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죄송하면 죽어야지 (4)
박시우는 분명 유채영을 죽였다. 그러나 그걸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유세연은 물론이거니와 서지훈도 마찬가지였다.
박시우는 유세연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차라리 부정이라도 해 주길 바랐어.”
“사실이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세연이 어깨에 힘을 풀었다.
“나와 네가 싸우는 걸 원하지 않을 거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네가 뭘 알아? 나에게는 언니가 전부였어!”
서지훈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거짓말이길 바랐다.
부정해 주길 원했다는 세연의 마음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언니를 죽인 그 손으로, 자신의 앞에서 태연하게 굴었던 박시우를 생각하면 속이 역겨워 미칠 것 같았다.
“서지훈이 모시고 있는 신은 누구지?”
“베리타스. 그래, 과거에 언니가 모셨던 신이야.”
박시우는 금기를 어긴 유채영을 죽였다.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게 하나 있다.
정확하게는 강한결에게 설명을 듣고 난 이후에 해결된 부분이었다.
신들도 금기를 가지고 있다.
‘금기를 어긴 자는 유채영이 아니라, 베리타스 신이다.’
베리타스 신을 모시는 서지훈이 침식을 당했을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소환권 넘기고 이번 일에서 빠져. 그냥 모르는 척하면 돼.”
보통 보스 레이드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오지에서 진행한다.
B급 균열만 생겨도 비상사태인데, 보스 몬스터를 소환하는 건 오죽하겠는가.
“너 그거 4성 티켓이지?”
“뭘 할 생각이지?”
“복수할 거야. 언니를 이렇게 만든 녀석들에게.”
박시우가 혀를 찼다.
미친 소리인 것과는 별개로 유세연은 박시우를 설득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박시우의 귀에는 보스 레이드를 예정대로 진행하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우가 세연을 내려다봤다.
용서를 구할 마음은 없었다.
그 선택을 후회해 본 적도 없다.
아무리 복수라고 해도 둘의 행동은 선을 넘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다.”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둬.”
“나를 상대하겠다고?”
“평화의 신. 나는 네 방식에 공감할 수 없어.”
“죽을 거다.”
“종지부를 찍자.”
* * *
[6과 7 사이로 이동합니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은 무슨……. 이틀밖에 안 지났거든?”
나한테는 진짜 오랜만이라고.
그동안 어? 내가 밖에서 얼마나 힘들게 고생했는지 알아?
거기에 초월자 유지한은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사고를 치고.
그 와중에 유지한과 얼굴을 마주하니 없던 심술도 생기는 느낌이었다.
[공적치 10.000을 소모해 유지한에게 엘릭서(특수) X3를 선물합니다.]
[옜다, 선물.]
“헐.”
[헐은 무슨 헐이야? 물약에서 밀랍 맛 난다고 난리 쳤었잖아.]
“그건 그랬는데, 이렇게 갑자기 받을 거라고 생각은 못 했지.”
유지한이 아이템 창에서 병에 담긴 엘릭서를 꺼냈다.
평범하게 유리병에 담겨 있는 붉은 액체였다.
박시우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가져온 엘릭서였다.
[그거 비싼 거야.]
“신 주제에 싸고 비싸고가 어딨냐?”
[그럼 나는 땅 파서 장사해?]
“내 공적치는? 1만 포인트는 땅 파면 나오냐?”
[그런 인간이 20만 포인트나 가지고 있어?]
“훔쳐봤냐?”
[정당한 권리 행사야. 뭘 하고 돌아다녔길래 20만 포인트나 있어?]
5층은 그렇게 많은 공적치를 주는 층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고 5층 영상을 확인해 봤으나 별일은 없었다.
습격하는 산적 놈들을 전부 죽이고, 죽이고……. 그러다가 열 받아서 자리를 이탈해서 산적들의 본거지를 털어 버리고, 보상해 주겠다는 영주의 제안에 ‘돈은 필요 없으니 4등 시민 하나만 풀어 주쇼.’ 하고 뻔뻔하게 굴었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음, 정말 별일이 아니군.
정말 별일이.
[부탁이니까 사고 좀 안 쳐 주면 안 될까?]
“안 쳤어.”
[네 죄를 내가 아는데?]
“그래서?”
[뭐라고?]
“어차피 한 번 지은 죄, 두 번 세 번 짓든 무슨 상관이지?”
고객님, 그건 이런 상황에 쓰는 말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탑 안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적응을 했다는 티가 풀풀 났다.
다른 부분도 적응한 것 같긴 하다만.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 전에는 안 그랬는데. 너 왜 이렇게 까탈스러워졌냐?”
[예. 어련하시겠어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이라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구긴 누구야 초월자 유지한 때문이지.
이젠 쟤 얼굴을 볼 때마다 초월자 유지한이 떠올랐다.
“그놈들이랑 만났다.”
[그놈들이 누구야?]
“네가 만나 보라고 했던 녀석들.”
아,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던 것 같았다. 까먹고 있었지만.
[해방군?]
“자기네들끼리는 그렇게 부르더군.”
[어떻게 할 건데?]
“딱히, 거기 있는 놈 하나가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만나기로 약속만 잡았어. 그보다.”
유지한이 익숙하게 상태창을 열었다.
“회복약 200개랑 마력 포션 100개, 진통제 100개, 샤워봄은 있는 대로 전부.”
[뭐라고?]
“내놔.”
유지한이 내가 있는 쪽을 흘끔 보더니 대답했다.
들어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점점 녀석의 감이 좋아지고 있었다.
내놓으라고 말한 게 어디인가 싶었다.
유지한이 가져오는 공적치는 상당했다.
다른 도전자들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으나, 누굴 만나도 이 정도로 벌어 올 만한 놈은 없을 것 같았다.
[공적치 2,400을 소모해 소형 회복약x200을 선물합니다.]
[공적치 3,000을 소모해 마력 포션x100을 선물합니다.]
[공적치 500을 소모해 진통제x100을 선물합니다.]
[공적치 2,000을 소모해 샤워봄 1k를 선물합니다.]
“많네.”
[많이 달라면서?]
청개구리도 얘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유지한이 아이템 창을 정리했다.
뭔가 할 말이 더 있어 보였다.
“다른 거 뭐 더 없냐? 스킬이라든지, 스킬이라든지 그런 거. 딱히 스킬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는데, 스킬이면 더 좋을 것 같고. 아, 딱히 스킬이 필요해서 스킬을 달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고 절대로. 절.대. 스킬이 아니어도 되니까 부담 가질 필요는 없고.”
스킬을 몇 번이나 말하는 건지 눈에서 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냥 스킬 달라고 말을 해!
이 무서운 놈아.
이만한 아이템을 선물하고도 유지한의 공적치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냥 순순히 후원금으로 바치면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얼마나 좋아?
뭔가 의미가 변색된 것 같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자.
[선물]
- 대상에게 선물할 수 있습니다.
- 선물 가능 대상 : 유지한
- 선물 가능 스킬 : <풍아(風牙)> <달빛 베기>
[스킬은 줄 수 있는데, 사용하는 건 너 하기 나름이야.]
“무슨 소리야?”
[스킬을 얻었다고 해서 다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유지한이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머리로 아는 거랑 실전은 틀리잖아. 스킬 획득했다고 해서 갑자기 막 하늘에서 유성 떨어트리고 그런 건 못 한다고.]
“거기까진 기대도 안 했는데……. 그럼 전에 배운 두 개는 뭔데?”
[배웠다뿐이지 사용법은 내가 알려 줬잖아.]
선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스킬이고, 그리 어려운 스킬이 아니었다.
마력 탐지는 그냥 저놈이 재능충이라 자각도 못 하는 것뿐이다.
[층간에서 잠깐 수련하는 거로는 안 된다는 거야.]
“알았어, 그. 거, 잔소리도 심하네. 네가 내 부모……. 아니…….”
아무 생각 없이 꺼낸 말에 지한이 갑자기 말을 흐렸다.
멍하니 앞을 보던 유지한의 눈시울이 난데없이 붉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지한이 책상에 엎드렸다.
내가 어디 있는지 헷갈리니까 아예 숨어 버린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단어에 감정이 북받친 모양이다.
‘하긴, 뭐…….’
계속해서 초월자 유지한과 겹쳐 보여서 좀 그랬지만, 그놈과 이놈은 생긴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놈은 딱 봐도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아 보였지.’
10년 전 나와 10년 후 나를 같은 곳에 놓고 본다면, 이 둘은 동일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야 생긴 건 비슷하겠지. 본인이니까.
내 말은 살아온 시간, 경험, 생각이 다르다는 거다.
그 나이대만이 할 수 있는 고민, 경험을 한 자만 알 수 있는 일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저놈이 여태까지 가족 생각 한 번을 안 하고 있었던 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공적치 100k를 소모해 수호자 유지한에게 <풍아(風牙)> <달빛 베기>를 선물합니다.]
“내 10만 포인트!!”
[순식간에 10만 포인트 사라지니까 정신이 드나 보지?]
엎드려 있던 유지한이 벌떡 일어났다.
눈가가 좀 빨간 것 같지만.
[다 울었냐?]
“끅, 안 울었어. 안 울었다고. 안 울었어!”
[한 번만 말해. 귀 안 먹었어.]
“안 울었다고, 누가 울어? 울긴 왜 울어? 어떤 미친놈이 쳐 울고 지랄…….”
[그만하라고 미친놈아! 너 안 울었으니까!]
“안 울었어.”
[네네.]
“진짜라고.”
눈물이나 닦고 말해라.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으로 보였던 초월자 유지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눈앞에 있는 유지한이 우는 모습이 무척 어색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우는 사람 달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
[끝났냐?]
“안 울……. 하아, 됐어.”
[차라리 울 거면 여기서 울어. 어차피 나 말고 누가 보는 사람도 없잖아.]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지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이 된 지한을 데리고 6층과 스킬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 * *
[7과 8 사이로 이동합니다.]
[또 보네?]
“뭔 소리야. 일주일 만에 들어왔는데.”
[8과 9 사이로 이동합니다.]
[오, 오랜만이다?]
“어제 봤잖아!”
[10과 11 사이로 이동합니다.]
[안녕?]
“안녕은 얼어 죽을, 네 시간 개념은 대체 어떻게 처먹은 거야! 아이템부터 내놔!”
……어휴. 말세다 말세야.
[시련의 탑을 퇴장합니다.]
“아이고, 머리야.”
호텔의 침대에서 정신을 차린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코카트리스의 던전을 클리어하고, 박시우에게 휴가를 받았다.
앞으로 정신이 없어질 걸 감안하면 탑을 올라갈 수 있는 시간은 지금밖에 없었다.
성인 남자 넷이 누워도 충분할 것 같은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커뮤니티의 자유게시판에 들어갔다.
은영 누나가 장난을 쳐 놓은 01번 게시글 이후로 게시글을 올려놓은 상황이었다.
[02. 은영 누나!! 4일 전]
조회수 : 1
작성자 : 알 수 없음
어디야 정신 차리면 댓 좀.
└ 송은영(신도) ㅇㅁㅇ!!! 한결이야?? 한결아 ㅠㅠㅠㅠ 21시간 전
“어……? 어어어?”
은영 누나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놀라는 것 같은 댓글을 보니 몸은 무사해 보였다.
상황을 묻는 대댓을 남겨 놓은 후 최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송은영이 댓글을 달았다고?
─ 네, 21시간 전에요.
─ 야! 21시간 전에 단 댓글을 이제 확인하면 어쩌라는 건데!
─ 아, 하하하하. 일이 좀 있어서요.
침대 가운데 앉은 내가 붕 뜬 머리를 긁적였다.
─ 그래서 오늘은 뭐 하냐?
─ 딱히 일정은 없는데요.
은영 누나에게 연락이 안 왔더라면 밥을 먹고 난 이후에 탑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 그러면 너 협회 좀 와라.
─ 협회요?
갑자기 왜? 은영 누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질문하기도 전에 최수현이 먼저 말했다.
─ 적성 검사받으러 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