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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속 구원자가 되었다-114화 (114/135)

114화 휴식 (2)

생각해 보면, 난 태어나서 한 번도 어딘가에 제대로 놀러 간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계속해서 연구 시설에 갇혀 있었고, 커서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것이 전부였으니까.

만약 상태창에 인싸 경험치가 표기되었다면 난 틀림없이 쓰레기 수준으로 도배가 됐겠지.

“…개쩔어.”

그러니까.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내가 넋이 나가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다.

테마 파크, 바닷가, 5성 호텔을 판잣집으로 보이게 할 만큼 으리으리한 건물. 캠핑 장소.

이 ‘섬 전체’가, 하나의 ‘시설’로서 완성되어 있는 모습이다.

나같이 인도어 활동에 최적화된 인간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느낌이지.

아니, 인싸 놈들은 항상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가?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지? 내가 가지고 있는 별장 중 가장 작은 곳인데.”

그리고 이걸 전부 개인 소유로 가지고 있는 인간이 내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엄격한 표정에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다니는 김진성 씨가 선글라스에 알로하셔츠를 걸치고 있는 건 또 나름대로 색다른 광경이겠지.

“…소싯적에 나름 좀 날리고 다니셨나 봐요? 느낌이 그런 복장 한두 번 해 보신 게 아닌데?”

“태화 앞에선 그런 소리 말아.”

놀리듯이 건넨 말을 물 흐르듯이 받아친 김진성 씨가, 이내 나한테 카드 하나를 휙 던졌다.

“내가 사용하는 패스야. 이 섬 안이라면 신 놀음 비슷한 거라도 할 수 있을 걸.”

“신 놀음까진 필요 없고, 대신 조언 좀 부탁드립니다.”

“조언?”

“…저기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와와 꺅꺅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여성진을 돌아보며 긴장된 목소리로 질문한다.

역시 저 정도 위치에 올라온 놈들이라도 이 정도 되는 시설은 처음 보는 모양인지 모두 흥분된 기색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눈치가 좋은 사람이라면 그 안에서도 치열한 ‘쟁탈전’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어디에 어떻게 나를 꼬셔 내서 단 둘이 시간을 보낼까, 하는 치열한 물밑 심리전이 진행 중인 것이 분명했다.

“…세상을 몇 번이나 구한 놈이. 자기 좋다고 달려드는 여자들도 똑바로 못 상대해 주나?”

“차라리 세상을 한 번 더 구하겠습니다.”

이건 아주 진심이다. 궁서체로 진심이다.

아니, 그러니까.

나도 사람은 사람이라 저 녀석들이 딱히 싫거나 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상태인데, 저기 있는 녀석들 중 제대로 엮이면 안 부담스러운 녀석이 없다.

그렇게 말해 주자, 김진성 씨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궐련을 입에 물었다.

“가장 중요한 조언. 이런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를 마.”

“…….”

팩트 멈춰.

멈추라고.

* * *

“…신기하네.”

무슨 일이든 야외에서 하려고 한다면 일감이 배로 늘어나는 마법 같은 현상을 보고 있자니, 그런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더한 장점은.

서로가 무엇을 하는지 훤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나를 어떻게든 잡아먹으려고 들던 녀석들도 당장은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느라 마땅한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지만.

“오진환 씨. 이것 좀 발라 줘.”

“…….”

물론.

어느 때고 칼같은 타이밍에 공격을 때려 넣는 녀석은 있기 마련이다.

방싯방싯 웃으면서 내 손에 선크림을 쥐여 주는 파에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다.

이 녀석이 제일 먼저 행동에 착수한 덕분에 근처에서 힐끔거리고 있던 다른 녀석들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나한테?”

“굳이 당신한테.”

빠져나갈 구석도 없는 모양이지.

이미 바로 앞에 파라솔을 깔며 벌렁 누워 버리는 파에톤을 보고 있으니 살짝 오한이 드는 느낌이었다.

대놓고 머리 뒤에 손 베개를 하고 다리를 살랑거리는 모습이 얼른 안 해 주고 뭐 하냐는 모양새다.

“…….”

그래, 뭐.

선크림 좀 발라 준다고 사람이 죽겠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통을 흔들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곧바로 그걸 낚아채간다.

뭔가 싶어서 돌아보니 표정을 씰룩거리고 있는 윤겨울이다.

“이런 건 내가 잘 발라.”

“…뭐?”

“봐 봐.”

이어서 녀석이 크림을 콱콱 짜내더니 파에톤의 온몸에 치덕치덕 발랐다.

거의 평생에 걸쳐 무도를 수행한 녀석 답게 어마어마한 빠르기였다.

“…….”

순식간에 전신이 코팅된 파에톤이 가늘게 뜬 눈으로 윤겨울을 노려보는 사이, 윤겨울이 완전히 빈 통을 휙 던지며 헛기침을 했다.

“음, 흠. 저기, 그럼 이제 나 좀 도와줄래?”

“도와줘? 뭘?”

“저쪽에서 고기 구우려고 장작 쌓고 있는데,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좀 힘들어서…….”

“…….”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 군대랑도 싸울 수 있는 놈이 뭐?

속이 뻔히 보이는 말에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자니, 파에톤이 벌떡 일어나 윤겨울의 어깨에 손을 턱 짚었다.

“그건 내가 도와줄게.”

“…어? 아니? 왜? 네가?”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윤겨울이 그렇게 반발했지만, 마찬가지로 얼굴 전체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파에톤이 남은 손까지 윤겨울의 어깨에 턱 짚으며 말을 받았다.

“크림. 발라 준. 답례.”

“아니, 그, 나는 오진환이랑…….”

“시끄러워.”

그런 대화와 함께 두 녀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확히는 윤겨울보다 기초 스텟이 압도적인 파에톤이 녀석을 질질 끌고 가 버린 것이지만.

“…….”

근데.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어쩌면 이렇게 쫄 필요 없는 것 아니야?

자기들끼리 자멸하는데?

[뭐, 먹잇감은 하나인데 노리는 사람이 많으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대놓고 사람한테 먹잇감이라는 소리는 하지 말아라.

* * *

“이대로는 안 돼.”

고성방가와 과격한 무력행사를 포함한 수십 분의 설전이 오간 끝에, 파에톤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 사실 자체에는 건너편에서 숨을 헐떡거리던 윤겨울도 동의하는 모양새였다.

처음으로 저 남자가 먼저 나서서 거리감을 좁히자고 제안한 참이다.

이런 식으로 서로 싸우기만 해서는 양자에게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서로서로 조금 양보하는 자세를 가질 줄은 알아야 한다는 거지.”

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 튀어나온 녀석들이 머릿속에 공유하고 있는 명제는 전부 동일하다.

어떻게든 다른 ‘경쟁자’보다 앞서 나간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그런 쪽으로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낌새를 보아하니 저 남자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걸 용인해 줄 모양새다.

실제로 방금 전에 검은 속이 뻔히 보이는 제안도 응해 주려는 기색이기도 했고.

“하다못해 기정사실을 박아 두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뭔가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 정도는 다들 만들고 싶을 것 아니야. 그러니까 순번이라도 만들자고.”

“…순번?”

“공격은 각자 하루에 한 번. 공격 중에는 서로 터치하지 않기. 어때?”

“…….”

이걸 합리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존엄 같은 것은 이미 다 내려놨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틀림없었지만, 파에톤의 눈에 깃들어 있는 진지한 열기를 보고 있으니 이건 진심이다.

‘…그것참.’

이 녀석도 길만 지나가면 남자들이 목을 홱홱 꺾어서 뒤돌아보게 만드는 녀석인데. 이 정도로 집착하는 것을 보면 이상한 느낌이 들긴 한다.

“…대체 우리가 왜 남자 하나 꼬시자고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따지고 보면 우리도 나름 잘나가는 사람들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그게 싫었으면 우리가 저런 놈팡이한테 반하지를 말았어야지.”

“…….”

딱히 반한 건 아닌데.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래 봐야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것이 뻔하니 그냥 말을 삼켰다.

“그래, 일단 그건 그렇다 치는데. 너랑 나만 동의해서는 별로 의미가 없지 않아?”

“…….”

그건 또 그렇다.

그러고 보니, 함께 온 쉬카펠과 니샤는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파에톤이 볼을 긁적이고 있자니.

그녀의 핸드폰에서 띠링거리는 착신음이 울려 퍼졌다.

“…오진환 씨?”

이 인간이 느닷없이 연락을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그녀가 착신된 것을 확인해 보니.

[ㅅ ㅏㄹㄹ ㅕ ㅈ ㅝ]

“…….”

웬 다잉 메세지 같은 문자가 와 있었다.

* * *

어렸을 때는 이런저런 괴롭힘도 많이 당해 보긴 했는데 말이야.

모래사장에 목까지 파묻히는 것은 또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군.

어디서 들고 온 모종삽인지, 그걸로 모래를 꾹꾹 다지는 니샤에게 입을 연다.

“…저기, 니샤.”

그러자 녀석이 찰랑거리는 백발을 흩날리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요즘에는 꽤 자유로워진 모양인지, 트레이드 마크인 갑옷은 옆에 벗어 둔 상태였다.

“응, 스승님.”

“이게 뭔 상황이니?”

내 입장에서는 여기 있는 지뢰 중에서 그나마 가장 안전한 게 니샤라서, 이 녀석이 같이 산책이라도 하자고 하는 것은 아무 의심 없이 순순히 따라 준 참이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런 꼬라지라면야 누구나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저 언니가 스승님을 납치하자고 했어.”

니샤가 그렇게 말하며 옆에서 굉장히 불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쉬카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저히 인간에게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 힘든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온갖 종류의 촬영 장비를 열심히 세팅하고 있다.

…얘 말이야.

원래도 설정상 변태기는 했는데, 나랑 만나고 나서는 그런 성향이 훨씬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너는 왜 거기에 동의했는데?”

그렇게 질문하자, 니샤가 내 뒤통수 쪽에 털푸덕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다른 언니들이 도저히 양보해 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

“양보 안 해 주기는 쟤도 마찬가지 일 것 같지 않니?”

“괜찮아. 저 언니는 나하고 약속했어.”

“뭘?”

“서로 방해하지 않기로.”

“그러니까 서로 뭘 방해-”

말하려던 중간에 깨달음이 찾아왔다.

어.

잠깐만.

이거 그러니까.

그거지?

“…….”

느닷없는 커밍아웃에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이자, 그걸 말한 니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그렇게 내뱉은 니샤가, 멍해진 나를 내버려두고 어딘가로 뽈뽈거리면서 달려가 버렸다.

이에 넋이 나간 내 옆에 있던 수호령님이 낄낄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런. 안심하고 있다가 아주 큰일이 나 버렸군?]

…목소리에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감정이 잔뜩 묻어 있다.

당신, 나중에 두고 보자.

[뭐, 나도 몇 번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저 아가씨도 나름 의지가 확고하더라고.]

옆에 있던 갑옷에서 초대 성기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녀석도 수호령님이랑 마찬가지로 내가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유쾌해 죽겠다는 기색이다.

[그러니까, 일단 너도 그렇게 피해 다니기만 하지 말고 한번 진지하게 받아 주지 그래.]

“…이 양반이 노망이 났나.”

여기서 한 명 말을 들어주었다간 그대로 죄다 박살이 날 텐데 뭘 진지하게 받아 주나.

[아니.]

내 말을 들은 초대 성기사가 대답했다.

[그래야만 할 텐데.]

“뭐?”

[조만간 알게 될 걸세.]

분명히.

꽤 의미심장한 울림이 담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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