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107)

34화

“파웰 경이 애인에게 꽃을 사가고 싶다는데 이름을 모르겠다고 해서 알려주다가 여기까지 왔지 뭐야.”

리지의 말에 유령의 어깨가 조금 힘없이 내려갔다.

“저번에 꺾였던 패큘리엄 줄기에 새순이 돋았는데 봤어?”

유령의 시선이 패큘리엄으로 향했다.

꺾였음에도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줄기 위에 작은 새순이 피어 있었다.

“화려한 생김새랑 다르게 제법 튼튼한 친구야. 물론 뿌리부터 튼튼하게 키워준 사람 덕분이겠지만은…….”

유령은 작게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유령의 모습에 리지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아직 삭월이 아닌데도 나왔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황녀와 저녁 만찬을 하고 오늘은 하루 종일 집무실에서 업무만 봤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유령은 긴 소매로 덮인 창백한 손끝을 까딱였다.

쉽게 나오지 않는 대답에 답답할 만도 하건만 정원사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을 뿐이었다.

“요즘은 티파티 준비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는 것 같아.”

유령이 짧게 침음했다.

리지는 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건 좋은데 오솔길로만 다니면 좋겠어. 꽃들이야 밟혀도 다시 자라나지만 거기 사는 멧밭쥐들은 아니거든.”

원래는 겨울잠을 자야 하는데 보다시피 내가 땅을 들쑤셔놔서 다들 잠에서 깼어.

리지는 말을 이었다.

“한 놈은 어찌나 화를 내던지 엄지발가락을 있는 힘껏 물더라니까.”

유령의 시선이 순식간에 리지의 발로 향했다.

낡은 부츠의 오른쪽 끝에 작지만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어쩐지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령의 모습에 리지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부츠 끝을 까딱였다.

“다행히도 발가락은 멀쩡해. 제법 튼튼한 부츠거든.”

긴장으로 올라갔던 유령의 어깨가 조금 가라앉았다.

리지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완성된 후원은 어때?”

“…….”

눈을 뗄 수가 없더군.

너처럼.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애써 삼키며 유령은 깊게 눌러 쓴 후드 끝을 만지작거렸다.

대답을 기대했던 물음은 아니었던 듯 리지는 여상하게 되물었다.

“뭐, 여기서 새로 관심 생긴 꽃이라도 있어? 패큘리엄 말고.”

유령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사락사락 로브를 끌며 어딘가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가자 그곳에는 키가 자그마한 민들레를 닮은 주황색 꽃들이 군락처럼 모여 있었다.

“아, 칼렌디.”

후드에 가려진 유령의 시선이 리지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그 시선을 발견한 리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카락을 닮았지. 심지어 뿌리가 튼튼해서 웬만하면 안 뽑히는 것까지 닮았다니까.”

희미한 당근색의 머리카락을 흔들어 보이며 리지가 말했다.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령은 이내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조금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너 제법 후원에 관심이 있구나.”

그 장면을 보지 못한 리지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럼 너는 뭘 닮은 것 같아?”

리지의 물음에 유령은 깊이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가벼운 질문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 리지는 인내심 있게 그의 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유령은 천천히 창백한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패큘리엄이 있는 곳이었다.

의외의 선택에 놀라기도 전에 리지는 깨달았다.

그의 손가락은 꽃무리가 아니라 패큘리엄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꽃무리에서 조금 떨어져나와 홀로 외로이 서 있는 패큘리엄을.

“…….”

“…….”

나직한 침묵이 리지와 유령 사이에 내려앉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 *

어젯밤, 나일스 허니컷은 잠을 설쳤다.

심신안정제를 마신 뒤, 정원사에게 털어놓았던 그 모든 이야기들이 악몽이 되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나면 좋겠는데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나눈 대화는 끔찍할 정도로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놈팡이처럼 굴러다니던 공벌레가 천벌 받고 다시 태어나면 공작님이 되는 걸까 싶더라니까.

“미친 거지. 응, 미친 거야…….”

등골을 내달리는 소름에 들고 있던 서류가 구겨질 정도로 두 손에 힘을 준 나일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을 고작 ‘천벌을 받은 공벌레’로 생각하고 있던 자신의 무의식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혹시 오두막 근처를 지나던 누군가가 자신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

점점 가까워지는 집무실에 나일스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공작님이 팔뚝만 한 단검을 들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놈팡이처럼 굴러다니던 공벌레가 다시 태어난 게 이 몸이라…… 그렇다면 네놈이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는 거지? 공벌레처럼 굴러다니는 놈팡이?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나일스가 손등으로 이마 위 식은땀을 닦아내었다.

물론 블랜차드 공작이라면 저렇게 길게 얘기하지도 않을 테지만, 긴장감에 휩싸인 나일스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않았다.

몸이 떨리다 못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일스는 중얼거렸다.

“차라리 어제 마신 심신안정제를 더 달라고…… 아니야. 그거 마시고 공작님 앞에서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 그게 진짜 문제지, 응…….”

더 억울한 점은 정작 정원사를 찾은 목적은 제대로 꺼내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티, 티파티는?! 당장 거절―.

자신을 번쩍 들어 오두막 밖으로 내던지는 정원사의 힘이 너무 놀라웠던 나머지 나일스는 그 오두막에 다시 들어가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진짜 그건 뭐였을까?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데…….”

“누굴 말하는 거지?”

“그야 정원―.”

자연스럽게 대꾸하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나일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공작님의 제비꽃 색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공작님은 평소와 같이 무심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여느 때와 달리 조금 떨떠름해 보였기에 나일스는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그…… 어…… 에……?”

“나일스 허니컷.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하도록.”

“그게…… 그러니까 저는…… 보홐고, 를 드리러…… 커흠.”

너무 긴장한 나머지 삑사리가 난 나일스가 쪽팔림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사이러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검고 곧은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들어와.”

자신의 새된 목소리와 달리 지나치게 완벽한 목소리였다.

언제나 그렇듯 공작님을 만날 때마다 느껴지는 자괴감을 애써 삼키며 나일스는 그의 뒤를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진짜로 비명을 질렀다.

“꺄악!”

집무실의 창문 옆 콘솔에 흩어져 있는 서류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서류들을 발견한 순간, 나일스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서류들이 저기서 나왔다는 건 공작님이 저곳에서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 창에서는 마치 그곳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정원사의 오두막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저곳에서 공작님이 일을 했다면 정원사의 오두막에 누가 드나들었는지 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분명 어제도…….

나일스의 상상력이 정해진 결말로 달려가는 것과 동시에, 공작님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제…….”

“저, 저, 정원사의 오두막을 찾아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아니, 살려주세요!”

사이러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 발 저린 나일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

그리고 어제 티파티 준비는 어디까지 마쳤는지 물어보려 했지, 죽일 생각은 없었던 사이러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찾아갔지?”

“그게…… 화, 황녀님께서 참석하시는 티파티에 아무 예절 교육도 받지 못한 정원사가 참석하는 건 아무래도 무, 문제가 될 것 같아…….”

“…….”

거절을 종용하려 찾아갔단 소리였다.

오두막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이러스의 눈동자에 슬며시 이채가 어렸다.

그래, 차라리 정원사 쪽에서 거절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감히 황녀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말이 나올 수는 있겠으나, 적당한 이유야 만들어내면 그만이었으니까.

귀족보다는 평민에게 유한 황녀를 생각하면 거절을 한다고 정원사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래서 정원사는 뭐라고 하던가.”

평소라면 ‘알아서 해’라든가 ‘그딴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정도로 끝냈을 블랜차드 공작을 떠올리면 이상할 정도의 관심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내뱉은 헛소리를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나일스는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게…… 대, 대답을 못 들었습니다.”

사이러스가 우뚝 멈춰 섰다.

“……못 들었다고?”

“예, 쫓겨났거든요…….”

“…….”

그 순간, 사이러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짧은 대화였다.

―티파티를 거절해!

―황실에 갈 수 있는 그 소중한 기회를 내가 왜요!

“……공작님?”

나일스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생각지도 못한 망상에서 깨어난 사이러스는 일단 침착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니, 아닐 것이다.

어젯밤 자신이 만난 리지 앳킨스는 분명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확신할 수 없기도 했다.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그래서 어젯밤, 고민되는 마음에 산책이라도 나온 거라면.

“빌어먹을.”

“예?”

느닷없이 들려온 욕설에 나일스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사이, 어느새 표정을 갈무리한 사이러스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예정대로 열리겠군.”

어쩐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일스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파티 말씀이신가요? 예, 그렇긴 한데…….”

“한 명 더 참석한다고 전하도록.”

나일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 한 명 더, 라면…… 누, 누구…….”

“…….”

누구겠나.

자신을 바라보는 제비꽃 색 눈동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 나일스의 얼굴이 이제는 하얗다 못해 새파래졌다.

공작님, 그리고 티파티.

생전 어울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이 느닷없이 조합되어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말았다.

공작님이 티파티에 간다.

“허업……!”

충격으로 입을 틀어막은 나일스를 바라보며 사이러스는 냉정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나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비척비척 걸어나가는 나일스를 바라보던 사이러스가 문득 떠오른 듯 다급히, 하지만 티 나지 않게 덧붙였다.

“아, 그리고.”

“예, 옛!”

파드득 떨며 대답하는 나일스를 향해 사이러스는 말했다.

“후원에서 티파티를 준비하는 사용인들에게 화단을 밟지 말라고 전하도록. 멧밭쥐,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전하도록.”

“…….”

뭐지, 방금 엄청 안 어울리는 단어 하나가 나온 것 같았는데.

순간 미심쩍은 듯 바라보던 나일스는 이내 싸늘한 사이러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후다닥 집무실을 나왔다.

그래, 자신이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자신은 지금 충격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이 충격을 지금 모두에게 전해주어야 했다.

이윽고 짧은 비보를 들은 식당에서는 새된 비명과 함께 약간의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모두에게 충격을 줄 순간이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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