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실험
[현재 포인트를 정산하실 경우 7일 동안 재정산이 불가능합니다. 현재까지 수급된 포인트를 정산하시겠습니까? Y/N]
그러고 보니 이 창도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피식 웃으면서 Y를 터치한다.
“…와.”
뭉텅이로 들어오는 초월 포인트를 보고 있으니 거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바로 얼마 전에 김진성 씨한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어도 별로 실감은 잘 안 됐는데.
지금 정산되고 있는 숫자의 단위를 보고 있자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문제는…….’
이걸로 뭘 하냐인데.
포인트로 주인공 캐릭터들의 기술을 사들이는 것은 슬슬 손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저번에 파에톤의 심안을 구매한 것처럼 상황에 맞춰 유동적으로 사용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조만간 포인트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주인공 캐릭터들의 성장을 위해 이런저런 사건들을 잔뜩 해치울 예정이라서. 굳이 추가로 나까지 그걸 배울 필요는 없겠지.
그럼 결국 남는 것은 온전히 나 자신의 스펙을 강화하는 일에 투자하는 것인데.
1순위로 필요한 것은 역시 이거지.
기적 탭으로 들어와 아직 비활성화인 부분을 노려본다.
[고급 기적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흠.”
눈앞에 떠오르는 문장과 함께 필요한 수치로 표기되는 숫자를 확인한다.
“…미쳤냐?”
상태창을 상대로도 그렇게 화를 낼 만큼 터무니없는 수치가 적혀 있었다.
방금 정산받은 포인트로는 턱도 없을 만큼 커다란 숫자다.
‘기적의 위력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당장 중급 기적 몇 개만 똑바로 활용했는데도 그 정도로 힘의 격차가 나던 쉬카펠을 잡아 버렸으니 말이지.
고급 기적은 그야말로 ‘기적’이란 말에 어울리는 위력을 선보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리고 그런 위력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 이걸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 게임의 엔드 콘텐츠까지 탈탈 터는 수준으로 진행을 해 놔야 개방이 된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지.
즉.
“…다른 놈들을 전부 다 키워 놓을 수준이면 열리겠지.”
앞으로 대적해야 할 놈들과 진행해야 할 과정을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나오는 게 자연스럽다.
창을 열어 놓은 상태로 턱을 쓰다듬으며 계획을 정리한다.
그럼 일단 이 포인트는 모아 두기보단 ‘정화자’ 쪽에 투자해서 굴리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주인공 캐릭터의 극적인 성장은 결국 녀석들의 사망 이벤트와 연결되는 게 대부분인데.
앞으로 진행될 사망 이벤트의 대다수는 결국 일전에 봤던 ‘심연’과 관련이 있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직업란에 표시된 정화자 쪽을 클릭하여 눈앞에 떠오르는 것들을 살핀다.
“엥?”
그리고 그걸 보자마자 황당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이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주먹구구식에 날림이라는 느낌을 받은 건 한두 번이 아니기는 한데.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게 [효과 범위]가 전부인 건 좀 너무하지 않냐?
이걸 대체 어디에 써먹으라는…….
“…….”
잠깐만.
발상을 한번 전환해 보자.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부분이 한 파트가 전부라는 것은.
다른 것은 업그레이드할 필요도 없다는 것 아니야?
“…흠, 흠.”
그렇게 생각하니까 입꼬리가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위력이나 기타 유틸리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다면, 내가 일전에 썼던 ‘정화’는 대상의 상태를 가리지 않고 그 위력이 그대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간단하게 말해서, 개사기라고.
“…진짜로 그런 거면 고맙습니다.”
눈앞의 창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생각해보면 내가 시스템에 뭐 이런 쓰레기를 줬냐고 화를 냈다가 나중에 사과한 게 한두 번도 아니긴 하지.
“그럼. 보자…….”
들어온 포인트의 일부를 떼서 효과 범위를 상한선까지 강화한다.
아무런 강화 없이도 거대한 건물 한 채를 통째로 범위 안에 집어넣었는데, 이 정도까지 강화하면 과연 어디까지 적용이 될까 궁금하긴 하군.
‘…시험해 볼까.’
마침 쓸 만한 곳도 그럭저럭 떠올릴 수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일단 당장 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저번에 보였던 정화가 전부지만, 수호자의 완갑과 다르게 이 흉갑은 제대로 깨우지도 않은 상태다.
흑은의 보주를 몇 개 바르자마자 깨어난 수호령님과 다르게, 꽤 먹성이 좋은 녀석이 안에 잠들어 있나 보지.
그러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을 처리하기 위해 적당히 ‘잡을 만한’ 존재도 알고 있고.
* * *
사막 위에서 어둠이 격동한다.
끈적끈적한 액체를 연상시킬 정도로 밀도 높은 심연이 저희끼리 뭉치고 있었다.
‘대장이 말한 게 저거구만…….’
키건은 숨죽인 상태로 그걸 바라보며 시야의 배율을 조정했다.
“동북쪽으로 30도 방향. 게이트 출현 현상 같아. 정확하게 대장이 말한 위치야.”
언제나처럼 예언에 가까운 정보력이다. 키건은 속으로 그리 감탄하면서 대장을 돌아보았다.
“…너는 저게 보이냐?”
상대방한테서는 뜨악한 답변만이 돌아왔지만.
아무리 주변 시야가 탁 트여 있다지만, 그런데도 조명 하나 없는 곳에서 수십 km는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물체를 정확하게 관측해 낸 것이다.
“뭘 이 정도로.”
예전이었다면 비슷한 짓을 하기 위해 스코프라도 필요했겠지만, 손에 활이 잡혀 있는 지금은 그냥 맨눈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몸에 작성된 마력 회로는 전부 활을 잡았을 때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적합한 마력 매개만 있다면, 그에게 이 정도 묘기는 장난 수준에도 못 끼는 기술이다.
“…진짜 하나같이 끝까지 키우면 괴물들이긴 하단 말이야. 제일 쉽게 크는 대신에 고점이 제일 낮은 네가 이 수준이면.”
“…키워? 고점? 무슨 소리야?”
“내가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너희들 보살피는 이유가 있다는 거지.”
“보살펴 줄 필요는 없고. 나는 내가 전에 부탁한 것 하나만 들어주면 돼.”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가벼웠지만, 그 아래에 깔린 기색은 평소의 키건답지 않게 무시무시할 정도의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걸 들은 대장도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 내가 그놈 죽이게는 해 줄 건데. 지금은 안 된다니까.”
“시기는 상관없어. 결과만 확실하면 돼.”
“너는 내가 말 허투루 하는 거 본 적 있냐?”
피식 웃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린 대장이 이내 동승하고 있던 지프에서 휙 뛰어내렸다.
“정말로 혼자 하게?”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사람 중 압도적으로 미친 사람이긴 하지만, 대장은 기본적으로 안전주의적 성향이다.
항상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보험을 드는 경향이 강하단 소리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며 관측이 용이한 자신만 끌고 온 상태다.
“응, 어차피 저 녀석들 상대로는 내가 제일 효율이 높아서.”
“나도 멀리서 도와줄 수 있는데.”
“괜찮다니까. 무엇보다.”
대장이 그렇게 말하며 오른팔을 휙 들어 올렸다.
언제나 기다란 제복이나 코트로 가리고 다니던 인장과 완갑이, 오늘은 웬일인지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으면, 나 혼자서도 충분해.”
그런 말과 함께, 대장이 슬슬 제대로 형태를 갖추고 있는 흑색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 * *
어둠의 통로가 활짝 열린다.
일반적인 게이트와는 다르게 국소적인 테라포밍을 동반하지 않는 게이트 현상이라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꽤 크다.
단순한 차원종과는 아예 결부터 다른 존재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말없이 통로 안쪽에서 흘러나온 심연의 조각들이 형태를 갖추는 것을 바라본다.
많다.
아주 많다.
모래로 채워진 광야를 순식간에 자신들만의 머릿수로 채워 버릴 만큼 압도적인 숫자.
뭐.
이 녀석들은 스테이지 5의 정찰병 역할을 하는 놈들이다.
말하자면 ‘대충 이런 놈들이 앞으로 무지하게 쏟아져 나올 거니까 미리 대비하세요~’ 같은 느낌이지.
“…….”
그리고 그중 가장 선두에 형태를 갖춘 녀석이, 음울한 기운을 풍기며 바로 섰다.
검은색 로브에 가면까지.
아주 확고하게 콘셉트가 잡힌 복장이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싫을 만큼 자신의 자아에 도취한 것 같은 분위기랄까.
“…나는.”
“잠깐만! 멈춰!”
뭐라고 말하려는 녀석에게 재빠르게 손바닥을 내민다.
“너 어차피 얼마 안 가서 죽을 건데 자기소개 같은 것 하지 마! 정들 수도 있으니까!”
“…….”
정확히는 정이 든다기보다 듣는 내가 토할 것 같으니까 하는 소리지만.
구원자의 길이라는 제목에서 풍겨 오는 감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게임은 가끔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엣지하게 지어진 이름이 몇 개 있다.
그리고 그쪽 감성이 충만했던 발카서스부터 시작해서, 이놈들은 해당 분야에서 단연 최상위 티어에 드는 녀석들이다.
일단 이 녀석들 이름부터가.
‘어둠의 사도’와 ‘어둠의 신도’다.
‘구린 이름’과 ‘구린 이름’ 정도로 기억해도 되겠지.
“…나는 선택받은 7사도 중 하나, 칼리반. 어리석은 네놈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 나와 이 신도들의 믿음이 너희들을 계몽할 것이니.”
그리고 그런 놈들 특징.
상대방이 싫다고 해도 본인의 감성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마. 진짜. 듣는 내가 다 부끄러우니까.
“위대한 어둠 앞에 경배ㅎ…….”
그래.
나는 분명히 말했다. 더 들어줄 수는 없지.
이 녀석의 유언이 개떡 같은 건 내 잘못이 아니란 소리다.
인장이 번쩍거리는 것과 동시에 수호자의 완갑에 마력이 깃들고, 이내 이음새로 연결되어 있던 흉갑에도 마찬가지로 마력이 깃들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잠깐만.’
방금 느낀 사실인데.
생각보다 잡아먹는 마력이 많다.
저번에는 ‘흉갑’에만 보주를 발라서 사용했으니, 두 개를 연동해서 사용하는 이번엔 틀림없이 더 많이 사용할 거란 생각에 보주를 좀 넉넉하게 들고 오긴 했는데 말이야.
그걸 전부 흡수해 놓고도 모자란 모양인지 내 신체에 있는 마력까지 빨아간다.
“…….”
‘대체 무슨 커다란 일을 저지르려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이에.
집적된 마력이 광포의 형태를 띠고 주변으로 발사되었다.
포격처럼 발사된 마력이 이내 곧바로 어둠의 사도와 신도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
-!!
-!!!
귀와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몇 초가 지나갔다.
어질어질한 정신을 간신히 추스르며 주변을 돌아보자.
아무것도 없었다.
“…실화야?”
조금 전에 잘난 듯이 떠들던 어둠의 사도와, 지평선까지 가득 메울 정도로 주변에 깔려 있던 어둠의 신도까지 한 번에 싹 쓸려 나간 모습이다.
이 녀석들 속성을 생각하면 잘 먹힐 거라는 예상은 했는데 말이야, 이건 기대 이상의 위력이다.
스테이지 5에 등장하는 녀석은 이 녀석들보다 훨씬 강력하니까, 방금처럼 쉽게 쓸려 나가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 녀석한테 내가 생각하는 계획을 써먹기엔 차고 넘치도록 충분한 위력이다.
야,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허.”
이거 내가 알기로는 나름 사상자도 엄청나게 나오고.
전 세계적 비상사태를 촉발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이벤트로 알고 있는데.
“허허.”
이걸 이렇게 몇 초만에 나 혼자서 갈아 버린다고?
그리고 이게 제대로 깨어난 위력도 아니라 그거지?
“허허허…….”
[상위 난이도 이벤트를 완벽하게 클리어하셨습니다!]
[초월 포인트가 대량으로 지급됩니다!]
그런 창이 떠오르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나는 허탈한 웃음을 허공에 계속해서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