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송도 특별시 (2)
[좋아.]
나는 유지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지한이 원하는 게 강함이라면 충분히 내가 도와줄 수 있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기도 했으니.’
탑 바깥에 있는 초월자 유지한의 강함은 내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필멸자 유지한이 따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초월에는 대가가 따라.]
“뭐?”
내 말에 유지한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인상을 살짝 구겼다.
이은희나 김다솜이 초월자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도 두 사람이 초월을 한 건 아니었다.
유지한의 반응을 통해 나는 유지한이 초월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대가라고?”
[초월자는 모두 ‘금기’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 금기를 어기면 사념체가 돼.]
“사념체?”
[자아를 잃어버린 자. 또는 방황하는 자. 그게 사념체야.]
“설명이 필요한데. 금기를 어겨서 사념체가 되면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 거지?”
[아틀락 나챠를 봤잖아. 그놈은 이계의 괴물이야. 사념체가 된다는 건 세계의 룰에 편입이 될 수 없다는 걸 말해. 명계에도 갈 수 없으니 환생도 불가능하겠지.]
“그 괴물도 과거에는 초월자였던 건가?”
[그건 아무도 모르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고.]
유지한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이해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네가 금기를 어기면 나는 널 죽일 수밖에 없어.]
“나를?”
[부정한 것은 영향을 잘 받으니까. 신도인 네가 사념체가 되면 나 역시 침식을 당해.]
“그러니까 너도 사념체가 된다는 거지?”
[그런 셈이지.]
유지한이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입을 다물고 있는 유지한을 보면서 드는 생각인데, 탑 바깥의 초월자 유지한의 금기는 ‘과거를 말하지 말 것.’이다.
눈앞에 있는 필멸자 유지한이 초월자가 된다면 저 녀석의 금기도 같을까?
필멸자 유지한이 초월자가 돼서 금기를 받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확답을 할 수 없었다.
“금기를 어기지 않는다면 초월에는 문제가 없다는 거지?”
[뭐, 그렇지?]
“상관없다.”
[…….]
“박승환 그놈도 금기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초월자가 됐을 테니까.”
유지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적응이 안 되네.’
살기를, 강해지기를 갈망하는 탑 유지한과 다르게 초월자 유지한은 같은 얼굴을 한 다른 사람 같았다.
저 열정적인 놈이 어쩌다가 썩은 동태 눈깔이 됐을까.
상태창을 연 유지한이 나에게 7천만 포인트를 후원했다.
[수호자 ‘유지한’으로부터 공적치 70,000,000을 후원받았습니다.]
[소테르 신의 Lv이 올랐습니다.]
[소테르 신의 Lv이 올랐습니다.]
[소테르 신의 Lv이 올랐습니다.]
[소테르 신의 Lv이 올랐습니다.]
[현재 유지한의 후원 랭킹은 No. 1입니다.]
유지한은 엄청난 공적치를 후원하는 데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최수현도 눈치껏 나눠서 보낸 걸 생각하면 확실히 후원할 때도 신도의 성격이 보이는 것 같았다.
후원한 유지한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말을 하려던 유지한은 이내 별거 아닐 거라며 허공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공적치를 받은 나는 유지한에게 당장 초월은 힘들다고 사정을 설명한 후 18층에 대해 짧은 팁을 주고 탑을 나왔다.
* * *
나는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렸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1시가 좀 넘었다.
‘오전을 통으로 날렸네.’
최근 들어 느낀 건데, 탑과 현실 사이의 시간 축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어긋나 있었다.
어긋난 시간축 때문에 안 들어갈 수도 없으니 결국은 내가 감안해야 하는 리스크인 셈이었다.
거실로 나오자 유지한이 소파에 앉아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유지한은 핸드폰에 들어갈 것처럼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필멸자 유지한을 처음 만났을 때 죽기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짧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 그 나이쯤 되면 노력해서 이룬 거 하나쯤은 있을 텐데, 그런 거 없어?
─ 롤 승급 전이였다고.
그때의 유지한은 아직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할 때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행적지가 피시방이었지.’
기억이 어긋난 유지한이 게임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짓거리를 할 때면 위화감이 들긴 하지만, 이럴 때는 또 내가 아는 유지한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슬쩍 다가가 유지한의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라.”
유지한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동시에 유지한의 화면에 커다랗게 [패배]라는 글씨가 나타났다.
유지한은 곧바로 게임을 나가더니 누군가에게 톡을 보냈다.
「죽어ㅡㅡ」
상대 쪽에서 온 답장을 무시한 유지한이 한숨을 쉬며 어딘가로 들어갔다.
<2위 폭풍전야.>
“……푸웁.”
폭풍전야라니.
네이밍 센스 하고는.
그런데 2위라니. 도대체 게임을 얼마나 처한 거야?
유지한의 바로 위에는 <집나간곰탱이>라는 녀석이 버티고 있었다.
유지한과 싸운 녀석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긴 그 녀석은.’
여태껏 자신의 얼굴도 비추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키보드 워리어였다.
오죽하면 가지고 있는 스킬도 하나같이 그 모양이겠는가.
다시 집나간곰탱이와 매치를 잡은 유지한이 나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나는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훅, 하고 들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당할 대로 당한 후라 그런지, 유지한의 행동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등을 돌리자 유지한이 말을 걸었다.
“어이, 전리품.”
“죽여 버…… 왜!”
유지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 들어 뭐만 하면 ‘죽여 버린다.’라는 단어가 입에 뱄다.
문제는 상대였다.
유지한은 죽여 버린다고 하면.
─ 죽여 버린다고? 내가 너부터 먼저 죽여 주지!
하고 검을 꺼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었다.
제길, 서러워서 말도 못 하네.
그리고 왜 자꾸 전리품이라고 말하는 거야!
‘걸레짝보다는 낫긴 한데.’
그냥 둘 다 짜증 나는데?
나를 본 유지한이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뭔데?”
“야마토는 오른쪽 가슴에 문신이 있다.”
자기 할 말을 마친 유지한이 다시 고개를 숙여 폰 게임에 집중했다.
초월자 유지한은 열도(일본)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굳이 대답할 필요성은 없다고 판단한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은 나는 탑 유지한에게 받은 공적치에 대해 고민했다.
─ 참, 그런데 너 왜 1억밖에 없냐?
왕의 조건은 3억 칩이었다.
최종 보유 칩은 진정한 왕이 탄생했을 때 때 가진 칩을 기준으로 집계가 된다.
아쉽게도 유지한은 박승환의 칩을 가지고 올 수는 없었다.
그걸 고려해도 유지한의 칩은 1억이 아니라 3억 칩이 되어야 정상이었다.
─ 나눠 줬어.
─ 네가?
─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유지한의 말에 의하면 3억 칩 중 1억은 이은희가, 각 5천 칩을 김다솜과 한미래가 나눠 가졌다고 말했다.
혼자 다 해먹을 줄 알았는데, 이런 부분은 그래도 인간적(?)이었다.
탑 유지한과 이야기를 하면서 드는 한 가지 위화감이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유지한에게 공적치를 받을 때, 나는 문득 최수현이 떠올랐다.
─ 신에게 사기라도 쳤어요?
─ 너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최수현은 이 전에 소테르 신에게 1천만 포인트 정도를 후원한 전적이 있었다.
신에게 사기를 쳤냐는 말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본 최수현의 공적치는 딱 천백만 정도였다.
왕 게임 당시 ‘칩’은 공적치를 물리적으로 바꾼 재화이기도 했다.
‘설마.’
왠지 최수현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수호자‘최수현’으로부터 공적치 100만을 후원받았습니다.]
[수호자‘최수현’으로부터 공적치 100만을 후원받았습니다.]
[수호자‘최수현’으로부터 공적치 100만을 후원받았습니다.]
“뭐, 뭔데?”
난데없이 들어오는 300만 포인트에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100만 포인트가 더 들어왔다.
동시에 최수현에게 전화가 왔다.
─ 여보세…….
─ 뭐냐?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최수현이 말을 잘랐다.
─ 네?
─ 갑자기 뭐냐고! 왜 내가 1위가 아닌 건데! 너 소테르 신의 대리자라며. 말 좀 하지?
최수현이 갑자기 후원을 한 건 순전히 자신의 순위가 밀려서 그런 것뿐이었다.
현재 나에게는 3명의 신도가 있었다.
유지한(탑), 은영 누나, 최수현.
탑 차원을 빠져나올 때면 탑의 유지한의 이름이 블랙 처리가 되었다.
나는 핸드폰을 붙잡고 최수현을 달랬다.
─ 형,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사정이 그렇게 됐어요.
─ 송은영이 말했던 물음표 놈이냐?
─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 들었으니까 알지, 어떻게 알아? 그 녀석이 게시판에서 물음표 처리된 유령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 적 있거든.
─ 대충 비슷하다고 해 둘게요.
최수현의 말을 들은 나는 커뮤니티 창을 들어갔다.
‘이게 커뮤니티야, 채팅방이야.’
가장 최근 게시글 제목부터가 [야? 어디냐?]였다.
은영 누나와 최수현은 커뮤니티의 게시판 제목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글을 맨 밑으로 내리자 삭제가 되었다는 글 하나가 나왔는데, 확인하니 탑의 유지한이 적었다가 지운 글이었다.
─ 얼마냐?
─ 뭐가 얼마예요?
─ 얼마면 되냐고!
최수현은 정체를 모르는 신도에게 후원 랭킹을 빼앗긴 게 퍽 억울한 것으로 보였다.
‘대체 얼마를 꿍쳐 놓은 거야!’
고민 끝에 나는 조금 과장을 덧붙여서 탑 유지한에게 받은 금액을 말했다.
금액을 들은 최수현은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 * *
늦은 밤 송도 센트럴파크.
모자에 후드티를 눌러쓴 나는 정원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주머니에는 유지한으로부터 바꿔치기한 부스터가 있었다.
─ 야, 최소한 뭘로 바꿔치기했는지 정도는 알려 줘.
─ 그냥 물인데?
유지한이 뭘 기대한 거냐며 나를 한심하게 본 건 덤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주변을 돌아다녔다.
‘왔군.’
멀리서 평범한 옷을 입은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많이도 왔네.’
남자의 주변으로 여러 명의 사내가 몰래 다가왔다.
─ 관리국은 송도 시청과 건물을 나눠 쓴다. 일단 붙잡혀서 난리를 쳐라.
─ 그러면?
─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주변을 머뭇거리던 남자가 눈치를 보더니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늘 날씨가 좋군.”
“우산은?”
양하진이 알려 준 접선 대사를 읊었다.
관리국 헌터가 숨어 있는 석상 쪽을 흘끔 보던 남자가 대답했다.
“가지고 왔지.”
나는 주머니에서 바꿔치기한 부스터를 건넸다.
남자가 떨리는 손으로 부스터를 받았다.
“돈은?”
“미안하게 됐군.”
식은땀을 흘리던 그가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숨어 있던 관리국 사내들이 튀어나와 나를 덮쳤다.
오랜만에 연기 좀 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