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동맹 같은 소리 하네 (1)
은영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세계에서 송은영이라는 존재는 사라져야 했다.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나도 몰라.”
“뭔 소리야, 그게.”
은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말을 꺼낸 건 유채영인데 모른다니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은영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지한이 은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해코지하려 하는 건 아닌가? 살짝 놀랐다.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진정해라.”
어깨너머로 손을 뻗은 지한이 손바닥을 펼쳤다.
지한의 손 위에는 포장이 된 알사탕이 있었다.
사탕을 본 순간 은영은 코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걸 달래겠다고 한 행동인가?
“이상한 새끼.”
죽여 버리겠다고 난리를 칠 때는 언젠데, 이제 와 친한 척 군단 말인가.
손에 있는 사탕을 빼앗듯 가지고 와 입에 넣었다.
으득으득.
은영이 신경질적으로 사탕을 씹어 먹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비스라는 곳이 뭔지, 존재 소멸이라는 신벌이라는 게 대체 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도대체 왜 무소속 각성자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정현성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신들을 원하면 원했지, 결코 신과 적대를 할 만한 행위를 한 적은 없었다.
신이라는 것들과 싸우기에 은영은 너무나 약한 존재였다.
대체 그들은 무엇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거지?
유채영이 은영을 손가락질했다.
“너희들은 특별해. 그리고 넌 그중에서도 더.”
“내가 어비스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은영이야 그렇다 쳐도, 이미 사라진 자들은 말이 없다.
사라진 자들에게 특별이니 뭐니 하고 떠들어 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 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위안에 지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은영이 특별이라는 것의 이유를 묻기도 전에 지한이 천장을 바라봤다.
평범한 사무실에 지나지 않았던 공간이 일렁거렸다.
지한이 쳐다보고 있던 천장이 일렁거렸다.
천장이 어떻게 저렇게 굽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푹 꺼진 천장 사이로 금이 가더니 작은 눈 하나가 은영과 지한을 내려다봤다.
한 개의 눈알이 세포 분열을 하듯 갈라지며 수십 개의 눈알 덩어리들이 되었다.
“쯧.”
지한이 신경질을 내며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뽑아 던졌다.
[다. 찾았]
눈알에 난 상처 사이로 검은 진액이 뚝뚝 떨어졌다.
은영이 이슈타르의 반지를 꽉 쥐었다.
순간, 유채영이 은영에게 달려와 손을 붙잡았다.
“할 말이 있어.”
“할 말?”
유채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한을 포함해, 한 달 가까이 같은 공간에서 지냈지만, 유채영은 영혼만 남은 귀신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사람 같은 구석이 있었다.
신전에 묶여 있는 존재인 그녀가 은영이 베리타스 신의 신전에 들어오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 리가 없었다.
은영을 알아본 건 그저 운이었다. 그런데 이걸 운이라고 해야 할까?
운보다는 운명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꽤 지독한 운명이었다.
벌어진 틈을 타고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지한이 떨어진 단검을 주워 검은 손을 잘라 냈다.
비록 크지 않은 공간이라고 해도 한 달을 넘게 틈새를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은영은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나 베리타스 신은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틈새 차원을 공격했다.
지한이 그동안 유채영을 재촉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저 여자.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어.’
육체의 고통과 영혼의 고통은 그 차원이 다르다.
현재 유채영에게 가해지고 있는 고통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이미 골백번은 미치고도 남았을 거다.
그걸 참으면서까지 시간을 끌어야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채영은 한계까지 몰렸다. 그러니 더는 참을 이유가 없다는 게 지한의 판단이었다.
지한이 점점 늘어나는 사념체들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그사이 유채영이 은영에게 뭔가를 말했다.
바로 옆에서 유채영의 말을 들은 은영이 입을 열었다.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아니……. 그러니까 방금 그 말이…….”
“사실이야.”
은영이 뒷걸음질을 치며 주저앉았다.
송은영의 부모님은 은영이 성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서 일어난 대재해로 죽었다.
은영은 자신의 부모님이 몬스터와 싸우다가 사망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채영은 그 대재해의 원인이 된 던전에서 사망한 헌터였다.
그런데.
“네가 우, 우리 부모님을 죽인 범인이라고?”
“사고였지만……. 변명은 하지 않을게.”
당시의 유채영은 침식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은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검은 송곳이 은영의 목을 노렸다.
“송은…….”
화아아악.
몸을 돌린 은영이 발을 휘둘렀다.
은영의 발자취를 따라 불꽃이 일어났다.
콰앙.
은영이 거칠게 발을 내려놓았다.
은영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
“…….”
“대체 왜 말한 거야?”
만약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은영은 유채영이 부모님을 죽였다는 걸 몰랐을 거다.
은영을 본 유채영이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은영에게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체스.
무승부가 아니라 반칙을 써서라도 이겼어야 했다.
* * *
숲 사이사이로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보스 몬스터뿐 아니라 일반 몬스터들도 꽤 있었다.
수풀에 숨어 있던 병정개미가 나타났다.
몸을 뒤로 숙이자 얼굴 위로 병정개미의 뜨거운 다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오!”
몸을 일으키며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팔이 잘려 나갔음에도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다리를 휘둘렀다.
몸을 돌려 다리를 피한 후 녀석의 넓적한 얼굴을 향해 발을 올렸다.
시야를 가리는 발에 당황한 녀석의 머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발을 치운 후 검을 빼내자 병정개미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공략법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병정개미 몇 마리를 처리하고 나니 이번엔 검은 털에 붉은 눈동자를 한 원숭이같이 생긴 몬스터들이 나무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이럴 때는 뭐다?
― 메이데이, 메이데이!
1챗에 말을 걸기 무섭게 최수현의 잔뜩 날 선 대답이 돌아왔다.
― 지랄한다.
원숭이 녀석들이 일제히 나에게 달려들었다.
― 빠져.
최수현의 말에 높이 뛰어올라 거리를 벌렸다.
원숭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뭔가가 날아왔다.
콰아아앙.
머리 위로 생긴 마법진에서 쏟아진 푸른 빛이 검은 털 원숭이들을 전부 죽였다.
빛이 사라지자 산 한가운데로 원형의 공터가 나타났다.
마치 원형 탈모 같…….
크흠, 크흐흠.
실은 이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보다 못한 내가 한마디 했다.
― 적당히 좀 해요.
― 배은망덕한 새끼.
무슨 말을 못 해요. 아주.
나는 죽은 검은 털 원숭이들을 내려다봤다.
― 왜 이렇게 다 부수는 거예요?
― 뭐가?
― 충분히 저격할 수 있었잖아요.
최수현의 실력이라면 근처를 전부 날려 먹지 않고도 원숭이들을 전부 죽이는 게 가능했다.
기술 중에 다수를 저격하는 스킬도 있으면서 왜 이렇게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 야, 저격이 얼마나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줄 알아? 이럴 때는 그냥 다 부숴 버리는 게 효율성 면에서는 최고야.
― 터트리는 걸 즐기는 건 아니구요? 산림청 직원이 보면 게거품을 물고 멱살을 잡을지도 몰라요.
반대편에서 또 폭발이 일어났다.
내 말이 듣기 싫은가 보다.
하긴, 산림청이 대수인가.
최수현은 환경부 장관이 와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을 놈이었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최수현의 방식은 거칠긴 하지만, 효율적이었다.
본인이 즐기는 것 같긴 하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자.
오랜만에 헌터로 복귀를 했으니 저 성격에 얼마나 좀이 쑤셨겠는가.
다행인 건 몬스터들이 베리타스 신의 고유 결계 밖으로 새어 나갈 가능성은 적다는 점이었다.
강우 형에게 연락이 왔다.
― 한결아, 대표님이 좀 와 보래.
이런 건 직접 말하라니까 꼭 강우 형 통해서 전달해 왔다.
소통방이 연결 안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투덜거리면 또 대표님 바쁘다고! 하고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돌아올 게 뻔했다.
까라면 까야지, 내 주제에 뭐 어쩌겠는가.
콰아아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무들이 일제히 잘려 나가며 커다란 바람이 불었다.
저건 딱 봐도 박시우의 짓이었다.
― 적당히 해. 적당히! 인간들이 적당히를 몰라!
누가 봐도 박시우를 향한 말에 어이가 없었다.
너 말이야! 너!
육백산에 원형 탈모를 내는 놈이나, 아예 고속 도로를 만들어 버리는 녀석이나 내가 보기엔 다 똑같았다.
이런 부분을 보면 왜 둘이 절친인지 알 것 같단 말이지.
박시우의 공격을 맞은 황금예티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쓰러졌다.
박시우를 향해 달려가던 중,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직선으로 대검이 날아왔다.
세상에 대검이 나네.
카아앙.
전속력으로 내 목을 노리고 날아온 검을 쳐 냈다.
바닥에 땅을 짚으며 간신히 넘어지는 신세를 면했다.
“저 검은…….”
쳐 내고 나니 진상혁의 바스타드 소드라는 걸 알았다.
발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상혁과 라온 길드 헌터 두세 명이 다가왔다.
허공을 맴돌던 대검이 커다랗게 돌더니 진상혁의 손으로 돌아갔다.
와.
영노를 잡을 때는 저런 묘기 안 보여 줬으면서,
“당신 힘숨찐이야?”
“박시우 따까리. 박시우는 어디 있지?”
“누가 따까리야!”
하늘검을 높이 들어 붕붕 휘둘렀다. 그러자 마탄이 진상혁에게 날아왔다.
파아앙.
진상혁이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러 날아온 마탄을 쳐 냈다.
“무슨 짓이냐?”
옆에 있는 다른 헌터들은 진상혁에게 마탄이 날아왔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이 양반, 반사 신경이 상당하다.
초월기를 사용할 때 적당히가 어쩌고 했던 게 허풍은 아니라는 뜻이다.
진상혁이 살기를 내뿜자 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나, 나 아냐!”
억울하다! 억울해!
진상혁이 마탄이 날아온 방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라온 길드 헌터 중에서도 마탄을 사용하는 헌터는 있지만, 이 정도로 장거리 저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최수현 말고 없었다.
그건 그거고.
― 뭐 하는 짓이에요!
― 도와달라는 거 아니었나?
― 아닌데요?
습관처럼 하늘검을 붕붕 휘두른 게 최수현의 눈에는 도와달라는 신호로 보였나 보다.
언제는 스스로 하라더니, 이젠 쓸데없는 짓만 한다.
자기도 머쓱하긴 했는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황금예티가 쓰러진 방향을 보며 말했다.
“박시우라면 저쪽에……. 아, 없네.”
혹시 몰라 마력 탐지를 사용하니 그새 반대편으로 이동해 있었다.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시우는 왜 찾는 거야?”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서지훈이 베리타스 신의 신도라는 걸 봤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진상혁이 미간을 좁혔다.
레이드나 이벤트에 참여하는 순간, 모시는 신은 자동으로 공개가 된다.
유일한 구심점인 유채영이 죽고 난 이후, 베리타스 신의 신도들은 사실상 와해가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서지훈이 엘시온을 버리고 베리타스에 붙었다는 건 진상혁의 입장에서는 그리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악타이온의 신도 놈은 왜 있는 것이며, 유채영은 죽은 게 맞나? 놈들은 뭘 꾸미는 거지?”
“일단 한 개는 알아.”
내가 진상혁을 포함한 라온 길드 헌터들을 손가락질했다.
“쟤들은 우리보다 너희들을 더 싫어한다는 거.”
놈들의 목적은 육백산에 있는 헌터들의 몰살이다.
베리타스 신의 목적까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 있는 헌터들이 전부 죽는다면 그다음 분노의 대상은 라온 길드 그 자체였다.
진상혁은 그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라는 말 알지?”
“그 말을 했던 왕자는 신하에게 살해를 당했다.”
“…….”
“그리고 적의 적은 아군이 아니라 별개의 개새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