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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속 구원자가 되었다-128화 (128/135)

128화 외로운 길 (1)

심연의 존재가 서서히 눈을 밀어 올렸다.

수많은 차원을 집어삼킨 자연재해 같은 존재임에도, 그것은 대단히 게으른 편이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기만 하면 곧바로 어떤 차원이든 순식간에 집어삼킬 수 있는데도 굳이 자신의 수하들만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여러 번 보내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약한 차원은 제일 처음에 보낸 최하급 ‘신도’들만으로 충분하고.

저항이 거세다면 조금 더 강력한 녀석들을 투입하고.

그래도 정복되지 않는다면 더 강한 녀석들을 축차적으로 투입하고.

지금까지 그런 방법으로 그 존재가 점령하지 못한 차원은 단 한 개도 없었으니까.

-…….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 하나의 예외가 있긴 했다.

까마득한 세월을 진득하게 관류해 온 심연의 존재 기준으로는 바로 방금 전의 일처럼 느껴지던 패배의 기억이.

빛.

자신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몰아낸 그 휘광은 아직도 기억한다.

심연의 존재에게 처음으로 ‘고통’이라는 감각을 심어 준 그 빛.

지금 심연의 존재가 의식을 차린 것도, 바로 그 빛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다.

예전에 자신을 몰아낸 그 빛은, 이 기척보다 훨씬 강렬하고 눈부셨다.

이건 그저 타고 남은 불씨에 가까운 잔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저 빛이 제대로 그 광채를 발하기 전에 짓밟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심연의 존재는 자신의 수하들이 침략을 진행하고 있는 차원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선발대는 이미 격파된 상태였고.

지금은 보다 더 위험한 차원이라고 판단하여 ‘본대’의 일부가 침공을 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빛’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 심연의 존재에 눈에 띄었다.

보기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그 기척은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으니까.

-…….

그렇다면.

그것들부터 가장 먼저 지워야 할 것이다.

* * *

“…와우.”

흑성급 헌터로서 파에톤은 온갖 종류의 게이트 사태에 몸을 담궈 본 사람이다.

하물며 최근에는 오진환 씨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종류의 사건 사고를 다 겪고 다니면서 그런 경험의 폭은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웬만한 일에는 절대로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스케일이 다르구만…….”

하늘 전체를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와는 궤를 전혀 달리하는 사태라는 것이 절절히 체감된다.

웬만하면 자신은 뭐든지 알고 있으니 뭐가 와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매사를 대하는 오진환 씨가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조바심을 내던 것이 단번에 이해가 갈 만큼.

“…….”

물론.

그렇게 조바심을 내는 것과 별개로, 이미 그 인간은 ‘한 명도 죽는 일 없이 구하겠다’라는 호언장담을 이미 끝마친 상태지.

파에톤은 실실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적어도 지금까지, 오진환 씨는 다른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말한 것 중 지키지 못한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미친 짓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다.

“…정말 혼자 가십니까?”

협회 직원이 당신 미쳤냐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왔다.

음.

아마 파에톤 자신도 지금 본인이 하려는 짓을 남이 하려고 한다면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기 때문에, 딱히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할 생각이 들진 않았다.

맨몸에 검 한 자루만 들고, 정체불명의 검은색 생물체가 하늘에서 계속 쏟아지고 있는 곳으로 돌진하라니.

솔직히 그냥 자살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로서도 절대로 시도하지 않았을 행동이지.

“뭐.”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항상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이 이게 맞다고 했어요.”

“네?”

“난 그 사람 말이라면 뭐든지 할 거거든.”

음.

스스로가 생각해도 방금 말은 엄하게 해석될 소지가 대단히 많았다.

당도가 좀 높기도 하고.

직원의 표정이 시뻘개졌다.

방금 파에톤이 그런 문장을 말하면서 지은 미소에 심장이 직격당한 모습이다.

‘녹슬진 않은 모양이네.’

오진환 씨는 아무리 이런 표정을 지어 줘도 아무 반응이 없어서, 최근 좀 힘들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파에톤이 헤롱헤롱하고 있는 직원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며 말을 이었다.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잘 부탁드립니다.”

오진환 씨의 지시로 이 근방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이쪽 쉘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황이다.

솔직히 이렇게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서는 이런 허름한 방호 시설보다는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대피시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차피 ‘어디로 옮겨도 똑같다’는 말을 브리핑 때 들은 참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도 이미 들었으니, 그걸 실천할 차례다.

아직 이 도시에는 제대로 도망치지 못한 인간들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오진환 씨는 무전으로 자신에게 그런 사람들의 ‘수거’를 부탁한 참이고.

“그것참.”

생각해 보면, 본격적으로 이 남자에게 지시를 받기 시작했을 때 했던 일도 이런 종류 아니었던가.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느낌이군.

파에톤이 얼마 전에 새로 받아 온 월드 이터를 등에 들쳐 업었다.

“일 끝나면 고용 노동부에 신고할 거야, 오진환 씨.”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부려먹은 대가는 본인한테서 톡톡하게 받아 낼 것이다.

[…고용노동부라는 게 남아 있으면 얼마든지 신고해. 해 달라는 건 뭐든 해 줄 테니까.]

무전기 너머에서 오진환 씨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들은 모양이지.

“진짜로 신고할 건데. 맨날 이렇게 사람 부려먹으니 뭐라도 받아야겠다 싶어서.”

[브리핑 때도 말했잖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마지막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가슴 한편이 시큰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파에톤은 억지로라도 밝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마지막이니까 비싸게 받을 거야.”

[뭐?]

“제발 쉬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해도 문답무용으로 뜯어내야지.”

[…뭘?]

“밤에 단 둘이 같은 방에 남게 되면 내가 자세히 알려 줄게.”

[처녀 주제에 뭐라는 거야.]

“…….”

음담패설로 긴장을 좀 풀려고 해 봤지만, 역으로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뭐.

이 남자가 무슨 선택을 하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도 그에 맞춘 ‘선택’을 할 예정이지만.

“오진환 씨.”

[응?]

“사실 이 말 할까 말까 엄청 고민했는데. 당신 같은 사람한테 이런 걸 말해도 되나 싶어서.”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죽지 마.”

[…….]

“나도 안 죽을 거니까.”

파에톤은 코웃음을 치며 벙커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 * *

주륵주륵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검은색 물체들 속에서, 파에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사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다.

“…어쩐다.”

그녀가 부서져 버린 무전기를 내려다보며 곤란한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전투 중 격하게 움직이다 보니 일어난 일종의 사고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지.

뭔가 오늘은 될 일도 안 되려는 운수인가 보다.

‘아니, 정확히는…….’

중간 중간에, 마치 자신의 무전기를 노리고 본격적으로 달려드는 움직임을 여럿 포착했다.

마치 자신과 오진환 씨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끊으려는 것처럼.

잘은 모르겠지만, 이번 적의 수뇌는 본격적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인 모양이지.

한숨을 내쉬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자신이 베어 넘긴 거무죽죽한 잔해가 거의 근처를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오진환 씨의 서포트 없이 이만한 격전을 치루는 것은 그녀로서도 틀림없는 부담이다.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지.

“…….”

파에톤은 슬쩍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전 세계를 뒤져도 비슷한 수준을 찾기도 힘든 철의 육신도 잔뜩 너덜너덜해진 상태다.

애초에 이놈들은 지금까지 싸워 온 적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강적인데.

언제나 정답만 짚어 주던 치트키 수준의 어시스트가 없어지자마자 바로 이 꼴이다.

오진환 씨한테 안 죽겠다고 말한 지가 바로 아까 전인데, 벌써부터 위기 상황이지.

“헤.”

그것 자체에는 사실 별로 불만이 없다.

생각해 보면, 그냥 옛날로 돌아간 것에 불과하다.

사실 지금까지 오진환 씨의 명령만 듣고 편하게 움직인 감이 없잖아 있다.

예전에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험악한 전장에서 몸을 부대끼던 그녀의 본질이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말이야.

“…해도 너무하네, 진짜.”

시야 전체를 뒤덮으면서 달려오는 검은색 ‘해일’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하나씩 떨어지는 검은색 구체들이 자기들끼리 합쳐지더니 저렇게 거대한 형태를 취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가, 무전기를 부수는 것을 필두로 느닷없이 저런 변종이 나타나다니.

‘도망가고 싶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근처에서 눈에 띄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안쪽으로 들여보냈지만, 아직 이 근처에 누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럼 이 몸 상태로 저걸 물리치거나, 최소한 시간이라도 끌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하라고 한 일은 끝내야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오진환 씨는 항상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이다.

사상자를 0명으로 유지하면서 사태를 해결한다면 그럴 방법이 있으니까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일 거고.

자신에게 이 일을 맡으라고 한다면 그게 가능하니까 맡기는 일일 것이다.

뭐.

무전이 끊겼으니 그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람을 버리고 혼자서 도망치라는 지시는 죽어도 내리지 않을 사람이 분명했으니까.

팔은 슬슬 감각이 없어지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숨결에는 단내가 섞이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믿고 있다고, 오진환 씨.”

월드 이터를 들쳐 업으며, 파에톤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그쪽이 위기군.”

옆에 있던 수호령님이 내가 쳐다보고 있는 영상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안쪽에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파에톤이 비춰지고 있었다.

“교신이 불가능하네. 심연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개입한 모양이지. 단순히 저 장치가 망가진 게 아니더라도 모든 종류의 신호에 간섭이 들어오기 시작했네. 그대의 예상대로군.”

“알아.”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필요한 지시는 전부 내려 뒀어. 교신이 끊기더라도 각자 할 일만 잘하면 돼.”

점점 더 상처가 늘어가는 파에톤 쪽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 낸다.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알기 쉽게 저 녀석이 날뛰어 준 덕분에, 근방에 있던 모든 적이 그 근처로 몰려들기 시작한 모습이다.

“…그대여.”

수호령님이 이쪽으로 침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가 봐도 위험한 모습이네. 저대로 내버려 뒀다간 금방 죽지 않겠는가.”

“…알아.”

사실.

위험 부담이 너무 높은 방법이긴 하다.

비단 저 녀석을 저런 상태로 계속 버티게 두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지금부터 행할 일들이 전부 그렇다.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저 녀석들이 실수하거나. 나를 믿지 않거나. 예상외의 변수가 터져 나온다면.

“…….”

생존자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극단으로 전부 몰아넣는 플랜이니까.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고’ 엔딩을 가져오는 방법도 이것 말고는 없고.

‘…버텨 줘.’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연이어 격전을 치루는 파에톤을 보며, 나는 눈을 돌렸다.

다음 페이즈가 그쪽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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