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왕 게임 (2)
“거절할게.”
이은희가 아이템창에서 활을 꺼냈다.
지난번에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은희의 활은 11층에서 봤던 것과는 형태가 달라져 있었다.
오래된 신화의 물건에는 자아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두 팔을 유지한의 어깨에 안착한(이제 요령이 생겼다.) 후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혹시 이은희의 활에 대해 아는 거 없어?]
“초코송이에 관한 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너 저거 좋아하냐?”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유지한의 말대로 나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이은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심 자신이 모시는 신에 대해 모르는 이은희가 유지한과는 다른 의미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지랖이라는 건 안다.
다행히 유지한은 그냥 한 말인 듯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아스트라.”
[……뭐?]
만약 지금 내 입에 뭔가가 들어갔다면 먹던 걸 전부 뱉어 냈을지도 몰랐다.
신화급 무기라고 해서 다 같은 무기는 아니었다.
그 무기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위력과 가치가 달라진다.
아스트라는 신화급 무기 중에서도 최상급 무기였다.
“왜? 저거 좋은 거냐?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저쪽으로 갈아탈 걸 그랬네.”
[야! 너, 네 검이 얼마나 좋은 건데!]
땅 파면 800만 달러가 나와?
그 800만 달러 때문에 최수현에게 어떤 욕을 들었는지를 생각하면 유지한은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칼이 잘 들긴 하는 모양인지 유지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와 유지한이 긴장감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우도진에게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하하, 하하하!”
“저놈 실성했냐? 야, 초코송이. 저거 죽인다.”
“통보하지 마. 쓰레기야.”
“쓰레기 아니라고!”
내 쓰레기 조교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유지한이 쓰레기라는 단어에 반응을 해 소리를 질렀다.
“리더, 그러니까 리더는 안 되는 겁니다. 리더는 너무 착하다구요! 지금 로비의 모습을 보세요! 모두가 중앙길드의 가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얻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다시 한번 생을 얻었는데, 왜 발버둥을 치지 않죠? 누군가가 구원해 주길 바라는 녀석들 따위! 살아 있을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그래.”
가만히 듣고 있던 유지한이 검을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끼 진짜 누구 편이야?
아니나 다를까, 이은희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유지한. 너라면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지. 내 밑으로 들어와라. 네 성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런 마음가짐은 좋아하거든.”
“하나만 물어보지.”
“뭐지?”
“넌 왕이 되어 박승환을 죽이는 게 목적이냐?”
“그래.”
“그렇다면 왜 중앙길드 놈들과 손을 잡았지?”
“왕 게임은 박승환도 원하는 거다. 목적이 같다면 싸워야 할 이유는 없지. 뭐, 일시적 동맹 같은 거다.”
우도진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유지한의 모습에 이은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지한은 나에게 있어서도 통제를 할 수 없는 조커 같은 존재였다.
이은희는 진심으로 유지한이 우도진의 편에 붙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기각.”
“어째서지?”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첫 번째, 난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두 번째, 난 중앙길드 놈들을 혐오한다. 박승환이랑 손을 붙잡은 시점에서 너도 똑같은 새끼라고 생각되는데?”
“그럼 박승환이 왕이 돼도 좋다고?”
“그럼 네가 왕이 된 이후의 로비는 괜찮을 거라는 근거는 어디 있지? 내가 한 가지 예언을 해 주지.”
유지한이 검을 뽑은 후, 검 끝을 박승환의 가슴 근처로 겨눴다.
타앗.
발을 박찬 유지한이 우도진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야.]
“나도 알아.”
우도진을 공격하려던 유지한이 반보 정도를 사이에 두고 방향을 틀었다.
은신 스킬을 사용하고 숨어 있던 해방군 유저들이 나타나 무기를 휘둘렀다.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유지한이 균형을 잃은 사내의 어깨를 베어 냈다.
남자가 앞으로 쓰러지자 살짝 뛰어오른 후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달빛 베기를 사용했다.
흙 바닥이 깊게 파이며 반원형으로 잘려 나갔다.
우도진이 유지한의 빈틈을 찾아 창을 들었다.
창의 끝이 유지한에게 향하던 그때, 이은희의 활이 우도진에게로 날아왔다.
긴 창이 한 바퀴 원을 그리며 활을 쳐 냈다.
넉넉잡아 스무 명 정도의 해방군이 있었다.
그들이 이은희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이나 싸늘했다.
처음부터 이은희의 편이 아닌, 우도진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리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리더에게는 왕의 자질이 있어요!”
“하, 이은희가 왕의 자질? 개소리도 신박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네가 리더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는 거냐!”
“스토커 새끼.”
유지한이 검을 쥐며 자세를 잡았다.
“여기 있는 놈들을 전부 죽이고, 중앙길드의 놈들을 죽이겠다.”
“혼자 중앙길드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어리석은 자식!”
유지한이 노골적으로 우도진을 비웃었다.
유지한은 [인구 청소]의 상태창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경고였다.
집주인이 들어와 치우기 전에 니들끼리 청소를 하라는 뜻이었다.
“다음 뉴비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최대한 많이 죽여 주마.”
유지한의 눈빛이 살기로 물들었다.
“지한 오빠가 그렇게 말한다면, 저도 도울게요.”
김다솜의 손에는 처음 보는 종류의 아이템이 있었다.
푸른 구슬을 중심으로 창의 끝처럼 생긴 뾰족한 물체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상당히 독특한 무기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죽여라!”
우도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변에 있던 유저들이 덤벼들었다.
다솜이가 손을 뻗자, 오른손에 있던 뾰족한 물체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유저들을 공격했다.
“으아아악!”
“크아악! 으윽!”
“빌어먹을 애새끼가!”
“겉모습에 속지 마! 저놈은……. 박지훈과 같은 30층 유저다!”
어디서 정보가 샌 건지는 몰라도,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유지한이 다시 검을 쥔 채 앞으로 달려갔다.
[할 수 있겠냐?]
“그동안 손가락 빨고 구경만 한 주제에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하지 마.”
하여튼 얘한테는 무슨 말을 못 한다.
[힘내라.]
나라고 아주 유지한을 도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차하면 유지한의 몸을 빌리면 되니까.’
다만 이 경우 두 번은 힘들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비장의 카드 정도로 가지고 있는 게 맞았다.
나는 유지한을 믿어 보기로 했다.
우도진의 붉은 창이 유지한의 검과 부딪혔다.
“숨어 있지 말고 나오지?”
“그러고 보니 넌 이상할 정도로 감이 좋았지, 스킬 같은데.”
우도진이 고개를 까닥이자, 기둥 근처에 숨어 있던 중앙길드 유저들이 나타났다.
“큭큭, 해방군을 자처한 주제에 내분이라니.”
“뭐가 됐든 이은희를 죽일 수 있는 기회라면 환영이지. 난 저년에게는 이골이 나 있다고.”
“우도진. 너!”
“리더. 정신 차리세요. 모두를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왕이 되어서 로비를 다시 만드는 겁니다!”
“개소리하지 마라.”
우도진의 창이 유지한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지한이 백 텀블링을 하며 우도진의 창을 밟은 후 풍아를 휘둘렀다.
자세를 잡은 우도진이 창을 내찔렀다.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붉은 기운이 직선으로 뻗어 나가며 유지한의 검과 부딪혔다.
힘이 부족한 유지한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위를 잡은 우도진이 창을 내리꽂았다.
유지한이 재빨리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그러자 우도진이 지한의 배를 향해 발을 휘둘렀다.
유지한의 몸이 판잣집 아래로 내리꽂혔다.
콰아앙.
검을 쥔 손목이 움찔거렸다.
“제길!”
이은희가 활시위를 당겼다.
엉망이 된 판잣집 사이에서 먼지가 쏟아졌다.
“망할 초코송이! 방해하면 뒈진다!”
유지한이 소리를 지르자, 이은희가 움찔거렸다.
유지한은 이마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저 새낀 내가 죽여.”
“17층 주제에 자만하지 마라.”
유지한의 어깨에 매달린 내가 고개를 돌렸다.
이은희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신언을 사용해 이은희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을 거야.]
“윽, 알았어.”
이은희는 심호흡을 하며 화살의 방향을 바꿨다.
해방군 유저들이 이은희를 둘러쌌다.
“리더, 정말로 인구수를 줄이기 위해 중앙길드와 전쟁을 추진했던 겁니까?”
“그래.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인구 청소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어!”
“설령 전쟁에 실패해도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아.”
이은희가 활을 꽉 쥐었다.
“그러니 경고할게. 지금이라도 물러나. 이건 마지막 경고야.”
“하. 경고 같은 소리 하네! 미친년이!”
“이봐! 이건 우리 일…….”
“닥쳐, 영웅 흉내나 내는 쓰레기들이. 결국 너희나 저년이나, 우리나 같은 새끼들이지!”
앞으로 나선 그가 너클을 낀 주먹을 꽉 쥐었다.
“크크, 최근 싸울 일이 없어서 힘 조절을 못 하니 이해해라!”
그가 너클을 낀 주먹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바닥이 일렁거리며 흙으로 만든 거대한 손이 이은희의 옆에 나타났다.
활을 쥔 이은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콰아아앙.
두 개의 손이 손뼉을 치며 이은희를 덮쳤다. 그러나 이은희는 그곳에 없었다.
“위, 위쪽이다!”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가락질했고, 재빠르게 마법을 사용했다.
이은희는 날아오는 마법을 활을 휘둘러 쳐 냈다.
“힘 조절?”
이은희가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단 한 발의 활에서 뻗어 나간 수십 개의 빛들이 마치 유성처럼 쏟아졌다.
그것은 규모가 작긴 해도, 그날 보았던 유성우의 축소판이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힘 조절이었다.
이은희의 몸이 가볍게 바닥에 떨어졌다.
한 발로 떨어져 균형을 잡은 이은희가 두 번째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붉은빛을 머금은 활은 딱 봐도 마디가 무척 두꺼웠다.
“이런 게 힘 조절이야.”
이은희가 활시위를 당기자 붉은 화살이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퍼어어어엉.
엄청난 소리와 함께 뻗어 나간 화살은 거대한 돔에 닿은 후에야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제, 제길! 쫄지 마!!”
“그래 봤자 셋이다!”
그들도 산전수전 다 겪은 유저들이었다.
금방 마음을 다잡고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화려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우도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카앙.
우도진이 창을 돌리자, 유지한이 거리를 벌렸다.
창과 칼은 비거리에 있어서부터 차이가 났다.
유지한은 이런 종류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이 자식.”
이를 악문 유지한이 몸을 숙이며 달려들었다.
우도진이 창을 휘두를 때마다 붉은 잔향이 지나갔다.
“넌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런 것 같네.”
이 새끼가?
네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