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단 하나의 희망 (1)
콰아아앙.
하늘검과 검이 되어 버린 정현성의 두 팔이 부딪혔다.
발에 힘을 주자 땅의 일부가 아래로 살짝 내려앉았다.
정현성의 왼팔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나를 삼키려 들었다.
보고 있던 최재형이 방패를 사용하려 들었다.
“야! 위험…….”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다.
몸을 틀어 자세를 잡은 후 정현성의 팔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이 지나간 자리로 푸른 궤적이 남았다.
파아앗.
검을 감싸고 있던 근육들이 찢어지며 피가 쏟아졌다.
정현성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울컥,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정현성의 검과 달려 나온 최재형의 방패가 부딪쳤다.
방패를 크게 휘두른 최재형이 정현성을 밀어냈다.
동시에 내가 다시 뛰어 들어갔다.
검이 무겁고, 빠르게 움직였다.
“왜, 어째서, 어째서!!”
정현성의 눈에서 피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와 정현성이 거칠게 부딪혔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 여파로 근처에 있는 나무들이 쓸려 나갔다.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지면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주변의 소음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나와 정현성은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정현성이 반쯤 끊어져 너덜거리는 팔을 휘둘렀다.
“이건 잘못된 선택이야!”
“알고,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정현성이 절규하듯 소리를 질렀다.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이 기어코 정현성의 팔을 잘라 냈다.
정현성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다른 팔이 안 그래도 심한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라고 모를 리가 없잖아요!”
잘려 나간 팔 사이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하늘검을 꽉 쥐며 앞으로 다가갔다.
손에서 흐른 피가 하늘검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여기까지만 해. 은영 누나가 보면 뭐라고 생각할 것 같아?”
은영 누나의 이름에 정현성이 움찔거렸다.
“당신이 은영 씨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요?”
“만약 은영 누나였다면 너처럼 베리타스 신을 선택하는 짓은 하지 않았을걸.”
“베리타스 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아무도 저라는 존재를 기억하지 못한 채 죽으라구요?”
한쪽 팔이 잘린 정현성이 다시 달려들었다.
팔을 쳐 냄과 동시에 아주 잠깐 현기증이 일었다.
바닥을 짚으며 백 텀블링을 해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분노의 질주는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힘이 강해지는 능력이었다.
강해지는 힘을 다친 몸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느냐에 대한 싸움이었다.
내가 정현성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정확하게는 일방적으로 내리찍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럴싸한 검법도, 스킬도 아니었다.
그저 검을 일방적으로 내리긋는 행위가 계속 반복됐다.
터져 나간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신들은 새로운 경쟁자가 생기는 걸 두려워한다.
그러니 신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에게 무소속이니 뭐니 하며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었다.
라케시스가 왜 그렇게 나를 못 죽여 안달이 났는지도 분명해졌다.
이건 비단 정현성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바꾸겠다고!”
검을 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이 세계에 온 이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나의 세계는 헌터도, 몬스터도, 각성자도 없었다.
나도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다.
차라리 코피를 흘리며 공부를 했을 때가 더 행복했다고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엎어진 물은 되돌릴 수 없다.
신위를 포기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라케시스가 나를 공격할 리가 없었을 거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이 세계에 와서 너무 많은 것을 봐 버렸다.
정현성, 송은영.
그리고 과거 시련의 탑에서 있는 유지한, 이은희.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않은 무소속 각성자들.
그들 중에서는 분명 나처럼 신위에 오르는 데 성공한 녀석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을 가진 자들이 전부 사라졌다.
이 모든 게 신들이 만들어 낸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놈 지배자의 권한이 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까짓거 1등 하면 될 거 아냐!”
하늘검이 더욱 푸르게 빛나며 정현성의 팔을 밀어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하다면 손에 넣어 주겠다.
이 잔혹한 게임에서 승리자가 되어 세계를 바꿔 주겠다.
리즈는 나에게 물었다.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나 있냐고?
리즈를 고독으로 몰아넣은 그 세계가!
고블린의 피를 묻히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녀석의 등을 떠밀어야만 하는 내가!
정현성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선택을 강요한 이 상황이 전부 다 지긋지긋했다.
그것이 내가 탑과 이 세계를 경험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서걱.
정현성의 남아 있던 팔이 완전히 잘려 나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양팔을 잃은 정현성이 비틀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런 건…… 말도 안 돼요.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정현성은 사람으로서의 형태를 잃어 가고 있었다.
몸은 반쯤 썩어 문드러졌으며 얼굴은 반 이상이 뭉개졌다.
아르벨리시아 대륙에서 있었을 때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살아남았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나를 바라보던 정현성이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불가능…… 해요.”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야 나아.”
그것이 나의, 아니……. 나와 함께 갈 녀석들의 의지였다.
균형을 잃은 정현성의 몸이 앞으로 쓰러지며 무릎을 꿇었다.
“은영 씨가……. 그랬어요. 소개.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왠지 누군지 알 것 같네요.”
나는 정현성의 목을 향해 하늘검을 높이 들었다.
마지막을 직감한 정현성이 고개를 들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푸른 검이 정현성의 시야를 가렸다.
정현성의 뺨으로 눈물이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도, 조금만……. 일찍 만났으면 달랐을까요.”
올라갔던 하늘검이 손을 따라 땅으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 정현성의 바닥에서 검은 눈동자가 생겨났다.
“망할!!”
뒤늦게 스킬을 사용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콰아아아앙.
정현성의 몸을 덮는 검은 기운과 그 충격 때문에 몸이 허공에 떴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떨어지면 정말 아플 것 같은데.
충격을 대비하고 있던 그때 뭔가가 내 목덜미를 낚아챘다.
“미친.”
“그놈의 미친 좀 그만…… 쿨럭…… 어윽!”
최재형이 나를 붙잡은 채 바닥에 내려놓았다.
땅에 발을 디디기 무섭게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바닥을 뒹군 내가 엘릭서를 꺼내 마셨다.
“엘릭서도 만능은 아니네.”
“너 방금 죽을 뻔했어! 목숨이 몇 개야, 대체!”
목숨 걸고 싸우길 꺼리던 최재형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최재형이 정현성을 바라봤다.
두 팔이 잘리고, 눈은 사라졌으며 몸이 반쯤 녹아 있는 정현성은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정현성은 죽지 않았다.
정현성의 몸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정현성을 움직이게 하는 다른 존재가 있었다.
[네가, 뭘 아는 것이냐.]
“드디어 나타났군.”
“뭐, 뭐가 나타나?”
“베리타스 신.”
“뭐? 신이라고? 저게?”
“잠시 의식을 빌린 반쪽짜리지만.”
반신인 정현성에게 베리타스 신의 의지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감히.]
정현성이 곧 베리타스 신이니, 녀석은 나와 현성의 대화를 엿들었을 것이 확실했다.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낸 내가 하늘검을 놈에게 겨눴다.
이 말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은영 누나 내놔, 개새끼야.”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불쌍한. 여기서 죽어라!]
정현성을 중심으로 뻗어 나온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나와 최재형을 감쌌다.
“헐.”
정현성과 내가, 순식간에 베리타스 신이 만들어 낸 돔 안에 갇혔다.
“야, 이 이거 어떻게 해! 강한결!”
최재형이 검을 꽉 쥔 채 벌벌 떨었다.
다급하게 방패를 드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갈 수, 없다.]
벽과 바닥을 뚫고 올라온 검은 마력들이 나에게 향했다.
하늘검이 호선을 그리며 사방으로 날아오는 공격들을 쳐 냈다.
순식간에 정현성의 앞으로 다가갔다.
검이 정현성이 아닌 머리 위의 허공을 향했다.
몸을 틀어 검을 긋자 그 자리로 커다란 눈알이 나타났다.
“내가.”
눈알에서 벌어진 상처 사이로 수십 개의 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상처 사이로 하늘검을 찔러 넣자 아래에 있는 정현성이 대신 비명을 질렀다.
[무슨, 뭐 하는…….]
나는 요행으로 라케시스에게서 도망친 게 아니다.
내 힘은 세계를 부술 힘이었다.
그 세계에는 신들의 신전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강림’을 시도합니다.]
라케시스에게 도망치느라 힘을 거의 잃었지만, 지금이 상태라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심지어 이 녀석의 신전은 침식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너, 너는 대체…… 내 세계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
하늘검의 푸른 기운과 검은 마력이 섞이며 허공을 갈랐다.
‘유채영이라면.’
이 공간의 일렁거림을 눈치채 줄 거다.
파아아앗.
나와 최재형을 감싸던 검은 돔이 사라지며 허공에 커다란 검의 흔적이 생겨났다.
벌어진 공간 사이로 은영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어? 한결아?”
은영 누나가 축복의 나래를 이용해 허공을 박차며 내 쪽으로 뛰어올랐다.
타악.
은영 누나의 손을 붙잡아 높이 던진 후 바닥으로 내려왔다.
“윽.”
무리를 하긴 한 모양인지 눈앞이 흐릿했다.
[어떻게, 한 거냐! 그 힘은…….]
“한결아! 보고 싶었어!”
착지한 은영 누나가 나를 와락 안았다.
“허윽, 으윽…… 아파. 아파!”
내가 그만하라며 은영 누나를 밀어냈다.
그럴 상황도 아니거니와 진짜 아팠다.
오랜만에 보는 누나지만, 모습을 보아하니 잘 지낸 것으로 보였다.
은영 누나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흐윽,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알아? 세상에 온몸이 상처투성이……. 엥? 여긴 어디고, 넌 누구?”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라온 길드의 최재형이라고 합니다. 하, 한결이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누님.”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최재형의 이상한 태도에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간신히 은영 누나에게서 벗어난 내가 거친 숨을 골랐다.
라온 길드라는 말에 은영 누나가 최재형을 경계했다.
누나도 라온 헌터들이 아리아 길드 헌터들을 안 좋게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최재형과는 오해를 풀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이 녀석은 적이 아냐.”
최재형이 내 말에 동조하듯 재빨리 검을 뒤로 숨겼다.
은영 누나의 살기가 가라앉았다.
동시에 잔뜩 분노한 베리타스의 공격이 날아왔다.
“위험…….”
최재형이 방패를 꺼내기도 전에 은영 누나가 발을 크게 휘둘렀다.
은영 누나의 손에서 붉은 반지가 반짝거렸다.
이슈타르의 반지였다.
발이 지나간 자리로 크고 화려한 불꽃이 일었다.
최재형이 일렁거리는 불꽃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콰앙.
베리타스의 공격을 막아 내고, 바닥에 발을 내리찍은 은영 누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