지는 알고 말하는 건가, 마법사?”
“나 잡으러 온 건 넘치도록 알고 있으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고 꺼지라고. 안 그러면 죽여 버릴 거야.”
쉬카펠이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시약병을 꺼내 들었다.
엘릭서군.
내가 예전에 키릴을 죽였다가 살릴 때 써먹었던 물건이지만.
그때 사용한 것과는 한눈에 보일 정도로 격이 다른 물건이었다.
아마, 저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시체에도 붓기만 하면 한 방에 되살릴 수 있는 물건이겠지.
“그쪽 전체보다 오진환이 더 중요한 건 너희들도 알고 있을 것 아니야. 어차피 이 사람 없으면 균형이 안 맞는다니까?”
“…….”
장로가 팔짱을 끼고 쉬카펠을 노려보았다.
자존심 높은 용종으로서 방금 한 말 자체도 화가 나겠지만, 그보다는 의도를 파악하려는 모습이었다.
물론, 쉬카펠은 상대할 여유조차 없다는 듯이 짜증스럽게 지팡이를 들어 올렸지만.
이어서 공간이 비틀리더니, 가짜 시체가 곧바로 쉬카펠 앞쪽으로 이동되었다.
보고 있던 장로가 잔뜩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로 수준 높은 술식의 활용이었다.
‘…준비해야겠네.’
이어서 쉬카펠이 자신이 들고 온 엘릭서를 시체 쪽으로 붓는 것을 보며, 한숨과 함께 상태창을 두들긴다.
미리 눈여겨 두었던 기술들의 조합을 짜 올리는 사이, 아래쪽에서는 가짜 시체가 엘릭서를 맞고 부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 한참 좋았는데.”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키가.
내 지시로 재생 능력을 일부러 억제하고 있었겠지만, 저렇게 엘릭서까지 부어 버리면 당연히 들통난다.
“…….”
“…….”
침묵이 쭉 깔리는 주변으로.
쉬카펠이 피식 웃었다.
“역시 실망하게 하는 일이 없다니까, 오진환.”
그렇게 중얼거리는 녀석의 머리 위로.
내가 방금 조합해 낸 필살의 일격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