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했더니 신이 되었다-227화 (227/760)

227화 잊혀진 세계의 군주 (3)

“대충 알아먹어.”

유지한이 신 주제에 디테일하게 따지지 말라며 투덜거렸다.

이은희는 자신이 모시는 신이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유지한도 지존검제의 진짜 신명을 모른다.

이름이 어떻든 간 저 녀석이 이은희의 신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녀석에게는 말하지 말아 줄래?]

“왜지? 그 녀석은 자신의 신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유지한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미래와 서유라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슬라임 놈이 재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슬라임 바깥의 세계는 이미 반쯤 무너져 있었다.

“저것들은 이계의 괴물인가?”

[맞아. 밤을 갉아 먹는 벌레지. 나는 책벌레라고 부르고 있어.]

“책벌레치고는 너무 큰 것 같은데.”

[대충 그렇다고 해.]

“도와줄 수 있으니까 나타난 거겠지?”

[아니?]

“…….”

[나는 널 도와줄 수 없어.]

“꺼져!”

유지한이 들고 있던 불가살이의 검을 머리 위로 붕붕 휘둘렀다.

도와주지 않을 거라면 왜 나타났단 말인가.

[괜찮겠어? 내가 사라지면 너는 밖에 있는 괴물들을 혼자 상대해야 하는데.]

밖에 있는 그림자들과 책벌레들이 슬라임 안에 갇혀 있는 유지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책벌레(밤을 갉아 먹는 벌레)야 그렇다 치고.

“저 검은 것들은 대체 뭐지?”

[구울. 실체를 잃어버린 괴물이라고도 하지.]

“실체를 잃어버려?”

[이 세계의 중심인 차원의 조각이 침식당하면서 살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실체를 빼앗아 갔잖아.]

슬라임의 설명에 유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것이 느껴졌다.

유지한은 슬라임 너머에 있는 구울과 책벌레들을 바라봤다.

유지한은 이미 아틀락 나챠를 상대할 때 절대적인 힘의 격차를 느꼈다.

이계의 괴물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들은 이계의 괴물조차도 능가할 정도로 강했다.

[언제까지 주변의 도움을 바랄 거야?]

“…….”

[너는 할 수 있어.]

“나는…….”

한미래가 초월을 했다는 걸 알았을 때, 내심 짜증이 났다.

한미래에게 짜증이 난 스스로에 대한 짜증이었다.

유지한의 스탯은 98%에서 멈춰 있었다.

한미래와 자신의 차이가 뭐지?

그 2%야말로 유지한이 느끼는 진짜 ‘초월의 벽’이었다.

“나를 도와줄 수 없다면, 저 둘을 지켜 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오래는 못 버텨.]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슬라임 놈의 말이 맞다.

유지한이 그날, 소테르 신의 화신체인 토끼 인형을 베어 버린 건 스스로에 대한 각오의 표시이기도 했다.

아틀락 나챠를 상대했을 때, 여차하면 소테르 신이 어떻게든 해 줄 거라고 믿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슬라임, 아니……. (자칭) 지존검제라는 녀석이 나타났을 때 유지한은 내심 안심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 세계는 지존검제의 세계도, 소테르 신의 세계도 아니었다.

세계의 결말을 짓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유지한 본인이어야만 했다.

설령 그 세계가 침식된 세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유지한은 슬라임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슬라임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며 서유라와 한미래를 보호했다.

힘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유지한이 나오자 구울과 책벌레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었다.

[놈들의 말에 현혹되지 마.]

“이놈들 쫓아내 줄 거 아니면 닥쳐.”

유지한은 불가살이의 검을 쥐며 자세를 잡았다.

이건 자신과 싸움이었다.

다가오는 구울들을 상대로 유지한은 쉬지 않고 초식을 밟았다.

하나가 끝나면 그다음, 다시 다음. 구울들을 쓰러트리기 무섭게 책벌레가 유지한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유지한이 낙영비화검(落英飛花劍)의 초식을 사용하자 책벌레의 몸이 찢겨 나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 내 몸, 내 몸 어디 갔어?

─ 나는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야.

─ 아아, 이 세계는 끝이야.

─ 너는 왜 살아 있는 거야? 몸, 몸을 내놔. 나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구울을 벨 때마다 그들의 기억이, 목소리가 유지한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흘러들어 왔다.

불가살이의 검에 있던 붕대가 요동치더니 유지한의 손목을 강하게 옭아맸다.

팔이 잘려 나가지 않는 이상 더는 검을 놓지 않을 것이었다.

유지한이 로비를 부수고 난 이후 남아 있던 유저들은 너도, 나도 탑에 도전했다.

─ 차라리 중앙길드 시절이 좋았어!

─ 모두가 너처럼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 그가 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죽는 일은 없었을 거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 나, 난 이러려고 그 기간을 버틴 게 아니야!

누군가는 유지한을 진심으로 원망했고, 저주했으며, 죽이려 들었다.

로비를 부술 때부터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로비뿐만이 아니라, 30층까지의 세계를 부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들에겐 유지한이 분노의 대상일지 몰라도, 유지한에게 분노의 대상은 ‘시련의 탑’을 만든 자였다.

“죽어!”

피투성이가 된 유지한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탑을 부수고 그놈에게 한 방 먹여 주기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의 분노 따위는 얼마든지 받아 낼 수 있었다.

그것이 초월자가 되지 못한 유지한의 각오였다.

[초월의 자격을 달성하였습니다.]

[세계의 지배자가 당신의 힘을 인정합니다.]

[한계를 돌파합니다.]

[당신의 이명은 ‘잊혀진 세계의 군주’입니다.]

[당신의 금기(禁忌)는 ‘하나를 위한 희생’입니다.]

[초월기 ‘흑화’를 획득하였습니다.]

“뭐?”

상태창을 본 유지한은 진심으로 할 말을 잃었다.

“빌어먹을! 기준이 뭐야, 이거!”

어렵게 한계 돌파를 했는데, 돌아오는 스킬이 흑화라니 누굴 중2병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유지한은 다급하게 초월기를 사용했다.

“…….”

뭐가 달라진 건데!

바닥을 박차며 몸을 한 바퀴 굴린 유지한이 달빛 베기를 사용했다.

땅에 발을 디디기 무섭게 구울이 유지한의 다리를 붙잡았다.

유지한이 별생각 없이 구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 이놈 물리 공격 안 통하…….”

유지한의 불가살이의 검에 찔린 구울이 괴로워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통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은 여전히 만신창이었지만, 초월기를 사용하고 난 이후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유지한이 지면을 박차며 낙영비화검(落英飛花劍)의 초식을 밟았다.

왕의 권능으로 강화하지 않았음에도 뻗어 나간 검이 책벌레들을 잘게 조각냈다.

그동안 고생했던 게 우스울 정도의 힘이었다.

벽을 넘는다는 건 유지한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쾌감을 선사했다.

유지한의 손에 있는 불가살이의 검에서 더욱 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왕의 권능이 발동합니다.]

[왕의 권능으로 인해 ‘포식’ 스킬이 극대화됩니다.]

“죽어!”

입 안으로 들어온 살점을 뱉어 낸 유지한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불가살이의 검을 휘둘러 댔다.

콰아아앙.

퍼어어어엉.

이제는 싸움의 현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아아, 망했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서(슬라임)가 몸을 흔들었다.

사서가 나타날 수 있었던 건 책벌레가 차원 일부를 먹어 치웠기 때문이었다.

이은희의 세계점에서 사서가 힘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소테르 신의 화신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두 사람의 세계점을 연결한 주범도 사서였다.

사서란 방관자와도 같았다.

최고 관리자가 룰을 어기는 순간 다른 신들도 규칙을 어길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세 사람을 치료해 준 것만으로도 다른 신들이 여기저기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한미래의 신인 ‘의술의 신’이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의 슈퍼 인사라는 점이었다.

[의술의 신 : 내 작은 제자를 건드리면 다 죽는 거야!! 죽고 싶어? 앙?]

[???의 신 : 아니……. 진정 좀 하게.]

[의술의 신 : 라그나로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오늘 여기서 본좌가 새로운 역사를…….]

[???의 신 : 누가 이 미친놈……. 신 좀 말려 봐!]

[무술의 신 :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의 신 : 암흑 파괴 신이란 놈은 대체 누구야!]

[@@의 신 : 관리자는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지?]

……뭐.

대충 이런 상태였다.

원래라면 도전자가 모시는 신 외에는 세계점을 열람할 수 없었다.

책벌레가 차원을 갉아 먹은 덕분에 여기저기서 신들이 불난 집에 구경을 오듯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흑화(?)한 유지한이 밤을 갉아 먹는 벌레들을 어느 정도 쓰러트리자 사서가 다시 주도권을 가지고 왔다.

[사서의 개입으로 인해 해당 차원이 폐쇄됩니다.]

힘을 사용한 대가로 슬라임의 몸이 다시 작아졌다.

한미래와 서유라의 몸이 슬라임에서 빠져나왔다.

“푸하……!”

먼저 정신을 차린 한미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괴물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갈라진 공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쏟아지며 의식을 잃었다.

한미래는 의사답게 자신과 서유라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서유라도, 자신의 몸도 지나치게 멀쩡했다.

부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유지한이 이런 회복 스킬을 사용했을 리가 없었다.

토도도동.

“응?”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한미래가 고개를 돌렸다.

주먹보다 조금 큰 슬라임이 한미래의 눈높이로 살살 튀어 오르고 있었다.

슬라임은 마치 한미래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고 있었다.

한미래가 슬라임을 멍하니 바라봤다.

젤리 같은 감촉에 내부가 훤히 비치는 구도, 동그랗게 달라붙어 있는 검은 눈동자.

이, 이건…….

“해, 해부해 보고 싶어!”

[…….]

“아니지. 이게 아니라……. 슬라임이 왜 여기 있는 거지?”

한미래가 손을 뻗자 슬라임이 높이 튀어 오르며 한미래의 손을 피했다.

“아, 아까워라.”

한미래는 슬라임이 튀어 오른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유지한이 불가살이의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유지한의 주변에는 수많은 책벌레와 구울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피와 살의 바닷속에서 유지한은 굳은 것처럼 서 있었다.

한미래가 유지한을 바라보자 그제야 슬라임의 몸이 위아래로 끄덕였다.

화타의 검을 쥔 한미래가 유지한에게 다가갔다.

“유지한?”

“…….”

“너 괜찮……. 아 보이지 않네.”

가까이서 본 유지한의 상태는 훨씬 더 처참했다.

의술의 신을 모신 덕분인지 한미래는 치료를 위한 보조 스킬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마력을 투과해 유지한의 몸 상태를 확인한 한미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 몸으로 싸운 것도 신기했으며, 서 있는 게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유저들은 평범한 인간들에 비해 튼튼한 축에 속했다.

그런데도 유지한은 당장 치료든 뭐든 해야 할 것 같았다.

한미래가 갈라진 공간 사이에 죽어 있는 책벌레를 밟고 유지한의 앞으로 다가갔다.

순식간에 움직인 유지한의 검 끝이 한미래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

“이런 또라이 같은 머스마를 봤나!”

뒤로 물러났던 한미래가 몸을 앞으로 당기며 유지한의 공격을 피한 후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내다 꽂았다.

“커흑…….”

“야! 너 인성 문제 있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픽 쓰러지는 유지한의 모습에 옆에서 통통거리던 슬라임이 움직임을 멈췄다.

0