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종장[終章] (2)
나는 이어폰으로 박시우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헌터 업계 전체를 뒤집어 놓았던 부스터 사건이 마무리되고, 한동안의 휴식이 주어졌다.
아무리 송도 사건으로 인해 헌터 협회에 대한 개혁을 축소했다고 해도 정혜인은 반 헌터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에 길드며 협회 관계자며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최수현의 말에 의하면 최근에 진행된 S급 던전 프로젝트 중에 실행된 것보다 파기된 프로젝트의 수를 세는 게 더 쉬울 정도라고 했다.
─ 최수현은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
─ 지금 은영 누나랑 싸우고 있어.
내 대답에 박시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최수현과 통화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안 받아서 나에게 전화가 온 것 같았다.
─ 무슨 일인데? 내가 수현이 형한테 전해 줄게.
─ 그러니까……. 하아, 어차피 너도 알아야 할 내용이니 상관은 없겠군. 협회에서 개편안 내용이 내려왔다. 정부의 의사에 따른 거라고는 하는데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은 그렇다 치고. 최수현 그놈에게 길드세 인상이라는 말만 전해 주면 된다.
아리아 길드가 작은 길드는 아니다 보니 박시우의 밑에도 전문가 집단이나 실무진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그래도 기존에는 3명이 하던 일을 혼자 결정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인지 박시우는 최수현에게 꽤 많은 의견을 물어보는 편이었다.
최수현은 더는 협회 출신도 아니고, 파트너십 헌터라는 허울 좋은 구실도 있으니 그전에는 암암리에 하던 짓을 이젠 합법적으로 대놓고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박시우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꽤 심각한 이야기가 분명한데, 정작 사정을 모르는 내가 듣기에는 그게 무슨 문제지? 싶은 게 다였다.
─ 알았어. 또 뭐 있어?
─ 우리 길드도 한동안 S급 던전 프로젝트는 전면 중단이다.
─ 뭐? 왜?
다른 길드야 정부와 협회의 눈치를 보느라 그렇다 쳐도 박시우가 대표로 있는 아리아 길드는 프로젝트를 취소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박시우는 그 이유가 길드세 인상과 관련이 있다며 짧게 말을 덧붙였다.
S급 이상 던전 클리어를 기대하고 있었던 나에게 있어 가장 서운한 소식이었다.
─ 대신 조만간……. 아직 확실하진 않아서 말하기 조심스럽긴 하다만 일이 하나 있을 거다. 정해지면 알려 주지. 그리고 최수현에게 길드세 인상 관련 이야기는 바로 좀 전해라.
─ 전화 끊으면 가서 바로 말할게.
박시우가 저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할 때는 정말 확실하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박시우와 통화를 마친 나는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죽어! 최수현!!”
“우리 집에서 꺼져!”
머리 위로 유리병 하나가 날아왔다.
“소금 통이네.”
나는 소금 통을 원목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한결이 때문에 봐주는 거야.”
나를 본 은영 누나가 씩씩거리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
최수현이 일부러 쿵쿵 발소리를 내는 은영 누나에게 한소리 하려 하자, 나는 최수현을 말렸다.
“형, 진정해요. 맨날 싸우는 거 질리지도 않아요?”
“저 여자가 먼저……. 됐다. 박시우가 뭐래?”
“어떻게 알았어요?”
최수현이 자신의 핸드폰을 살짝 보여 줬다.
은영 누나와 싸우느라 신경질 나서 박시우의 전화를 거절한 것 같았다.
자기가 전화를 안 받으면, 박시우의 다음 전화 상대는 당연히 나였다.
최수현이 소파에 앉자 살짝 열려 있던 방문에서 숑숑이가 튀어나왔다.
소파를 한 바퀴 빙 돈 숑숑이가 최수현의 무릎 위에 앉았다.
“개가 사람보다 낫네.”
“은영 누나한테 적당히 좀 해요.”
“딱히 누구라고 말한 적 없거든?”
최수현이 빨리 말이나 하라며 온몸으로 나를 재촉했다.
“협회에서 개편안이 내려왔대요.”
“그거야 예상했던 일이잖아.”
“길드세 인상한다는데요.”
“야, 뭐라고?”
“길드세요.”
“넌 그 중요한 걸 지금 말하면 어떻게 해!! 아, 내가 미쳐 진짜. 도움이 안 되냐! 도움이!”
“은영 누나 없으니까 이제 저한테 신경질이에요? 지가 전화 안 받았으면서. 몰라, 박시우가 메일 확인해 보래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수현은 이미 핸드폰으로 파일을 열고 있었다.
작은 핸드폰 화면에 있는 글씨를 확대해 개편안을 보고 있던 최수현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이런 개…….”
최수현은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문 너머로 박시우와 통화를 하는 최수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발끝에 뭔가가 툭 하고 차였다.
최수현이 내려놓은 숑숑이가 가만히 선 채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내가 등을 돌리자 녀석이 왈 하고 소리를 냈다.
“뭐?”
왈.
“…….”
내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숑숑이가 다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건 최근에 안 사실인데, 최수현은 아닌 척하면서 숑숑이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자기가 없을 때도 일주일에 한 번 미용사가 집에 와서 미용을 시켜 주는 것만 해도 강아지에게는 엄청난 사치였다.
─ 너 강아지 키워 봤어?
─ 어렸을 때.
─ 그때 강아지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어서 키웠냐?
그건 아니었지.
저 말을 할 당시에는 강아지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슬라임 덩어리였지만 말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숑숑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녀석이 내 손을 뿌리치고는 부엌으로 갔다.
“뭔데?”
숑숑이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냉장고 앞이었다.
냉장고를 열자 녀석이 금방이라도 들어갈 것처럼 냉장고에 다가갔다.
맨 밑 서랍을 보니 간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간식 하나를 꺼낸 후 적당히 숑숑이의 입에 물려 줬다.
문득 개 팔자가 사람 팔자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최수현은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길드세 인상 말고도 새 정권이 들어오고 난 후라 그런지 여러 가지로 해결해야 할 게 많아 보였다.
결국, 나는 S급 던전은 구경도 못 한 채 방치가 되었다.
실은 이건 이거대로 나쁘지는 않았다.
왕 게임이 끝나고, 유지한이 하층 로비 졸업을 앞둔 지금 바깥의 일보다는 탑의 일에 조금 더 신경을 쓸 타이밍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층에서 시작한 나는 거침없이 탑을 올라갔다.
[27과 28 사이로 이동됩니다.]
내가 탑을 오르는 만큼 필멸자 유지한도 점점 초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에 층과 층 사이에서 다시 만났을 때만 해도.
─ 야! 초월 언제 시켜 줄 거야!
─ 자격이나 만들고 말해.
─ 자격? 무슨 자격?
나는 유지한에게 초월을 하려면 스탯 하나가 SS를 넘겨야 한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초월이란, 결국 SS 스탯의 벽을 넘는 것이었다.
─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떻게 해! 이거 완전 순 사기꾼 아니야! 내 공적치 내놔!
─ 자기가 약한 걸 왜 나한테 따져?
─ 이 개…….
─ 개 뭐! 쓰레기 복창시켜 줄까? 개 뭐!
─ 개나리 같은 놈아.
유지한도 자기가 말해 놓고 어이가 없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초월자 유지한이라면 모를까, 탑 유지한에게는 여전히 <맹세의 언약>의 효과가 남아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고, 나와 유지한은 어느새 30층 클리어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나는 바로바로 탑에 들어오는 편이지만, 23층을 넘어갈 무렵부터 유지한은 탑에 들어오는 텀이 현저히 늦어지는 것을 느꼈다.
매번 올 때마다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해야 하나?
몇 번을 경험해도 이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하루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일주일, 한 달이 되어 있었다.
탑에 들어온 유지한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다.
[화났어? 초코바 줄까?]
“죽어.”
뒷문으로 들어온 (오랜만에 문을 부수지 않고)유지한이 내가 앉아 있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나 때문인지 유지한은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데에는 도가 텄다.
[싫으면 말아라?]
“준다고 그랬다가 안 준다 그랬다가. 장난해?”
[싫다며.]
“싫다고 안 했다고!”
[보통 죽으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싫다고 생각하거든?]
유지한의 사고방식은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지한이 조금 떨어진 곳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옷만 교복을 입으면, 지난번 송도에서 봤던 초월자 유지한과 판박이였다.
동일 인물이니 당연한 거긴 한데 뭐랄까 그전에는 분위기가 살짝 다른 느낌이 있었다.
[10만.]
“이…… 양아치냐?”
[공적치도 많은 게, 싫으면 말아라?]
나야 다시 가지고 가서 내가 먹어 버리면 되니 손해는 아니었다.
유지한이 툴툴거리며 상태창을 열었다.
[유지한(수호자)으로부터 공적치 10만을 후원받았습니다.]
[공적치 1,000을 소모해 ‘유지한’에게 ‘초코바(특수)’를 선물했습니다.]
유지한이 아이템창에서 초코바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고백하자면 최근 들어 나와 유지한은 층과 층 사이에서 크게 하는 게 없었다.
중앙길드가 활개 칠 때야 탑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어서 그러려니 했겠지만, 지금의 유지한은 아니었다.
유지한에게 정보라면 차고 넘쳤다.
나에게 본인 입으로 30층을 빼고 전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성질 급한 유지한은 30층의 정보를 먼저 내놓으라고 협박했지만, 나는 그때 가서 알려 주겠다며 입을 싹 닫았다.
초코바 하나를 전부 삼킨 유지한이 말했다.
“의논할 게 하나 있어.”
[응? 뭔데?]
평소 내 말이라면 귓등으로도 안 듣던 유지한이 나에게 의논이라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뭐든 말해 봐!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왜 흥분하는 건데!’
[네가 날 의지한다고 하니까 좀 기뻐서.]
“이럴 땐 초코송이가 부러워지는군. 그놈은 자기 신에게 닦달당할 일은 없으니까.”
[이게 진짜! 그래서 무슨 일인데?]
책상 위에 편하게 앉은 유지한이 말했다.
“한미래에 대해서다.”
[한미래? 한미래는 탑에 잘 올라가고 있는 거 아니야?]
다른 유저와 다르게 시작부터 왕 게임을 하면서 구를 대로 구른 데다가 유지한의 특훈(이라고 쓰고 거의 일방적인 폭력) 덕분인지 한미래는 빠른 속도로 탑을 오르고 있었다.
유지한이 최근 탑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 이유도 한미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유지한이 한미래를 기다려 준다는 것 자체에도 의심을 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유지한은 아주 정이 없는 놈은 아니었다.
하층 로비의 상황이, 유지한의 주변이 홀로서기를 강요했을 뿐이었다.
“잘하고 있지. 지금 24층이다.”
[그런데?]
“20층을 통과하는 데 일주일, 21층을 통과하는 데 2주가 걸렸다. 참고로 23층을 통과하는 데는 한 달 반이 걸렸지.”
[거긴 그렇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만한 층이 아닌데?]
갈렌 지방에서 시작된 반란은 이윽고 내전이었고, 미션의 대부분이 해방군을 도와 전투를 치르는 것들이었다.
연속된 싸움, 그것도 몬스터와의 싸움이 아닌 전쟁으로 인해 지칠 수는 있어도 저 클리어 시간은 어딘가 이상했다.
[한미래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거라고!”
유지한이 답답하다며 가슴을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유지한이 불쌍해졌다.
오죽했으면 나에게 와서 하소연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